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자각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138/170)


138화. 자각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2022.09.28.



 
나디아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면서도 알테어 옆에 자리를 잡으니 의상실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앞으로 온갖 디자인화를 내밀었다.


“이건 평상복으로 쓰기 좋은 디자인이랍니다.”

“이건 외출하실 때 좋을 것 같아요. 라인을 세심하게 조정해서 부한 인상을 피할 수 있지요.”

“이건 어떠신가요? 간단한 운동을 하실 때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원단을 신경 썼거든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전문가들의 영업에 나디아는 눈이 빙빙 돌아가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 일은 척척 해내면서도 정작 자기 일에는 서투른 사람이니…….

알테어는 ‘역시 나디아는 나디아’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픽 웃음을 흘렸다.

주변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는데도 나디아는 여전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알테어가 입을 떼려는데, 그보다 리온의 행동이 더 빨랐다.


“디자인화만 봐서는 정확하게 알기 힘드니 입어 보고 결정하시죠.”

“그럴까요?”

“용도별로 추천받은 옷을 한두 벌 입어 본 뒤에 색상과 세부적인 디자인만 조정하면 될 것 같군요. 너무 많은 옷을 입고 벗으면 체력이 뚝 떨어질 테니까요.”

“그, 그렇게 체력이 약하진 않거든요……?”

“아뇨. 약합니다.”

가운데 자리를 잡은 보람도 없이 리온과 나디아가 알테어를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디아의 체력을 염려하는 건 의사로서 충분히 보일 수 있는 태도였는데도 알테어는 심기가 불편해져 리온을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분명한 시선을 리온이 모를 리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대는 의사보다 시종이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싶군. 귀부인의 의상 문제까지 관여하다니.”

“시골에 자리 잡고 살 때 여러 부인들의 옷을 봐 드려서 익숙할 뿐입니다. 젊은 사람의 시선이 필요하다면서 많이들 찾아오셨죠. 의사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어째서인지 잡다한 문제의 해결사가 되곤 하거든요.”

리온은 어깨를 으쓱하고 알테어의 견제를 받아넘겼다.

물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알테어의 시선에 얼굴에 구멍이 나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지만…….


‘이게 다 후작을 돕기 위해서란 말이지.’

그녀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니 어떻게든 견뎌 내는 수밖에 없다.

리온은 의상실 직원에게 이끌려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가림막 뒤로 들어가는 나디아의 뒷모습을 힐끗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의술을 사용해서 빚을 갚으라면 갚겠는데, 이런 일에 이용당하니 어색하고 불편해서 딱 죽을 맛이었다.

시골을 벗어났는데도 ‘잡다한 문제의 해결사’ 역할은 여전히 그를 따라붙고 있는 모양이다.

리온이 알테어의 사나운 눈길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 사이 옷을 갈아입은 나디아가 가림막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요?”

나디아가 쭈뼛대며 알테어를 향해 물었다.

그의 평가가 궁금한지 다소 긴장된 얼굴이었다.


“예뻐.”

질문이 끝난 지 5초도 지나지 않아 알테어의 입에서 즉답이 돌아왔다.

리온은 질린 얼굴로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던 남자의 시선은 어느새 나디아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주위의 상황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오로지 그녀만을 향해 몰입한 시선에 리온이 혀를 찼다.

이런 남자가 무서운 음모를 세워 부모를 죽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니.


‘정말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었군.’

리온은 속으로 혀를 차며 나디아의 모습을 훑었다.

알테어가 즉답한 것처럼 나디아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었지만 시골에서 여러 부인들의 옷을 봐 주며 수련(?)한 그의 눈에는 부족한 점이 보였다.

이걸 이렇게 바꾸면 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허리선을 조금 더 위로 올리는 게 낫겠군요. 외적으로도 그렇고, 또 배가 더 불러오면 허리선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거든요.”

시큰둥한 얼굴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지적하자 알테어가 ‘도대체 그게 무슨 헛소리냐! 내 부인의 모습은 완벽해!’라는 듯한 눈빛으로 리온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의상실 직원들은 물론이고 나디아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리온의 말에 동의하는 게 아닌가?


“사실 배 부분이 조금 불편했어요. 리온이 말한 대로 바꾸면 좋을 것 같아요.”

“네. 그러시다면 당장 말씀해 주신 대로 수정하겠습니다.”

디자이너가 바쁘게 손을 놀려 디자인화를 수정했다.

그 뒤로도 나디아는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고, 알테어는 그때마다 ‘예뻐’라는 말만 되풀이했으며, 리온은 세심하게 지적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즈음에 이르러서는 나디아와 의상실 직원이 알테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리온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의견을 기다릴 정도였다.

모두가 죽이 척척 맞아 신나게 옷을 고르는데 혼자만 동떨어진 느낌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리온의 모습을 보니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 줘야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봐도 제 눈에는 다 예쁘고 완벽해 보이는 걸 어쩌란 말인가?

분위기를 맞추려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문제를 지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알테어는 그저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옷 고르기는 마무리 단계까지 와 있었다.


“다른 건 다 정하셨고, 마지막으로 색상만 정해 주시면 됩니다. 둘 중에 어떤 것으로 해드릴까요?”

의상실 디자이너가 나디아 앞에 두 가지의 색상 샘플을 내밀며 질문을 던졌다.

의상실 사람들은 이제 자연스럽게 나디아의 뒤를 이어 리온에게 눈길을 보냈지만, 어째서인지 나디아는 쭈뼛대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 머뭇대던 나디아가 곧 결심했다는 듯 디자이너가 건넨 색상 샘플을 가지고 조르르 걸음을 옮겼다.


“아, 알테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앉은 알테어 앞으로 온 나디아가 그의 앞에 두 가지 샘플을 내밀었다.


“알테어가 보기에는 어떤 색이 나한테 더 잘 어울릴 거 같아요?”

“……그야.”

둘 다.

어떤 색이든 나디아에게 잘 어울리는데. 이런 걸 왜 고민해야 하지.

하지만 그렇게 대답했다가는 도움이 안 될 것이 뻔하다.


“나보다는 의사 선생에게 묻는 게 좋겠어. 보는 눈이 좋던데.”

스스로 나서서 리온의 의견을 구하는 건 매우 거슬렸지만, 나디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을 얻을 수 있다면 감수할 만했다.

그러나 나디아는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난 알테어 의견이 궁금한 거예요. 누구보다 알테어의 의견이 중요하단 말이에요.”

“……내가 보기에는 둘 다 괜찮아.”

“그렇게 대충 대답하지 말고요.”

나디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바쁜 와중에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지만, 그래도 난 알테어 의견이 궁금했는데…… 계속 좋다는 말만 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던 나디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알테어가 깊이 고민하지 않고 전부 좋다는 식으로 대답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알테어가 다소 급하게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한 말이야. 내가 보기엔 전부 잘 어울려. 흠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네……?”

“정말로 다 예쁜 걸 어떡하란 거야. 이상한 걸 잡아내는 쪽의 눈이 이상한 거 아니냐고.”

“그, 그런…….”

직설적인 표현에 나디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알테어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리온과 의상실 직원들을 쳐다보았다.


“뭐 하러 둘을 놓고 고르고 있어. 다 예쁜데. 그냥 다 사는 것으로 하지.”

눈을 껌뻑이며 잠시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가늠하던 사람들도 곧 의미를 알아차리고 입을 떡 벌렸다.


“어머나. 세상에. 남작님께서 이런 로맨티시스트이실 줄은.”

“전부 다 예쁘다니. 흠을 잡는 쪽의 눈이 이상한 거라니. 세상에.”

“그러고 보니 예전에 부인을 위해서 비싼 꽃도 모두 사 들이셨었죠. 어머나. 저희가 그걸 잊고 있었네요.”

의상실 사람들이 두 뺨을 붉히며 ‘세상에!’를 외쳐댔고, 리온은 쓴 음식을 한입에 삼킨 사람처럼 썩어 버린 얼굴로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저렇게 대담한 발언을 하고도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라니.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이러는데…….’

도대체 자각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상상만으로도 피곤하고 골치가 아팠다.

***

의상실 직원들이 ‘알고 보니 남작님이 엄청난 사랑꾼!’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저택을 떠난 시각.

기사들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훈련장에는 아직 청년에 이르지 못한 소년이 헉헉대며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한때 나디아에게 해를 끼치려던 아바르 바인의 끄나풀은 카인의 손에 붙잡혀 기사단의 막내로 이리저리 구르는 중이었다.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을 정도로 마구 굴려주겠다고 하더니 카인은 정말로 그 말을 지켰다.

매일 감당 못할 수준의 훈련이 주어졌고, 그 훈련을 끝내지 않으면 대련을 빙자한 일방적인 훈계가 이어져서 죽어라 훈련을 해 내는 수밖에 없었다.

훈련을 감시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게으름을 피우며 드러눕기도 했었다.

애초에 기사 따위 될 마음도 없었다. 자신을 붙잡은 ‘적’의 기사 따위는 더더욱.

하지만 카인을 비롯한 기사들은 제대로 보지도 않았으면서 소년이 훈련하지 않은 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벌을 줬다.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것인가 싶어서 혼자 남은 뒤에 훈련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로 아무도 없는 것이거나, 상대가 너무 실력자라 이쪽이 전혀 흔적을 못 찾는 것일 테지.

후자라면 너무나도 무서운 상황이라 소년은 늘 허덕이며 엄청난 훈련을 소화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벌을 피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훈련인데, 날이 갈수록 몸이 가벼워지고 실력이 느는 것이 느껴지니 스스로도 조금 신나서 더욱 진심이 되었다.

물론 그걸 기사들에게는 절대 티 내지 않았지만…….

부스럭.

귀를 자극하는 소리에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던 소년의 손이 멈췄다.

오늘은 감시꾼이 초보라서 기척을 드러낸 건가? 아니면 내 실력이 늘어서 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든가?

소년은 조금 뿌듯한 마음으로 기척이 느껴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린 곳에서 발견한 사람은 기사 따위가 아니었다.

완전히 엉망인 몰골로 자신을 향해 비척대며 걸어오고 있는 건 사람이라기 보단 귀신에 가까워 보였다.


“허억!”

소년은 너무 놀라 제자리에 주저앉았고, 귀신에 가까운 사람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그의 앞으로 다가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산발이 된 머리와 검게 더러워진 얼굴 사이로 하얀 눈알과 누런 이가 유독 밝게 빛났다.


“네놈이 여기에 있었구나.”

낯선 몰골과 달리 익숙한 목소리였다. 소년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후작님?”

“그래. 나다.”

“어, 어떻게…….”

“난 바인 후작이다. 이 저택의 비밀 통로 정도는 꿰고 있지 않겠어?”

키킥. 키키킥.

아바르 바인이 기괴하게 웃으며 눈을 번뜩였다.


“네놈이…… 일을 제대로 못 했더구나. 네놈이 제대로 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진 안 되었을 텐데. 무능한 놈.”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린 듯한 아바르 바인의 모습에 소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귀신보다 더 무섭다는 돌아 버린 미친 자가 제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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