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둘만 있었다는 거군. (137/170)


137화. 둘만 있었다는 거군.
2022.09.25.



 
리온과 나디아의 화기애애한 티타임을 목격한 뒤, 어쩐지 부글대는 속을 겨우 가라앉히고 나디아의 방으로 왔더니…….


“지금은 못 만나시는데요?”

안나가 문을 턱 가로막고 단호하게 알테어를 올려봤다.

평소에 제대로 상황을 살피지도 않고 벌컥 문을 열어젖히는 바람에 사고를 여럿 쳤던 안나답지 않은 단호함이었다.


“……어째서?”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현하자 안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주무시는 중이거든요. 의사 선생님과 산책하고 오시더니 피곤한지 바로 잠드셨어요. 요새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는데, 모처럼 깊이 잠드셨으니 방해하지 마세요.”

뭘 하나 맡으면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늘 열심히 하는 나디아가 후작이 된 후 부담감에 밤잠을 설친다는 건 알테어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오랜만에 낮잠을 잔다는데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귀신처럼 기척을 죽이는 일에는 익숙하니 절대 나디아를 깨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안 깨우니까 걱정 마. 기척은 제대로 죽일 테니까.”

“어허. 안 된다니까요. 누가 기척 때문에 그러나요?”

안나를 지나쳐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그녀가 재차 앞을 가로막았다.


“안에서 의사 선생님이 처치 중이란 말이에요.”

“의사 선생이? 무슨 처치?”

“수면을 돕는 향기 치료라던데…… 일부러 방 안을 향으로 가득 채웠으니 괜히 문 열어서 방해하면 안 된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신신당부하셨는걸요.”

안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안쪽에서 나른한 향이 은은하게 퍼져나오는 게 느껴졌다.


“정말 신통하지 않아요? 그렇게 잠을 못 주무시더니,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하니까 금방 잠드셨잖아요! 우리 후작님께서 괜히 의지하시는 게 아니라니까요.”

안나가 리온을 칭찬하며 나디아가 그를 의지한다는 이야기를 은근히 덧붙였다.

덕분에 알테어의 기분은 점점 더 바닥을 쳤다. 나디아가 훌륭한 의사 덕분에 불면을 극복했다면 당연히 좋은 일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안나와 알테어가 묘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던 그때, 문이 살짝 열리고 쏟아지는 향기와 함께 리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나와 알테어의 실랑이가 안쪽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그는 우뚝 서 있는 알테어를 쳐다보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옆으로 비켜 길을 터 주었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영주님. 이미 깊이 잠드셔서 괜찮을 겁니다.”

아내의 방에 들어가는데 리온의 허락을 받는 것이 어째 이상한 기분이라 알테어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물론 뭐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딱히 이유는 없었다.

의사가 환자를 돌보는 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려면 의사의 허락이 필요하다. 당연한 일인데 계속 기분이 이상했다.

알테어는 미궁 속을 걷는 듯한 묘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자신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서자 안나가 리온을 향해 은밀하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영주님의 속을 잘 긁어 놨으니 다음은 당신에게 맡기겠다!’라는 의미였다.

리온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문을 닫았다.

나른한 향으로 가득한 방 안에서 나디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침대 옆에는 작은 간이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리온이 척척 걸어와 당연한 듯 그 자리를 차지했다.

덕분에 알테어는 리온의 뒤에서 나디아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숙면에 좋은 허브를 조합해서 향을 피웠습니다. 임산부에게 나쁜 허브는 쓰지 않았고요.”

리온이 잠든 나디아를 의식해 작은 목소리로 향을 설명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썩 듣기 좋아서 알테어의 귀에 거슬렸다.

정원에서 나디아와 함께 차를 마실 때도 무어라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던데, 이 좋은 목소리로 그녀와 대화했을 걸 떠올리니 뭔가 울컥했다.

알테어도 좋은 목소리를 가졌지만 이 의사 선생처럼 따뜻하고 부드럽진 않았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라 심약한 사람들은 알테어와 대화만 해도 벌벌 떠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나디아도 처음 알테어를 마주했을 때는 그가 입만 열어도 겁을 먹고 바르르 떨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의사 선생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천사의 노랫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으음…….”

잠들어 있던 나디아가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몸을 뒤척였다.

알테어는 반사적으로 나디아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리온이 그녀에게 닿는 것이 더 빨랐다.


“아이를 가지면 몸 상태가 많이 달라지죠. 내 몸이 아닌 거 같이 어색할 겁니다. 그래서 잠을 더 못 주무셨던 거고요. 거기다 주위의 상황까지 겹쳐 스트레스가 많았으니…….”

리온은 다정하고 친밀한 손길-사실 평범했지만 알테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로 나디아가 덮고 있는 이불을 정돈해 주며 알테어에게 계속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제가 한동안 주무시는 걸 도울 겁니다.”

“한동안?”

“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쇠약하신데 잠까지 못 주무시면 큰일이니까요. 집중적으로 관리가 필요합니다. 약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서. 완벽히 회복되실 때까지는 의사의 지시를 확실히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

의사의 판단이 그렇다면 따르는 게 맞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알테어는 차마 ‘알겠다’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참으로 이상했다.

내 사람 곁에 다른 놈이 얼쩡거리는 게 이렇게 싫은 일이었던가?

알테어는 자신이 ‘내 것’에 애착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 영지, 내 성, 내 기사, 내 가족.

‘내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하지만, 만약 부모님이 지금까지 살아 계시고, 의사가 불면이 심하니 집중적으로 관리하겠다며 딱 붙어 지낸다 해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내 것’이었지만 유독 나디아만 연관되면 일반적이지 않은 쪽으로 기분이 튀었다.


‘왜……?’

홀로 의문에 빠진 알테어의 얼굴을 힐끗대며 리온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손에 구멍 나는 줄 알았네.’

나디아를 챙기는 손을 매섭게 노려보던 알테어의 눈길은 맹수보다 더 사나워서, 눈빛만으로도 사람 손이 뚫리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본능적으로 위험한 놈은 견제하면서 그게 어떤 감정인 줄은 모르다니.


‘정말로 맹수잖아.’

맹수에게 견제당하는 건 매우 피곤하니 재빨리 짐승이 깨달음을 얻어 인간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자기 연구하느라 바쁘다며 날 찾으러 오지도 않던 리온이 언제부턴가 내내 곁에 붙어 있기 시작했다.

진찰해 보니 내 몸 상태가 아주 나빠서 집중 관리가 필요하다나?

약을 먹는 걸로는 답이 없어서 생활 습관까지 빡빡하게 챙겨야 한다며 아이를 챙기는 엄마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시원한 물을 마시려고 하면 차가운 건 안 된다며 따뜻한 차를 내오게 하고, 조금만 업무가 길어져도 휴식이 필요하다며 날 정원으로 끌고 나가 티타임을 가졌다.

또 체력을 위해 운동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고 함께 산책을 나서질 않나, 태아의 안정을 위해 태교가 필수라며 좋은 그림을 구해오거나 악단을 초청해 음악 감상 시간을 만들기도 했다.

음식도 중요하다며 주방까지 휘젓고 다니고…….

오늘은 옷이 불편하면 몸이 더 많이 붓는다며 의상실에서 사람까지 불러왔다.

방 한가득 샘플로 확인할 옷이 걸렸고, 탁자에는 디자인화를 담은 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디자이너는 임산부인 나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옷들이라며 어떤 옷이든 아주 편할 거라고 장담했다.


“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나는 황송한 대접에 얼떨떨해졌다. 이런 집중 관리가 처음이라 어색하기도 했다.

물론 리온은 슬그머니 발을 빼려는 나를 반박할 수 없는 말로 꽉 붙잡았다.


“‘이렇게까지’가 아니라, 이렇게라도 해야 문제없이 출산까지 갈 수 있는 겁니다.”

아이를 지키는 건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알테어에게는 무엇보다 아이가 필요했고, 나는 그가 필요한 걸 충족시켜 주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내 상태가 별로인가요…….”

“오랫동안 안 좋은 약을 먹어서 남들보다 배로 신경 써야 합니다. 이건 대책 회의와는 상관없이…….”

“대책 회의요?”

리온의 이야기 중간에 의미 모를 말이 섞여 있어 질문을 던지자 그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늘 막힘 없던 그의 눈동자가 미묘하지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위험한 단계는 겨우 넘겼지만 아직은 작은 충격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태니까요.”

어쩐지 말을 돌리는 모양새였지만 진지하게 조언하는 리온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나는 조금 무서워져서 손으로 배를 매만졌다.

확연히 부풀어 오른 이 배 속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게, 내가 잘못하면 이 생명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게 나를 조금 무섭게 했다.

그런 내 기분을 알아챈 건지 리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겁먹으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같이 주의하자는 뜻이었죠.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돕고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리온은 당연했고, 마리와 안나, 블란과 카인을 비롯한 기사들도 항상 전전긍긍하며 내 상태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줬다.

이렇게까지 모두의 염려와 보호를 받아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따뜻한 배려였다.

그걸 떠올리자 마음이 뜨끈해져 자연스럽게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났다.


“맞아요. 무척이나 의지가 되어서, 난 하나도 걱정 안 해요.”

“조금 전까지는 하셨으면서.”

“그, 그야…….”

정확한 지적에 민망해져 헤헤 웃음을 흘리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알테어가 우뚝 서 있었다.


“알테어! 와 줬군요!”

나는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나 알테어 앞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요즘 빽빽한 일정에 휘둘리느라 알테어의 얼굴을 제대로 못 봤으니 옷을 함께 봐 줬으면 좋겠다는 핑계로 그를 불러냈는데, 고맙게도 그가 거절하지 않고 참석해 준 것이다.

하지만 반갑게 다가간 나와 달리 알테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알테어?”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가만히 날 바라보던 알테어가 슬쩍 내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리온이 보였다.


“……옷을 맞추는 데도 의사가 필요한가?”

묘한 침묵 끝에 알테어가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리온을 떠나 방 안을 훑는 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은?”

“안나는 차를 준비하러 갔어요. 의상실 사람들은 더 가져올 샘플이 있다면서 잠시 나갔고요. 곧 올 거예요.”

“그래서 둘만 있었다는 거군.”

다른 말은 없었지만 불만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게 제대로 느껴졌다.

나는 왜 알테어가 화가 난 건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어머! 남작님도 오셨군요!”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와중에 샘플을 더 가져오겠다던 의상실 사람들이 우르르 돌아왔다.


“저희가 정말 많이 준비해 왔답니다. 분명 전부 마음에 드실 거예요. 어서 앉아서 디자인화부터 보시죠!”

그들은 호들갑을 떨어대며 안으로 들어섰고, 나와 알테어는 거의 떠밀리듯 소파까지 안내되었다.

마치 우리가 그들의 의상실에 방문한 듯한 자연스러운 태도라 과연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파의 왼쪽 귀퉁이에는 이미 리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옆자리, 소파의 중앙에 앉으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알테어가 나보다 잽싸게 움직여 떡하니 중앙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닌가?


‘내, 내가 중앙에 앉는 게 평범하지 않나……?’

어정쩡한 자세로 나란히 앉은 두 남자를 쳐다보니 알테어가 드물게 빙긋 웃으며 비어 있는 소파의 오른쪽 귀퉁이를 톡톡 두드렸다.
 

 


“뭐 해, 나디아. 여기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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