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등신이네. (134/170)


134화. 등신이네.
2022.09.14.



 
알테어는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서류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훈련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나디아가 바인 후작가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 후로는 그도 덩달아 책상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디아는 모두 자신이 해결할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알테어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 사람을 뽑는 일은 중요했다.

시녀장이 된 마리가 꼼꼼하게 사용인을 선발하는 중이라는 건 알고 있고, 나디아 역시 그녀를 신뢰하며, 자신 역시 그래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뭐든 제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심 안 되는 게 완벽주의자들의 습성이었다.

알테어는 마리가 낙점한 사용인들에 대한 조사를 조용히 진행하고 있었다.

선량한 사용인을 가장해 나디아에게 해를 끼칠 만한 사람이 들어온다면 일이 귀찮아질 거다.

그러니 알테어는 그런 귀찮은 일이 발생하기 전에 대비하려는 것뿐이다.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귀찮은 일을 하고 있다는, 다소 모순적인 상황이었지만, 그 결과 제 부인의 주위가 안전해진다면 기꺼이 감수할 만했다.

원래 알테어는 남들이 다 귀찮다는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나디아가 사람을 제대로 곁에 두긴 했는지, 언제부턴가 마리도 알테어가 뒤에서 조용히 후보자들의 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사람을 고르면 먼저 알테어에게 인적 사항이 담긴 서류를 가져다줬다.

알테어는 묵묵히 그걸 받아 부하들에게 뒷조사를 명했고 말이다.

바인 후작저는 수도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저택이니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덕분에 알테어의 일거리도 아주 많았다.

하지만 나디아에게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사람 뽑는 일에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다들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다면 급히 사람들을 내치는 게 아니었다며 후회하는 걸 보기 싫었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알테어는 조금 우스워졌다.

언제부터 내가 타인의 후회 따위에 신경 썼다고?

하지만 나디아는 타인이 아니었다. 제 아이를 품고 있는 아내,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다.

그러니까 이런 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닌가.

물론 다른 사람들은 제 아내에게 어느 정도까지 열과 성을 바치는지 모르겠지만.


“영주님.”

한참 서류에 몰두하는 사이 밖에서 블란이 문을 두드렸다.

별다른 거절의 말이 없자 블란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어 알테어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말해. 무슨 문제야.”

“그게…… 아바르 바인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던 놈이 보고를 올렸는데…….”

“올렸는데, 뭐. 계속 말 흐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알테어가 답답함에 읽던 서류까지 내려놓고 미간을 찌푸리자 블란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시신을 수습 못 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발스테드에서 밖으로 시신을 가져 나오던 놈들이 뭐에 홀렸는지 귀신 타령을 하면서 도망쳤답니다. 시신을 버려두고 왔다는 곳에 가 봤더니 거적때기만 남아 있었고요.”

“이미 죽은 놈을 누가 중간에서 가로챌 이유는 없고…….”

알테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가늘게 뜨자 블란이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은밀히 알아본 바로는 아바르 바인의 사인이 병사라고 합니다. 독감에 걸려서 앓다가 고열로 사망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우리가 준 약은…….”

“예. 고열 증상은 없는 약입니다. 심장마비로 바로 죽었어야 맞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때 문 쪽에서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 안 죽었을 겁니다.”

알테어와 블란이 고개를 휙 돌렸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리온의 모습이 보였다.


“제가 멋대로 연 거 아닙니다. 복귀를 알리려고 왔다가…… 이미 열려 있어서 본의 아니게 대화를 듣게 됐습니다.”

리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변명하자 알테어가 블란을 날카롭게 쳐다보았고, 블란이 면목 없다는 듯 헛기침했다.


“너무 급해서 그랬습니다. 어차피 이 저택에는 우리 사람들뿐이잖습니까.”

“그런 안일한 습관이 중요한 때에 사고로 이어지는 법이다.”

알테어가 블란의 변명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카인과 함께 내일 새벽 훈련이다.”

“카인은 왜…….”

“분명 카인의 방정맞은 점이 네게 옮은 걸 테니까. 둘 모두 교육이 필요해.”

카인이 들었다면 매우 억울해할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꺼낸 알테어가 리온에게도 들어오라며 눈짓을 보냈다.

리온은 꼼꼼하게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단속은 기사들보다 낫군.”

“크흠!”

알테어의 질책이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하자 블란이 괜히 기침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의사 선생 이야기나 들어 보시죠. 그 사람이 안 죽었을 거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아마 죽은 것과 증상이 비슷해 착각한 거겠죠.”

“그게…… 가능합니까?”

블란이 영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온의 설명이 이어졌다.


“오래전에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약이 있습니다. 죽음을 체험할 수 있는 약이라고…… 그걸 먹으면 정말 죽은 사람처럼 심장 박동이 멈추고 숨이 멎죠. 일종의 놀이입니다.”

“놀이요?”

“재미로 먹었다가 실제로 죽은 사람이 몇 생긴 뒤로는 유행이 뚝 끊겼지만 말입니다. 그건 심장 박동과 숨을 평범한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약하게 낮추는 약인데, 심장이 약한 사람이거나 약의 용량을 잘못 조절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거든요. 보통은 서서히 숨이 회복되지만 말입니다.”

그런 약을 놀이랍시고 먹었다니.

블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귀족들의 사고방식은 따라갈 수가 없다고나 할까.


“뭐…… 그걸로 숙련된 의사를 속이는 건 어려워도…….”

리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발스테드에는 제대로 된 의사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야 그렇지. 누가 죽든 신경도 안 쓰는 곳이니까.”

알테어가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아바르 바인이 그 약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듣자 하니 유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고열을 앓았다니 증상도 그 약과 일치합니다.”

리온의 말대로 아바르 바인이 ‘죽음을 체험할 수 있는 약’을 먹었고, 그걸로 발스테드의 간수를 속여 밖으로 나왔다면…….


“아바르 바인의 시신에는 관심 없다. 하지만 그놈이 살아 있다면 분명 나디아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겠지. 당분간 나디아가 외출을 못 하게 잘 막고, 곁에 호위를…….”

차분하게 대비책을 늘어놓던 알테어가 손을 휘휘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디아의 곁은 내가 지키지.”

“호위 업무는 영…… 재주가 없으시잖아요?”

블란이 미덥지 못하다는 듯 알테어를 위아래로 훑었다.

검을 다루는 실력은 누구보다 뛰어난 알테어지만, 그의 주특기는 대상을 파괴하는 거였다.


“카인에게 맡기시죠. 그건 그놈이 더 낫습니다.”

카인은 성격도 유들유들하고 눈치도 빨라서 호위 대상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검 쓰는 실력이야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나니 호위로는 제격이었다.


“게다가 영주님이 내내 곁에 붙어 있으면 마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괜히 불안해하실 거고요.”

바른 지적에 알테어가 입을 꾹 다물자 블란이 얼른 조언을 덧붙였다.


“요즘 마님이 과중한 업무로 바쁘시니, 일손을 빌려 주겠다며 카인을 붙이십시오. 그럼 이상하게 생각 안 하실 겁니다. 아바르 바인 정도면 카인의 선에서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상대이기도 하고요.”

수도에서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던 귀족이 감히 카인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납득한 알테어가 그 말에 따르겠단 뜻으로 얌전히 자리에 앉자 블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든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영주님이 마님의 일만 되면 앞뒤 재지 않고 들이박으니 부하로서는 골치가 아팠다.

잔뜩 질린 블란의 얼굴과 진지한 알테어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리온이 풉 하고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왜 그런가 싶어 두 사람이 리온을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이렇게 아내의 일에 등신 같이 구는 사람을 보고 여태까지 제가 무슨 생각을 했나 싶어서 말입니다. 제 눈에 깍지가 단단히 꼈던 모양입니다.”

“아니, 등신이라니…….”

블란이 리온의 발언에 펄쩍 뛰었다.


“아주 정확합니다, 의사 양반! 내가 딱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

반가움에 리온의 두 손을 단단히 붙잡는 블란의 뒤통수에 알테어의 싸늘한 시선이 꽂혔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블란이 입을 홉 다물고 알테어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블란. 새벽 훈련, 기대하도록.”

“……결국 이야기가 그렇게.”

블란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



“신랑과 신부. 혼인 서약서의 내용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

“네.”

“네.”

멜리사는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사제가 가져온 혼인 서약서를 쳐다보았다.

이제 이 서류에 서명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아래에 빈 곳이 보일 겁니다. 이곳에 두 사람이 서명하면 혼인이 성립됩니다. 먼저 신부께서 서명하시지요.”

사제의 말에 옆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어린 사제가 펜을 건네주었다.

멜리사는 거의 펜을 뺏다시피 다급하게 가져와 서둘러 서명했다.

멜리사 바인.

휘갈겨 쓴 글씨였지만 이름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신랑께서 서명해 주십시오.”

어린 사제는 멜리사가 서명했던 펜을 회수한 뒤 조르르 신랑에게 다가갔다.

신랑 역시 뭐가 그리 급한지 서둘러 펜을 가져가 후다닥 글씨를 휘갈기는 걸 보며 멜리사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저리 급해?’

서약서가 완성되자 그 이후의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결혼식은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난보르 남작 영식이 검소한 결혼식이 가풍이라며 결혼 후에는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멜리사를 달래 주었기에 서운함을 삼킬 수 있었다.

결혼식이 끝났으니 이어지는 건 부부의 첫날밤이었다.

멜리사는 준비된 신방에 앉아 두근대는 심정으로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수도에서 나름대로 인기를 얻으며 사내들을 주물렀던 멜리사지만 정숙한 숙녀의 도리를 지켜왔기에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긴 했어도 결국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라는 소리였다.

남편과 밤을 보낸다는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정한 남편이 동화 속의 공주님처럼 소중하게 날 안아 주겠지?

하지만 뭉게뭉게 피어난 멜리사의 아름다운 상상이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다.

그날 남편은 신방을 찾지 않았고, 멜리사는 홀로 깊은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도대체 이게 뭐야?’

잔뜩 성질이 난 멜리사는 결혼식에서 썼던 베일을 바닥에 집어 던지며 씩씩댔다.

무슨 일이 있길래 신부를 첫날밤부터 버려 둔단 말인가? 사용인들이 얼마나 쑥덕댈 텐데!

멜리사는 남편이 오면 당장 쏘아붙이리라 작심했지만, 이 역시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다.

날이 밝고 해가 중천에 가까워지는데도 남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이 사람이야?”

“우릴 돌봐 줄 사람이야?”

“그럼 하녀인가?”

정체 모를 어린 애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멜리사를 앞에 두고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하녀들이랑은 옷이 다른데?”

“하지만 아버지가 그러셨는걸? 이 여자가 우릴 돌봐 줄 거라고!”

“뭐야. 그럼 하녀 맞네! 하녀 주제에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다니. 건방지게.”

아이 하나가 매섭게 코웃음을 흘린 뒤 넋을 놓은 멜리사의 다리를 걷어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