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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네가 상식을 알아? (133/170)


133화. 네가 상식을 알아?
2022.09.11.



‘드디어 도착했어!’

멜리사는 오랜 여정 끝에 도착한 난보르 성을 둘러보며 감격에 젖었다.

화려한 수도와는 달리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성은 고풍스러웠고, 내부는 가치 높은 예술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성 곳곳에 세심한 손길이 닿아 있어 과연 부유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집이다 싶었다.


‘웬만한 수도 귀족보다 부유한 지방 귀족이 훨씬 낫다더니!’

멜리사는 그 소리를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지방 귀족들의 헛소리라고 치부했던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잊고 희희낙락했다.

부드럽게 웃으며 시중을 드는 시녀들도 순진해 보여서 이용해 먹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의 시녀들은 어찌나 눈치 빠르고 잇속에 밝은지 돈이나 보석을 쥐여 주지 않으면 도무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유순해 보여 휘두르기 좋겠다는 인상이었다.


‘아직 난보르 남작과 남작 부인의 얼굴은 못 봤지만…….’

신랑이 될 난보르 영식의 말로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신부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원래 북부의 관습이라나?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 사는 귀족 부부라면 조금만 애교를 부려도 껌뻑 넘어올 것이 분명했다.

처지가 이처럼 몰락하기 전에는 수도 사교계에서도 나름의 시선을 끌지 않았던가.

멜리사는 이 영지를 완전히 자신의 수중에 넣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자신감에 찬 상태로 시녀가 방으로 가져다준 식사를 마치자마자 수도에서 왔다는 심부름꾼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전 바인 후작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뭐?”

멜리사는 정중하게 소식을 알리는 심부름꾼의 이야기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손으로 약을 건네긴 했지만, 그 자존심 강한 아버지가 정말로 약을 먹고 세상을 뜰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감옥에 갇혀 평생을 썩는 것이나 세상을 떠나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것은 없다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 독을 먹고 자진하셨어?”

“발스테드는 친절하게 죄수의 사인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 그거야 그렇겠지.”

멜리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가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걸 인정했다.

발스테드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게다가 이제 와서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죽었으면 끝이지.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멜리사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 나니 뒤늦게 불길한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댔다.

다행히 시중을 들어 주던 시녀들은 자리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함이 가시지 않아서 얼른 문을 열고 복도를 휘휘 살피기까지 했다.

역시나 복도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멜리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심부름꾼을 향해 쏘아붙였다.


“너, 뭐라고 하고 날 만나러 온 거야?”

“멜리사 양에게 급히 전할 소식이 있어 수도에서 온 심부름꾼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쓸데없는 소리는 안 했겠지?”

“쓸데없는 소리라면…….”

“아버지 이야기 말이야!”

멜리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목소리를 높이려다, 바깥을 힐끗대며 다시 소리를 낮췄다.


“이 멍청한 심부름꾼 같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내가 발스테드에서 죽은 죄인의 딸이라는 걸 알면, 이 좋은 영지에서 날 신부로 받아 주겠어?”

그냥 죄인의 딸이래도 쫓겨날 판에 발스테드에서 죽은 죄인의 딸이라니.

당장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수도에는 파다하게 소문 난 이야기가 시골 영지까지 퍼지진 않았는지 무사히 결혼 직전까지 오긴 했지만, 제대로 식을 올리고 혼인 증명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멜리사는 푹 한숨을 내쉬고 심부름꾼을 재촉했다.


“했어, 안 했어?”

“소식을 전하러 왔다는 말만…….”

겨우 들려온 대답에 멜리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안 했다니 다행이네. 이대로 입 닫고 돌아가. 얼른!”

“그럼…… 후작님의 시신은 어찌할까요?”

“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따님이시니까요. 원래 수습은 가족이 합니다.”

“난 몰라. 그런 건 나디아 걔가 하라고 해. 바인 후작이잖아. 바인 사람은 걔가 챙겨야지. 왜 나한테 그래? 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멜리사가 더 생각하기 싫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아버지 죽길 바란 사람도 그쪽이잖아. 나한테 약까지 전해 주라고 하고. 바라던 대로 일이 풀렸으니까 수습도 그쪽에 알아서 하라고 해. 내 이야기 알아들었지?”

 

 
멜리사는 주위를 두리번대다 탁자 위에 놓인 고급스러운 장식 하나를 심부름꾼의 품에 쑤셔 넣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오래 있으면 여기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당장 가. 넌 그냥 내가 잘 도착했나 궁금해서 나디아가 보낸 심부름꾼인 거야. 알겠어?”

심부름꾼은 멜리사의 호들갑에 그대로 밖으로 밀려났다.

불편한 얼굴이 사라지자 멜리사는 개운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심부름꾼을 그렇게 보내 버린 것이 후회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돌아가는 걸 내 눈으로 지켜봐야지!’

멍청한 심부름꾼이 혹시라도 쓸데없는 소리를 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보내는 건 너무 불안했다.

멜리사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고, 반대편에서 문을 열기 위해 서 있던 시녀와 마주쳤다.


“어머나!”

시녀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멜리사는 얼굴에 가득하던 황급한 기색을 지우고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기억 속 나디아가 제 시녀들에게 이런 미소를 지었었다.

진짜 이 집안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최대한 성질을 감춰야 했다.


“수도에서 온 심부름꾼은 이미 떠났니?”

“네. 황급히 돌아가서 여비도 못 챙겨 줬습니다, 아가씨. 어쩌지요?”

“어머. 그랬구나. 내가 조금 챙겨 줬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마.”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긴 여정으로 여독이 쌓이셨을 것 같아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했습니다, 아가씨. 아니면 간식을 좀 더 가져다드릴까요? 지역 특산품으로 만든 케이크가 있답니다.”

시녀는 다정하고 사근사근하게 멜리사를 챙겨 주었다.

확실히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아가씨에게는 과한 보살핌이었다.

신랑 쪽에서도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 증명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이라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같은 속셈으로 연기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멜리사는 상대 쪽의 흑심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로 시녀의 친절함에 흠뻑 젖어 있을 뿐이었다.


“음…… 그럼 케이크부터 먹을까?”

서로에게 행복한 깊은 착각의 늪이었다.

***



“멜리사 바인이 알아서 하랬다는군.”

알테어가 급히 날아온 서신을 읽고 내게 전했다.

멜리사를 따라간 심부름꾼이 보낸 서신이었다.


“결국 그렇게.”

“어찌하라고 할까?”

“인수하는 사람이 없는 시신은…….”

“들판에 던져 까마귀밥이 되게 하지.”

“……원칙대로 하라고 하고 싶지만, 어쨌거나 바인 가문의 사람이고 제 숙부이니 그랬다간 괜히 구설에 오를 거예요. 적당히 수습해서 매장하는 편이 좋겠어요.”

“그렇게 하는 척하고 들판에 던져 버릴 수도 있어. 당신 모르게 처리할 수도 있는데.”

무겁게 내린 결정에 알테어가 다소 싸늘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덕분에 그의 제안이 진심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들었는데 어떻게 ‘당신 모르게’가 될 수 있어요.”

“…….”

내 지적에 알테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곡을 찔렸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냥 멋대로 처리해 버렸어야 했는데.”

알테어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뭐든 당신에게 묻는 게 습관이 돼서 그래.”

“아주 좋은 습관이네요.”

나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 칭찬하듯 알테어의 어깨를 토닥였지만, 그의 표정은 오히려 불만스럽게 변했다.


“좋은 습관을 만든 보상이 겨우 이거야?”

“보상받고 싶어요?”

“바란다면, 주는 건가?”

알테어가 씩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홀랑 넘어갈 뻔했지만, 이럴 때 잘못 넘어가면 생각보다 더 큰 보상을 줘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애써 마음을 붙잡고 헛기침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애도 아니고. 그런 걸로 보상을 바라다뇨. 그건 당연히 가져야 하는 습관 아닌가요?”

“세상엔 당연한 걸 못 하는 사람도 많아. 마땅히 보상이 필요하지.”

“도대체 무슨 보상을 원하길래 이렇게 거창하게…….”

투덜거리며 입술을 비죽 내밀자 그 위로 알테어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번에는 알테어가 헛기침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난 욕심 없어. 큰 걸 바라지 않지.”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간지러워졌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알테어와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란 상상조차 못 했었는데.


“……나도 욕심 없어요. 큰 걸 바라지도 않고요.”

그냥 딱 이 정도로만 지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



“어휴. 이거야?”

“조심해서 옮겨.”

일꾼 두 사람이 속삭이며 거적에 둘둘 말린 물체를 옮겼다.


“발스테드에서 나온 거지?”

“거기서 죽은 놈 시신을 수습해 주는 사람도 다 있네.”

“어디 높으신 집안 귀족 양반이라던데.”

“귀족도 별거 없네. 죽어서는 이렇게 거적때기에 싸여 묻히다니.”

“그러게 말이야.”

일꾼들이 키득대며 걸음을 재촉했다.

명을 받은 곳까지 시체를 옮기려면 노닥거릴 틈이 없었다.

이런 험한 운송물은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한참이나 둘러 가야 해서 시간이 배로 걸렸다.

그만큼 보수도 두둑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제대로 붙잡질 못해? 계속 시체가 흔들리잖아.”

“허? 무슨 소리야? 그러는 자네야말로 제대로 붙잡아. 난 제대로 잡고 있다고!”

“헛소리! 난 처음부터…….”

두 일꾼이 실랑이를 벌이는 그 순간. 시체가 크게 흔들리더니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그들이 서로 ‘네 탓이잖아!’ 하는 눈빛으로 상대를 쳐다보는 그때.

움찔.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가 움찔했다.


“어……?”

“바, 방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질책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일꾼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 크게 비명을 지르며 함께 줄행랑쳤다.


“으, 으아악!”

“귀, 귀신이다!”

음산한 골목을 뒤흔드는 비명 사이로 일어나 앉은 시체가 으드득, 으드득 목 스트레칭을 하며 형형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밖으로 나왔군. 그 거지 같은 곳에서 나왔어.”

씩. 웃는 얼굴에 골목을 가득 채운 음산함보다 더 짙은 어둠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난 안 죽었지.”

킥…… 키킥…….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시체가, 아니, 조금 전까지 분명 시체였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뚝대며 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입에서 계속 키득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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