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고전적인 작전.
(136/170)
136화. 고전적인 작전.
(136/170)
136화. 고전적인 작전.
2022.09.21.
“누가 봐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두 분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리가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후작님께서는 영주님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내로서 존중받고 있다고 여기실 뿐이고, 영주님께서는 후작님께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시죠.”
“말하자면 눈치 없는 자와 말 없는 자의 팽팽한 대치인가요.”
탈출에 실패한 리온이 차라리 서둘러 이 회의를 끝내겠다는 듯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하지만 카인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 그 말에 반박했다.
“우리 영주님이 사람 마음에는 영 눈치가 없으셔서요. 어쩌면 본인도 부인을 사랑한다는 자각이 없으실걸요?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이고, 가족으로서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으시겠지만…….”
블란도 카인의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후작님께서는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민하시기에 영주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신 걸지도 몰라요. 애초에 영주님은 제대로 여성분과 관계를 쌓은 것도 결혼이 시작이었고…… 여러모로 서툰 분입니다.”
“……이전에 제대로 된 연애를 하신 적이 없다고요?”
리온이 못 믿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자 블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하신 적이 없다기 보단, 아예 연애와는 담을 쌓은 분입니다. 사실 결혼도 조건에 맞춰서 시집와 주실 분을 구인한 것에 가깝고…….”
‘구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하면서 블란이 마리의 눈치를 살폈다.
나디아의 사람인 마리가 듣기에 거북한 표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애초에 나디아도 조건에 맞춰 신랑감을 고른 셈이니, 그녀로서도 남편을 구인한 셈이었다.
“뭐든 척척 해낼 것 같은 사람으로 보였는데. 의외로군요.”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는 리온을 보며 블란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뭐든 척척 해내는 사람은 없죠. 그렇게 보일지라도요.”
하지만 알테어는 반드시 완벽한 사람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어린 시절 영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주위는 적으로 넘쳐났다.
자신과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 알테어는 ‘뭐든 척척 해내는 사람’의 모습을 갖춰야만 했다.
그게 진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건 무척이나 성공적인 가장이었지만, 그로 인해 또래의 청년들처럼 진실한 감정에 부딪히며 성장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럼 이 상황은 욕심 없는 부인과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남편의 팽팽한 대치가 되겠네요.”
카인이 리온의 표현을 조금 수정해 상황을 정리하며 간단하게 대책을 제시했다.
“그냥 영주님께서 자기 감정을 깨닫고 마님께 사랑한다고 마음을 표현하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무척이나 간단했지만, 사실은 핵심을 찌르는 정답이었다.
“그렇다면 영주님의 마음은 어떻게 자각하게 만들죠?”
마리가 두 손으로 탁자를 짚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좋은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안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럴 때는 역시 고전적인 방법이 좋지 않을까요?”
“고전적인 방법이라면…….”
“마음을 자각하는 데는 역시 질투가 제격이죠. 부인 근처에서 괜찮은 남자가 얼쩡거린다면 아무리 둔한 영주님이라도 마음을 깨닫지 않으실까요? 위기감이야말로 감정을 자극하는 강렬한 요소니까요!”
연애 소설 마니아인 안나가 눈을 반짝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들 그게 나쁘지 않은 방식이라고는 생각하는 듯했지만,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선뜻 동의하는 자가 없었다.
“별로인가요?”
안나가 맥이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블란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배우가 문제라는 거지. 누가 ‘부인 근처에서 얼쩡대는 괜찮은 남자’ 역할을 할 수 있겠어.”
“그 역할이라면…….”
안나가 뭐가 문제냐는 듯 차례로 카인과 블란을 쳐다보자 그들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절대 못 해! 후환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훈련으로 보복당할 게 분명한데.”
“게다가 우리 같은 놈들이 영주님께 무슨 위협이나 되겠어? 제대로 하려면 정말 부인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싶은 그런 사람이어야지. 여러모로 영주님보다 나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외모? 당연히 알테어가 낫다.
물론 블란과 카인도 번듯한 외모지만, 알테어는 에일스포드에서는 물론이고 제국에서 줄을 세우래도 열 손가락 안에 들 미남 아닌가?
신분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작이라는 신분이 낮기는 해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기사인 블란과 카인은 비교도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검술로 견주기에는…….
이 제국에 검으로 알테어와 견줄 사람은 비오스케스 공작 정도가 아닐까…….
그런 걸 고려하면 ‘부인 근처에서 얼쩡대는 괜찮은 남자’ 역할을 할 수 있는 후보군은 무척이나 줄어든다.
“칫. 왜 쓸데없이 사람이 잘나서는…….”
납득 가는 설명에 안나가 풀이 죽어 투덜댔다.
뛰어난 영주님은 늘 에일스포드의 자랑이었지만, 이런 순간에는 참으로 귀찮은 장벽이다.
하지만 모두가 부정적으로 축 늘어져 있을 때 마리의 시선이 조용히 리온에게 꽂혀 있었다.
그 시선을 느낀 당사자가 흠칫하며 불길함에 미간을 찌푸리자 마리가 빙긋 웃었다.
“영주님과 완전히 다른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라면 충분히 위협을 느끼실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의술이라든가…… 의사 선생님은 마님에게 든든하게 의지가 되는 상대이기도 하고요.”
마리의 은근한 제안에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 몸을 사리던 카인과 블란도 잽싸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맞습니다. 특히 후작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의사 선생을 살뜰히 챙기셨으니까요.”
“일리가 있습니다. 마님의 상태를 매일 살피고 있으니 붙어 있는 시간도 많고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잘생기고 다정한 의사 선생님은 질투 유발에 효과적일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연애 소설 마니아인 안나까지 동의하고 나서자 순식간에 리온에게 중요한 배역이 떨어지게 되었다.
“왜 제 의사는…….”
리온의 마지막 반항은 마리가 가볍게 방어했다.
“부인께 빚이 있으시잖아요. 갚으세요. 이번 기회에.”
“…….”
부모님의 원수를 찾을 수 있었던 건 확실히 나디아의 도움 덕분이었다. 큰 빚이 있었다.
게다가 자금 부족으로 막혀 있던 연구도 나디아 덕분에 이어갈 수 있었고…….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걸 깨달은 리온이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
나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정원에 나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마리와 안나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차와 다과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에는 리온이 태연하게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리온과 제법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이렇게 마주 앉아 티타임을 가지는 건 처음이라 무척이나 낯설었다.
“……이것도 진료의 일환인가요?”
“요즘 계속 서류 처리를 이유로 실내에만 계셨죠. 임산부에게는 햇볕을 받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얼떨떨한 나와 달리 리온은 차분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임산부들이 가장 많이 겪는 문제가 바로 그겁니다. 조심한다고 실내에만 있어서 오히려 몸이 안 좋아지죠. 햇볕을 적당히 즐겨야 몸이 스스로 양분을 만드는 법입니다. 태아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치고요.”
“아……!”
그 이야기를 들으니 머릿속에 전생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정보가 번뜩 떠올랐다.
‘임산부에게 비타민D가 중요하다고 했던 것 같아. 비타민D는 햇볕을 쬐면 자연스럽게 체내에서 합성되고…….’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확실히 요즘 실내에만 있긴 했어.’
전생의 지식을 따지지 않더라도, 내내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상식적으로 내 몸이나 태아의 건강에 좋을 리가 없었다.
참으로 세심한 케어가 아닌가?
감탄하며 리온을 보니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적당한 운동도 필요합니다. 산책 정도면 적당하겠죠. 그러니 오늘부터 매일 저와 정원에서 간단한 티타임을 가지고 산책도 할 겁니다. 차와 다과도 임산부에게 좋은 것으로 준비하도록 했고요.”
“급한 일이 있는 날은 힘들겠지만, 매일 시간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매사에 성실하신 분이니까요. 매일 힘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성실하지는…….”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말이 어째 칭찬처럼 느껴져서 민망함에 살짝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리온이 건물 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곧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과를 권했다.
“이것부터 드십시오. 이게 특히 몸에 좋습니다.”
“…….”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모습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리온이 멋쩍은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자신도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보시는지.”
“아뇨. 이렇게까지 다정하게 말하는 걸 보니까…….”
리온이 권한 다과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머릿속이 번뜩였다.
“리온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겠어요.”
“……그런 거 없는데요.”
수상하게 대답도 한 박자 느린 걸 보니 더더욱 내 짐작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당하게 다과를 가리키며 외쳤다.
“이거 생긴 것만 그럴듯하지, 사실은 엄청나게 쓰죠!”
“……네?”
“원래 몸에 좋은 건 쓰다고 하잖아요.”
“…….”
어째서인지 리온이 침묵했고, 옆에서 차를 따르던 안나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 아닌가…….”
나는 급격히 민망해져서 어색하게 웃으며 리온이 권한 다과를 먹었다.
다과는 쓴맛의 흔적을 찾을 필요도 없이 무척이나 달콤했다.
나는 2배로, 아니, 한 3배 정도 더 민망해졌다.
***
“어쩐 일로 후작님께서 정원에 나와 계시네요.”
알테어가 귀찮으니 가라는데도 굳이 곁을 지키며 서류 정리를 돕고 있던 블란이 창밖을 슬쩍 바라보며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블란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들은 척도 않던 알테어가 이번에는 반응하며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디아가?”
블란의 말처럼 정원에는 나디아가 있었다.
어째서인지 살짝 얼굴을 붉힌 채 열심히 다과를 먹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의사 선생 리온이 어울리지도 않게 미소를 지은 채로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알테어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걸 확인한 블란이 일부러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의사 선생이 복귀한 뒤로 후작님께 참으로 지극정성이던데요. 마님께서도 든든한 조력자가 생겨서 많이 의지하시는 것 같았고요.”
“……유능한 의사가 곁에 있으면 여러모로 힘이 되겠지.”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확실히 리온의 존재는 힘이 된다.
하지만 차분하게 대답하면서도 알테어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러면서 자기 감정을 제대로 못 알아채시다니.’
블란은 답답함에 몰래 가슴을 두드리며 알테어의 마음이 활활 타오르도록 열심히 부채질을 해 댔다.
“애초에 영지에 의사 선생을 데려온 것도 마님이셨죠? 스스로 거둔 사람이니 더욱 의지가 되실 테죠. 우리 영지에서 마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마리 양과 의사 선생 단 둘뿐이니 더욱 그러실 테고요. 확실한 자기 사람이라고나 할까?”
물론 알테어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작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 주자는 안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