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끌어내리는 게 더 즐겁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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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끌어내리는 게 더 즐겁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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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끌어내리는 게 더 즐겁잖아.
2022.10.05.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고?”
알테어가 무섭게 침묵을 고수하자 카인이 다급하게 나서서 안나에게 물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 정말로 일이 생겼다는 걸 깨달은 안나가 울상이 되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전혀 없으셨어요. 이른 오전에는 특별히 일정도 없고요. 전 시간에 맞춰서 세숫물을 준비해 갔는데…… 방이 텅 비어 있어서…….”
말을 할수록 안나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도무지 도움 되는 이야기가 없었다.
알테어는 두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짚고 이를 악물었다.
“……잠옷을 갈아입은 흔적은? 딱히 사라진 거라든가.”
“잠옷은 안 벗어 두셨어요. 딱히 사라진 건…… 가운 정도…….”
안나가 눈동자를 굴리며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말을 하면서도 이게 도움이 될까 싶은 눈치였으나, 알테어는 그 속에서 빠르게 정보를 찾아냈다.
“잠옷을 입은 채로 가운을 입고 방을 나섰으니 애초에 멀리 갈 생각이 아니었을 거다. 나디아의 방 근처부터 수색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 숙여 명령을 받드는 카인의 머리통을 보며 알테어가 싸늘하게 물었다.
“그런데 넌 왜 나디아 옆에 안 붙어 있었지? 호위 업무를 최우선으로 하라고 지시했는데.”
“그 꼬마 놈 훈련이 제 담당이라…… 그 시간은 블란이 대신 호위를 맡아 주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마님이 주무실 시간이기도 해서요.”
“그럼 블란은 어디 있지?”
“어…….”
급박한 상황이라 생각지도 못했던 의문을 지적당하자 카인의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혹시 너는 알고 있느냐는 듯 안나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그녀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안 보이더라고요. 평소에는 문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다른 놈이었다면 임무를 가볍게 여기고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배신자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블란은 알테어가 신뢰하는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아직 파악하지 못한 다른 문제가 생겼으리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집무실 문이 열리고 얼굴에 검은 재를 묻힌 블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뿐만 아니라 옷이며 머리도 엉망이었다.
“후작님께서 사라지셨다고요?”
“넌 또 무슨…….”
카인이 입을 떡 벌리고 묻자 블란이 거칠게 머리를 헤집으며 알테어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후작님의 방을 지키고 있는데, 복도에 난 창밖으로 연기가 보이는 겁니다. 자세히 보니 불길이 점점 커지고 있어서 이대로 뒀다간 크게 번지겠다 싶어 당장 달려간 건데…….”
블란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최우선 임무는 호위가 분명했습니다. 불길을 보고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
알테어는 차마 블란을 질책하지 못하고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화재는 쉽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제때 불길을 잡지 않으면 순식간에 모두를 집어삼킬 정도로 규모가 커져서, 그때가 되면 사람이 어떻게 손쓸 길이 없었다.
게다가 정황상 그 불길 역시 아바르 바인이 모두의 눈길을 돌리려고 일부러 냈을 가능성이 컸다.
작정하고 낸 불이니 때를 놓치면 정말 저택 전체를 집어삼킬지도 몰랐다.
사람 하나를 호위하는 것과 저택 전체로 번질 수 있는 불길을 잡는 것.
당연히 후자가 더 급하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사람 하나’가 나디아였다는 거고, 하필 그녀에게 앙심을 품은 남자가 이 저택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다.
알테어는 지나치게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 터져도 냉정하게 지시 내리는 걸 보고 기사들이 ‘영주님. 심장 뛰고 있는 거 맞으시죠? 혹시 피가 파란색은 아니시고요?’라고 떠들기도 했었는데.
사건을 마주했을 때 내가 이토록 동요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던가.
임무 앞에서 머리에 피가 몰려 생각 따위는 않고 몸을 던지는 부하들을 볼 때마다 알테어는 혀를 차곤 했었다.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면 두 번 움직일 걸 한 번 움직일 수 있고, 머리를 내어 줄 걸 팔을 내어 주는 걸로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평정심을 유지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읽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인데…….
지금은 도무지 평정과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한때 자신이 한심한 놈들이라고 질책했던 부하들처럼 생각 없이 달려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알테어는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고 겨우 카인과 블란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은 행동을 평가하거나 질책할 시기가 아니다. 떠들 시간에 발을 움직여.”
***
“칭찬해 줬는데 왜 감사하다는 말이 없는 거냐. 응?”
철컥.
숙부가 문을 걸어 잠그고 천천히 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뒷걸음질을 쳤지만 금세 책상에 가로막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걸 본 숙부가 기분 나쁘게 씨익 웃자 누런 이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의 정체를 몰랐다면 영락없이 빈민가의 노인이라고 생각했을 법한 모습이었다.
나를 궁지로 몰았다고 생각했는지 숙부는 아주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소리만 지르면 당장 달려와 줄 기사들이 곳곳에 깔려 있었지만, 함부로 숙부를 자극했다가는 오히려 공격당할 수도 있었다.
기사들이 달려오는 것보다 숙부가 매서운 주먹을 휘두르는 게 더 빠를 테니 쉽게 행동하기 힘들었다.
“왜 대답이 없어? 재판장에서는 그리도 말을 잘하더니.”
화난 듯 발을 쿵 구른 숙부가 곧 스스로 답을 내렸다는 듯 손뼉을 치며 다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아. 지금은 혼자니까 그렇군. 그땐 든든한 아군이 많았으니까 어울리지도 않게 자신만만했던 게지. 너 따위, 혼자 있으면 이렇게 별것도 아닌데 말이야.”
숙부가 두 눈을 부릅뜨고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화를 냈다가 웃고, 웃다가 화를 내고.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완전히 돌아 버려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말 한마디에 벌벌 떨던 애가 어쩌다 이렇게 건방지게 변했는지. 쯧. 이 숙부가 제대로 교육을 해 줘야겠구나. 건방진 조카를 어찌 교육하면 좋을까…….”
숙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확연히 부풀어 오른 배 쪽이었다.
“그렇지. 임신했다고. 맞아. 어찌 애를 뱄지? 씨를 말려 버리려고 그리 애썼는데. 이 애만 없었어도 내가 이겼을 텐데!”
평온하게 이어가던 말이 끝에 이르러서는 완전한 분노가 되어 있었다.
재판장에서 숙부는 나를 ‘불임인 걸 속이고 결혼한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성을 완전히 잃게 만들어 내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헛소리로 돌리려는 전략이었고, 만약 정말로 불임이었다면 숙부의 전략이 제대로 통했을 거다.
그러나 나는 재판장에서 임신했음을 만천하에 공개해 오히려 숙부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숙부의 몰락이었다.
그 몰락의 중심에 아이가 있다 보니 분노가 이쪽으로 향한 모양이었다.
이성을 잃은 숙부가 내게 달려들어 공격한다면…… 아이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내가 몇 대 맞는 건 괜찮다. 사람은 몇 대 맞는다고 죽지 않으니까.
죽기 전에는 기사들이, 또 알테어가 이상한 기류를 알아차리고 날 도우러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조그만 충격에도 유산될 수도 있다. 리온이 몇 번이나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터라 더욱 불안했다.
내가 맞는 것보다도 이 아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불안함을 드러낸다면 숙부가 더욱 기세등등해질 뿐이다.
‘태연하게 굴자. 알테어 흉내를 내. 시간을 벌기만 하면 모두가 날 찾으러 올 거야.’
다른 곳도 아닌 저택의 한가운데다. 내 방에서 멀지도 않았다. 정말 조금의 시간만 벌면…….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숙부의 커다란 손이 날아왔다.
얼굴로 날아오는 주먹을 빠르게 피해 보았지만, 흥분한 남자의 손길을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읏!”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통으로 맞는 걸 피했다는 거?
그래도 너무 아파서 눈물이 쏙 나올 뻔했다.
나는 휘청이며 책상을 짚었다. 머리를 맞아서 그런지 땅이 마구 뒤흔들리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숙부가 다시 손을 드는 게 느껴져서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뭘 원하세요?”
“…….”
“다 드릴게요. 말만 하시면요.”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숙부가 혹할 이야기로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 볼 참이었다.
“내가 원하는 거라…….”
숙부의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 턱을 매만지던 그가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네가 가진 건 원래 다 내 것이니 당연히 내가 돌려받아야 하는데, 왜 그게 네 것인 것처럼 말하지? 건방지게 말이야.”
숙부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흥분한 모습이었다.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잖아.’
대화로 시간을 끌어 보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듯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검술 같은 걸 좀 배워 둘걸.’
나는 뒤늦게 후회하며 두 눈으로 빠르게 공간을 훑었다.
맨손으로 숙부를 상대할 수 없으니 뭔가 무기라도 들어야 하나?
아냐. 그걸 뺏기면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는 와중에 작은 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이곳은 옆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지.
‘저쪽으로 도망가서 문을 잠그면……?’
바깥으로 향하는 문은 숙부를 지나쳐야 하지만 저쪽의 문은 오히려 내가 더 가까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숙부의 모습을 살폈다.
분노해서 씩씩대는 숙부의 몰골은 누가 봐도 초췌했다.
물론 그래도 기본적인 힘 차이가 나는 몸이라 정면승부는 힘들었지만, 달리기 정도라면 내가 더 빠르지 않을까?
“사실 이젠 돌려받는 건 관심도 없어. 내가 망했으니, 그만큼 너도 망했으면 할 뿐이지. 크큭. 원래 올라가는 것보다 남을 끌어내리는 게 더 즐겁잖아. 그러니까…… 죽어 버려!”
고민하는 사이 한 번 더 숙부의 주먹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정확히 배를 노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피하며 바닥을 굴렀다. 숙부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바닥을 쿵 찍었다.
“으악!”
숙부가 바닥을 직격한 손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돌바닥을 그대로 찍었으니 보통 아픈 게 아닐 거다.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숙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순간 머릿속이 번뜩했다.
기회다!
나는 숙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대로 문을 향해 내달렸다.
“어딜!”
문이 코앞까지 가까워진 순간, 숙부도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콰앙-!
엄청난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