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주인님께선 삽질을 아주 잘하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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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주인님께선 삽질을 아주 잘하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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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주인님께선 삽질을 아주 잘하셔.
2022.09.18.
“이게 무슨 짓이야!”
갑작스런 상황에 넋을 놓고 있던 멜리사가 빼액 소리를 질러 아이들을 위협했다.
아니, 단순히 위협에만 그치지 않았다.
“누가 함부로 사람을 때리래?”
“아얏!”
멜리사는 제게 발길질한 아이에게 꿀밤을 먹이며 눈을 부라렸다.
결혼하기 전까지 얌전한 척하고 있었을 뿐이지, 멜리사도 보통 성격은 아니지 않은가?
꼬맹이들의 건방진 언사에 휘둘릴 나약한 귀족 영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기세등등해도 아이는 아이인지라, 멜리사의 당당한 반응에 단단히 패악을 부리려던 아이들이 어깨를 움찔하며 저들끼리 눈치를 살폈다.
덕분에 멜리사의 기세는 더욱 당당해졌다.
‘날 보고 하녀라니. 아무래도 건방진 꼬맹이들이 사람을 잘못 찾아 왔나 본데.’
옷을 잘 차려입은 걸 보니 성을 방문한 손님들의 아이일 거다.
이 집안에는 아직 애들이 없다고 들었으니까.
영문도 모른 채 소박을 맞은 바람에 안 그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마침 화풀이할 구석을 찾은 멜리사가 매섭게 아이들을 쏘아보았다.
“너희 내가 누군지 알고 이딴 무례를 저지르는 거야? 어?”
발을 쿵 구르며 위협하자 아이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기세에 눌린 거다.
“누, 누군데……?!”
서로 눈짓을 주고받던 아이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꼬마가 앞으로 나섰다.
멜리사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고는 있었지만 이미 한 번 주눅이 들어서인지 기세는 처음 들이닥칠 때만 못했다.
“난 이 집의 작은 마님이야. 이 집안 둘째 도련님과 결혼한 사이라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멜리사가 턱을 치켜들고 당당히 외치자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둘째 도련님?”
“그거 우리 아빠 아냐?”
“맞아. 우리 아빠야.”
수군대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멜리사의 표정도 덩달아 이상해졌다.
아빠라니? 도대체 저 꼬마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서로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대치하고 있는 그때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이 등장했다.
어제 결혼식으로 멜리사의 남편이 된 난보르 영식이었다.
멜리사는 반색하며 그를 반기려다, 어젯밤 소박맞은 사실을 떠올리고는 뚱한 표정으로 삐딱하게 섰다.
온몸으로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멜리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수군대는 아이들 곁으로 다가섰다.
“여기 있었구나, 이 녀석들.”
다정한 말투에 불안한 눈으로 멜리사를 경계하던 아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빠!”
“무서웠어요!”
“무서운 아줌마야! 으앙!”
아이들이 ‘아빠’라고 외치며 제 남편의 품에 안기는 모습을 본 멜리사가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아, 아빠?”
당황해 터져 나온 소리에 드디어 남편의 시선이 멜리사를 향했다.
그는 결혼식을 치를 때까지의 다정하고 달콤했던 눈빛 대신 귀찮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인. 애들에게 뭐라고 했길래 이러지?”
질문을 받은 건 멜리사지만, 대답한 건 아이들이었다.
멜리사가 넋을 놓고 있느라 미처 입을 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렸어요! 주먹으로 머리를 퍽!”
“맞아요! 내가 봤어요!”
“으아아아앙!”
난리통에 주먹으로 애를 후려친 사람이 되어 버린 멜리사가 정신을 번쩍 차리고 항변했다.
“아, 아니에요! 날 발로 걷어차서 꿀밤을…….”
그러다 자신이 이런 변명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보다 지금 이게 다 무슨 말이죠? 아빠라니? 당신이 이 애들 아빠라고요?”
“뭐…… 보다시피.”
멜리사에게 늘 깍듯하게 높임말을 쓰며 존중해 주던 난보르 영식은 그 자리에 없었다.
껄렁껄렁한 태도의 양아치 같은 남자가 반말을 찍찍 내뱉으며 멜리사를 업신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한 성격 하는 멜리사가 그걸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보다시피……라니. 애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나 있는데 감쪽같이 속이고 나랑 결혼해? 이거 미친놈 아냐?”
“그러는 너는 요조숙녀인 척, 귀한 집안 딸인 척 속였잖아. 네 아버지가 발스테드에서 썩다가 죽었다며? 어?”
“그, 그건 어떻게…….”
“심부름꾼이 왔다 갔는데 이유를 안 알아봤을 거 같아? 친정에서 돈이라도 좀 빼 올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안 되겠고…… 쯧.”
남편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멜리사를 위아래로 훑었다.
“빚 갚는 데 도움이 안 될 거 같으면 얌전히 애들이라도 잘 돌봐야지 않겠어? 그게 아내의 도리지.”
“비, 빚?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애만 있는 게 아니라, 빚까지 있어?”
멜리사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비, 빚은 부모님께 갚아 달라고 하면 되잖아! 부유한 영지의 주인에게 빚 따위가 무슨 걱정이라고!”
“흥. 부유한 영지는 무슨.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텅 비었는데.”
난보르 영식이 코웃음을 흘리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고는 아이들을 다시 멜리사에게 떠밀었다.
“공식적으로 당신 애들이 될 녀석들이니 잘 보살피도록 해. 오늘처럼 함부로 손찌검했다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남편의 위협적인 눈빛에 멜리사가 어깨를 움찔했다.
도대체 무엇을 각오하라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 공식적으로 내 애가 될 거라니……?”
“당연하잖아. 그러려고 결혼한 거라고. 애들을 사생아로 만들 수는 없으니 부인이 필요했거든. 애 엄마들은 나랑 결혼할 수가 없는 처지라.”
남편이 다정하게 아이들의 뺨에 입 맞추는 것을 본 멜리사가 부르르 떨며 소리를 빽 질렀다.
“돌았어? 이건 사기 결혼이야!”
“그래서?”
“사, 사기니까…… 당연히 무효화를…….”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할 건데? 여긴 난보르 영지야. 여기선 난보르 사람들의 말이 곧 법이지. 네 입 하나 못 막을 거 같아? 네 발 하나 못 묶을 것 같아? 아니면 널 도와줄 사람이라도 있나?”
난보르 영식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결혼한 이상,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얌전히 내 말에 따르면서 아내의 이름이나 빌려 달라 이 말이야. 이 방에 처박혀서 말이야. 어차피 비빌 곳도 없는 처지잖아.”
“그, 그런…….”
“난 다시 애들 엄마를 만나러 가야 해서 이만. 다른 여자랑 결혼했다고 침울해져 있어서 잘 달래 줘야 하거든. 어제는 첫째 녀석 엄마, 오늘은 둘째 녀석 엄마, 내일은 셋째 녀석 엄마, 그 뒤엔 또 어떤 여자를 만나서 달래 줘야 했더라.”
난보르 영식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제가 달래 줘야 할 여자들을 세었다.
열 손가락이 넘어 갔지만 그의 셈은 멈출 줄을 몰랐다.
“미, 미쳤어! 말도 안 돼! 아악!”
멜리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주저앉으며 절규했다.
***
“카인이 일을 도와줄 거라고요?”
“예! 영주님께서 잘 보좌하라고 하셨습니다! 블란이 영주님을 돕는 것처럼 마님을 도우라고요.”
“확실히 일손이 부족한 건 사실인데…….”
나는 자신 있게 가슴을 팡팡 두드리는 카인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기사로서의 카인은 분명 신뢰할 수 있지만, 서류 작업이나 저택 운영에 관한 부분에서도 믿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진중할 때는 진중하게 일하는 블란과 달리 늘 팔랑대는 사람이라 다소 믿음이…….
“아, 맡겨만 보시라니까요.”
의심스러운 내 눈빛을 제대로 알아챈 건지 카인이 억울해하며 가득 쌓인 서류를 가져갔다.
잽싼 행동에 ‘어어……!’ 하는 사이 카인이 빠르게 서류를 읽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건 직접 살피고 의견을 주셔야 할 것, 이건 제가 정리하고 확인만 하시면 충분한 것, 이건 마리 양, 아니, 시녀장에게 넘길 것입니다.”
슬쩍 살피니 생각보다 말끔하게 분류가 되어 있었다.
“의외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감탄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는지 카인이 뿌듯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이것도 영주님이 다 교육하신 겁니다. 기사라고 검만 휘두르는 건 안 된다고요. 주인을 보좌하는 게 기사의 진짜 역할이니 서류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뭐, 저는 블란처럼 뛰어나진 않았지만…… 기본은 합니다!”
“확실히 알테어는 상황을 넓게 보는 것 같아요. 그런 교육까지 하다니.”
“아니…… 왜 저를 칭찬하다가 갑자기 영주님을…… 제 칭찬을 좀 더 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그건 일하는 걸 더 보고요.”
나는 빙긋 웃으며 나머지 서류들을 카인에게 내밀었다. 보좌 역할을 해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카인은 제가 시험에 통과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씩 웃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준비하고 계십시오. 분명 칭찬하게 되실 테니까요.”
일하며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건 꽤 도움이 된다. 자신만만하고 일도 잘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마침 알테어가 좋은 타이밍에 조력자를 보내 준 것이다.
“어? 기사님이 같이 계시네요?”
서류를 전달하러 왔던 마리가 카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오늘부터 내 보좌.”
“잘됐네요. 안 그래도 혼자서 일이 너무 많으셨어요.”
잘됐다며 환하게 웃던 마리가 곧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슬그머니 카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요.”
“……?”
다소 은밀한 요청에 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시죠?”
“아니, 여기서 말고, 따로…….”
“네? 왜요?”
카인이 눈을 껌뻑이자 마리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 카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따로 드려야 하는 이야기라니까요.”
“어어……!”
카인은 차마 마리의 손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이끌려 나갔다.
얼떨떨한 표정의 카인을 끌고 나가며 마리가 나를 향해 고개 숙여 단정하게 인사했다.
“금방 돌려보내겠습니다, 후작님.”
***
그렇게 끌려 나온 카인은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껌뻑였다.
블란, 리온, 안나.
세 사람이 자신처럼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들을 모은 마리만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자. 여러분을 이곳에 모은 이유는 우리의 두 주인께서 삽질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리온은 자신이 도대체 왜 이 모임(?)에 포함된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고, 블란과 카인은 대충 상황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며, 안나는 마냥 신난 듯 눈을 반짝였다.
“모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주위에서 돕지 않으면 두 분은 평생 삽질만 하다가 천국에서나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실 테지요.”
“글쎄요. 우리 영주님은 천국에 못 가실 수도 있으니까, 죽어서도 서로의 진심을 모를지도…….”
카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젓자 블란이 푸흡-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더더욱 현생에서 서로의 마음을 아시도록 도와야지요.”
마리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주장하자 블란이 난처하다는 듯 헛기침하며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흠. 나쁜 생각은 아닌데, 나와 카인은 전적이 좀 화려하거든요……?”
“아주 화려하지. 늘 말아먹었거든요.”
카인이 산뜻하게 웃으며 마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마리 양이 제대로 우리를 지휘해 줘야겠네요.”
“잠깐. 저는 여기서 빠지겠…….”
물론 리온의 반항은 이어지는 마리의 선언에 묻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자! 그럼 대책 회의를 시작합니다!”
열리기만 하면 늘 큰 사건을 만드는 대책 회의가 또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