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착하구나.
(139/170)
139화. 착하구나.
(139/170)
139화. 착하구나.
2022.10.02.
“훈련을 제대로 안 한 모양이야?”
소년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카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훈련하는 걸 계속 지켜본 건 아니지만, 카인쯤 되면 미묘한 움직임을 보기만 해도 훈련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의 현재 체력을 고려하면 주어진 훈련량을 모두 소화했을 때 지금처럼 멀쩡하게 서 있을 수가 없는데.
오늘은 검을 휘두르는 팔도 멀쩡하고, 다리도 떨림이 없었다.
어제 제대로 훈련을 안 하고 숙소로 복귀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늘 독기 가득한 눈으로 자길 노려보던 놈이 묘하게 넋이 빠져서는…….
카인은 소년의 반항심을 높이 샀다.
자신보다 명백하게 강한 상대에게 붙잡혀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태도를 굽히지 않는 모습에서 에일스포드의 기사가 될 자질을 봤다.
물론 건방진 놈을 좀 골려 주겠다는 생각으로 기사단에 집어넣은 것도 사실이다.
에일스포드 기사들의 훈련은 평온한 수도에서 귀족이나 지키는 기사들의 고상한 훈련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철저히 실전형의 훈련이라 제대로 버티지 못하면 당장 쳐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지독한 훈련을 이를 갈며 버텨 냈다.
알테어와 검을 맞대고도 내빼지 않았을 정도라, 내심 카인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알테어도 ‘한번 기회를 줘 보든가’라는 식으로 태도를 바꿨을 정도였다.
물론 부인을 해치려고 했다는 점에서 평생 알테어의 호의를 얻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우리라고 영주님의 호의 가득 찬 시선을 받는 건 아니니까.’
그걸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단 한 사람, 에일스포드의 안주인이자 바인 후작가의 주인이 된 우리 마님뿐일 거라고, 카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의 어깨를 툭 쳤다.
“도대체 뭐야. 귀신이라도 만났냐?”
“귀, 귀신이요?”
진짜 질문은 ‘도대체 뭐야’라는 거였다.
‘귀신이라도 만났냐’라는 건 농담이었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소년이 그 부분에 반응하자 카인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 부분에 반응하지?”
“그…… 귀신…….”
소년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게 진짜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건가 싶어질 정도였다.
기이한 반응에 삐딱한 자세로 소년을 질책하던 카인이 허리를 바로 세웠다.
뭔가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너, 진짜로 귀신을 만났구나?”
슬쩍 떠보는 카인의 질문에 소년이 어깨를 움찔했다.
늘 장난기를 품고 있는 카인의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
‘정말로 다 예쁜 걸 어떡하라는 거야.’
“으으…….”
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목소리를 떨쳐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런 걸로 머릿속을 배회하는 목소리를 떨쳐 내기는 힘들었다.
그런 말을 꺼내며 퉁명스럽게 한숨을 내쉬던 알테어의 얼굴까지 떠올리니 오히려 목소리가 더 선명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꼬시지 말란 말이에요…….”
난 이미 다 넘어갔는데! 여기서 더 꼬셔서 뭘 어쩌려고!
물론 알테어가 작정하고 날 꼬시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나쁜 거라고.’
일부러 날 흔들기 위해서 꺼낸 말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게 진짜 그의 진심이라는 소리니까.
꾸밈 하나 없는 올곧은 진심은 잘 꾸며진 칭찬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예쁘게 보이긴 한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실실 웃음이 나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예쁘게 보였다는데 기분이 나쁠 사람은 없을 거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대의 거울 앞으로 조르르 걸어갔다.
‘어제는 머리를 이렇게 손질했던가?’
안나가 만져 줬던 기억을 떠올려 머리를 이리저리 묶어 봤지만 어제의 느낌이 나질 않았다.
나중에 안나에게 방법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화장대 위에 무심하게 놓인 목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건…….’
멜리사가 결혼하러 떠나기 전. 그녀가 몰래 후작 부인의 방에 숨어 들어가 금고를 열려다 기사에게 발각된 일이 있었다.
기사는 그대로 멜리사를 잡아다 내 앞에 끌고 왔고, 목걸이의 형태를 한 열쇠는 내 손에 들어오게 됐다.
멜리사도 금고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숙부가 사용하던 금고인데, 돈이 될 만한 것이 들어 있을 거라 짐작하고 결혼 전에 챙겨 갈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 아버지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가져가겠다고!’라며 소리치던 멜리사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머리를 울렸다.
‘숙부의 비밀 금고라.’
당장 후작가의 혼란을 수습하는 일로 바빠 금고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것은 미뤄 둔 상태였는데, 오늘은 머릿속을 맴도는 알테어의 목소리 덕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여유가 조금 있었다.
‘잠시 다녀오자.’
나는 잠옷 위에 대충 가운을 걸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이라 후작가는 고요함에 물들어 있었다.
사실 이른 시간이라 고요한 게 아니라 평소에도 후작가는 고요한 편이었다.
마리가 새롭게 채용한 사용인들은 모두 능숙해서, 평소에는 존재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부족함 없이 필요한 것이 늘 손닿는 곳에 있어 사용인들의 유능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멀지 않은 곳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였다.
어디서 들려온 건지 방향을 확인하자마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예전에 숙부가 사용하던 방이라 찜찜해서 비워 둔 곳이었다.
딱히 출입을 금지하거나, 관리하지 말라고 명한 적은 없었지만, 나와 숙부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일부러 나서서 청소하는 자도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소음이 들려오다니.
‘설마 사용인 중에 좀도둑이 있는 건가?’
숙부의 귀중품은 모두 정리한 후라 그리 값비싼 물건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귀족가에서 흔하게 굴러다니는 물건이라도 평범한 사용인에게는 큰돈이 된다.
발길이 뜸한 곳이라는 걸 깨닫고 누군가 욕심을 부린 걸지도 모른다.
마리가 아무리 꼼꼼하게 사람을 골랐다 하더라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례한 사용인을 훈계하는 건 가주의 역할이었다.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익숙해져야 한다.
나는 기사들을 훈계하던 알테어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았다.
거울이 없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늘 알테어의 얼굴을 떠올리고 살았으니까 비슷하게 따라 할 자신은 있었다.
후작가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을 쫓아낼 때도 ‘알테어 흉내 내기’ 전략으로 모두에게 근엄한 모습을 꾸며냈었으니까 효과는 확실하다!
‘나는 근엄하다. 나는 알테어다.’
스스로를 향한 세뇌를 마치고 나는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겨 숙부가 쓰던 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가져갈 물건을 고르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사용인이 놀라서 펄쩍 뛰는 모습을 기대했건만.
야심차게 문을 연 것이 무색하게도 공간은 온통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낙엽 굴러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완벽한 고요함이었다.
다른 곳에서 들린 소리를 착각한 걸까?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나는 괜히 민망해져 헛기침하며 마치 처음부터 이곳으로 향할 생각이었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후작 부인의 방에 갈 수 있으니, 그걸 사용해 목적지로 향할 생각이었다.
덜컥.
하지만 열렸던 문이 닫히고 등 뒤에서 기이한 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는데도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불길한 기척이었다.
“킥…….”
등 뒤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익숙한 사람의 것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굳어 버린 고개를 삐걱대며 겨우 돌리자 예상했던 그대로의 인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형편없는 몰골로 날 향해 웃고 있었다.
“알아서 날 찾아와 주다니. 착한 조카님이로구나, 나디아.”
***
“영주님.”
이른 시간부터 카인이 심각한 얼굴로 알테어를 찾아왔다.
아직 훈련이 한창일 시간이었다.
별다른 지시가 없었는데도 훈련에서 이탈한 카인을 질책할 수도 있었겠지만, 알테어는 먼저 이유를 묻기로 했다.
카인이 이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라 뭔가 일이 터졌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말해.”
앞뒤를 모두 자른 알테어의 명령에 카인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마님께 손을 쓰려다 붙잡혀서 기사단에 집어넣은 놈 기억하시죠?”
“당연히.”
“그놈이 내내 이상하길래 추궁했더니…….”
“했더니?”
“귀신을 봤다고 합니다.”
심각하게 뜸 들인 끝에 나온 말이 귀신이라니.
알테어는 황당하고 맥이 빠져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래서. 귀신이라도 잡으러 가자고?”
“네. 잡아야 합니다.”
“뭐?”
헛소리를 하면서도 카인의 얼굴이 여전히 진지했다.
덕분에 알테어는 카인이 말하는 ‘귀신’의 정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알아듣게 말해. 귀신이 뭐가 어쨌는데.”
“그 녀석의 말로는, 전 후작이 저택에 기어들어 왔다고 합니다. 가문 사람들에게만 전해져 오는 비밀 통로를 쓴 모양입니다.”
“……그래. 죽지 않았다면 목표는 당연히 여기였겠지.”
알테어는 굳은 얼굴로 카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발스테드는 사람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아. 살아서 여기까지 왔대도 힘없이 늙은 중년 남자일 뿐이다. 사용인들에게는 주의령을 내리고, 기사들에게는 저택을 샅샅이 수색하라고 해.”
“이미 수색은 명했습니다.”
“나도 수색하지. 그리고 그놈은 징벌방에 처넣어. 제압하는 건 기대도 안 했지만 보고까지 생략해?”
“협박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원래도 약점을 잡혀 후작이 시키는 일을 한 거라.”
“사정을 봐줘야 하나?”
그놈의 사정 때문에 위험한 놈이 멋대로 저택을 활보하는 걸 두고 보게 생겼는데.
알테어는 한숨을 푹 내쉬며 걸음을 뗐다.
“난 우선 나디아에게 이 상황을…….”
“영주님!”
하지만 알테어가 어디론가 향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사색이 된 안나가 들이닥쳤다.
“저, 혹시, 후작님이 여기 계신가요?”
“뭐?”
가장 가까이에서 귀부인을 모시는 시녀가 이곳에 와서 주인의 행방을 찾는다니.
황당함에 카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님이 이 시간에 왜 여기에 계시겠어? 아직 주무실 시간이잖아.”
“그렇죠. 그런데…… 그러실 시간인데…….”
안나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알테어와 카인을 쳐다보았다.
“아, 안 계세요. 방이 텅 비어서…… 아무도 없고…… 서재나 집무실에나, 정원에도 다 안 계시고…….”
안나가 횡설수설하며 상황을 설명할수록 카인과 알테어의 얼굴이 굳어졌다.
불길한 예감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