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그딴 걸 왜 묻냐고. (141/170)


141화. 그딴 걸 왜 묻냐고.
2022.10.09.



 


“…….”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입을 떡 벌렸다.

쿵쾅대며 나를 향해 달려오던 숙부가 발이 꼬여 요란하게 바닥을 뒹군 것이다.

순간 다급하게 도망치는 것도 잊을 정도로 황당한 광경이었다.


“으으…….”

제대로 바닥을 나뒹군 숙부는 신음을 흘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내가 넘어지라고 저주를 건 것도 아닌데, 아니, 그런 생각을 조금쯤은 했지만…….

숙부는 넘어진 게 내 탓이라도 된다는 듯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사실 무슨 일이 벌어졌더라도 그는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재앙 같은 계집! 넌 당장 세상에서 사라져야 해!”

숙부가 흥분해 길길이 날뛰며 다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행히 이미 문고리를 잡은 상태라 나는 숙부에게 붙잡히기 전에 재빨리 옆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사히 해낸 건 이동뿐이었다.


“어딜!”

숙부와 나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대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문을 닫아 잠그려고, 숙부는 문을 열어 들이닥치려고 애썼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숙부와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다행히 숙부가 오랜 감옥 생활로 쇠약해져 있어서인지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흥분해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숙부와 달리 나는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으으…….’

서로가 힘을 쓸 때마다 조금 열렸다가 거의 닫히기를 반복하던 문은 이제 크게 열렸다가 미미하게 닫히는 수준으로 바뀌어 있었다.

승기가 자신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문 사이로 보이는 숙부의 형형한 눈이 환희로 물들었다.


‘절대 안 돼!’

나는 이를 악물고 죽을힘을 다해 문을 사수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팔에서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아!”

그때 단단히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순간적으로 미끄러진 것뿐이었지만 팽팽하게 힘 싸움을 하고 있던 참이라 순식간에 균형이 숙부 쪽으로 기울었다.

다급하게 다시 문을 붙잡아 봤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활짝 열리는 문을 따라 몸이 숙부가 있는 쪽으로 기울어 희열에 찬 눈과 가까워졌다.


“잡았다, 이 계집!”

숙부가 이를 갈며 내게 손을 뻗었다. 더 이상 피할 방법이 없었다.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내던져지거나, 주먹으로 흠씬 두들겨 맞겠지.

나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숙부를 향해 앞으로 고꾸라졌던 몸이 뒤로 확 넘어갔다. 누군가 날 잡아당긴 것이다.

손길은 매우 다급했다.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딱딱하지만 부드러운 벽에 폭 감싸 안겼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돌리자 가볍게 오르내리는 사람의 가슴팍이 보였다.

서서히 시선을 위로 올리니 알테어의 얼굴이…….


‘살았어.’

알테어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는 비틀거리는 나를 한 팔로 단단히 붙잡은 채 다른 손으로 가볍게 문을 잡아당겼다.


“뭐, 뭐, 뭐, 뭐야!”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숙부가 당황해서 낑낑대는 모습이 보였다.

알테어가 한 손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걸 본 터라 더욱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숙부가 당황하는 것과 상관없이 알테어는 손쉽게 상황을 정리했다.

쿵.

문을 닫고 차분하게 잠금 장치를 작동시켰다.

완전히 문이 닫히기 직전, 어떻게든 문을 열려고 용을 쓰는 숙부의 뒤로 기사들이 달려오는 것도 보았다.


“아악! 이거 놔!”

그들이 숙부를 제압했는지 요란한 외침이 문 너머까지 들려왔다.

상황은 정리됐고 나는 안전해졌다. 그걸 머리로 받아들이자마자 오히려 몸이 덜덜 떨렸다.

숙부와 마주하는 순간에는 당장 그를 이겨야겠다는 생각에만 몰두하느라 잠시 미뤄 뒀던 두려움이 몸을 덮친 것이다.

알테어는 말없이 덜덜 떠는 나를 끌어안았다.

바짝 붙은 거리 덕분에 아무리 열심히 훈련해도 숨이 거칠어지지 않았던 알테어의 호흡이 흐트러진 것이 느껴졌다.


“……다친 곳은?”

“특별히 없어요. 머리를 한 대 맞긴 했는데…….”

“뭐?”

알테어가 후다닥 나를 떼어내 얼굴을 살폈다.

진지한 눈길이 정확히 숙부에게 맞은 곳을 확인하고 있었다.


“멍이 들 것 같은데…….”

알테어가 조심스럽게 맞은 부위를 쓸어내리더니 입술을 질끈 깨물고 문을 노려보았다.

분명 문 너머의 숙부를 향한 시선일 텐데, 그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차가워져 주변의 공기까지 싸늘하게 식었다.

정제되지 않은 살기 때문에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내 반응에 알테어가 흠칫하며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당신한테 화낸 게 아냐. 무서워하지 마.”

“왜 내가 당신을 무서워해요. 그냥 기세에 놀라서…….”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몸이 계속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체온이 뚝 떨어진 건지 춥다는 생각이 들며 몸이 덜덜 떨렸다.


“나디아?”

알테어가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날 살폈다.

체온을 올려 주려는 건지 손으로 다급히 나를 쓰다듬었지만 차가워진 몸은 전혀 열이 오르지 않았다.

평소에 서늘하다고 느꼈던 알테어의 손이 뜨겁다고 느낄 정도였다.

특히 배가 서늘하고 조여 오는 것이…….

불길한 기분과 함께 서서히 고개를 숙이자 치마에 붉은 자국이 보였다.

피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테어…….”

나는 덜덜 떨며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얼굴만 쳐다보느라 아직 피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리온을…… 의사 선생님을 불러야…….”

말을 끝맺을 수도 없었다.

온몸이 무거워지며 의식이 아래로 점점 내려앉더니 시야가 서서히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



“영주님!”

방으로 들이닥친 알테어를 보며 반색하던 안나가 그의 품에 안긴 나디아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정신을 잃고 힘없이 축 늘어진 나디아의 모습이 꼭 죽은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의사 불러와.”

알테어는 안나의 말을 자르며 짧게 명령했다.

한가하게 그녀에게 상황 설명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의사가 필요했다.
 

 


“네, 네!”

위급한 상황인 걸 모를 리 없는 안나도 알테어의 명령에 정신을 번뜩 차리고는 후다닥 방을 뛰쳐나갔다.

알테어는 나디아를 살며시 침대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어떻게든 체온을 올려 보려고 했지만 차갑게 식은 몸이 도무지 따뜻해지지 않았다.

알테어는 마수를 잡으러 다니며 부하들이 다치는 모습은 숱하게 많이 봐 왔다.

에일스포드는 마수 사냥으로 돈을 벌었던 곳이라, 임무 하나를 다녀오면 부상병이 쏟아지는 건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알테어 본인도 크고 작은 상처를 달고 살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아픈 사람을 보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닌데.

너무 당황스러워서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삐- 소리를 내며 패닉에 빠지려는 정신을 애써 붙잡고 있었지만, 사실은 혼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안나에게 명령을 내릴 때도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알테어는 초조하게 나디아의 얼굴을 살폈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어린 시절의 기억 속 세상을 떠난 부모님의 얼굴과 겹쳐 가슴이 철렁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건 안 돼. 더는 용납할 수 없어.

특히 내 아내는, 나디아는 절대로…….


“빨리요!”

알테어의 생각이 더 부정적인 쪽으로 떨어지기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안나와 리온이 들이닥쳤다.

리온은 알테어는 안중에도 없이 당장 나디아를 향해 달려갔다.

알테어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밀려나 그가 나디아의 체온이며 숨소리, 동공 반응을 확인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언제나 제 사람들을 지키는 쪽이었는데.

이토록 무력하게 지켜만 보는 처지가 되니 죽을 맛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셨습니까?”

리온이 심각한 얼굴로 알테어에게 물었다.

사실 알테어도 중간부터 들이닥친 터라 모든 정황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는 최대한 자신이 아는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저택에 전 후작이 숨어들었어. 나디아가 그와 마주쳐 실랑이를 벌인 모양이다. 문 하나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걸 내가 발견해서 겨우 구했지만 이미 얼굴을 한 대 맞은 상태였어.”

“아아…… 이 상처가 그럼…….”

리온은 한숨을 푹 내쉬며 다른 상처가 더 없는지 확인하다 하반신을 보고 흠칫했다.

선명한 피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리온은 가릴 것도 없이 그대로 치마를 들췄다.

알테어와 안나가 놀라서 흠칫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나서서 그를 저지하진 않았다.

사실 그렇게 저지할 정신이 없었다는 쪽이 더 어울렸다.

치마를 들추어 올리자마자 드러난 상황 때문이었다.

나디아의 두 다리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

“…….”

안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알테어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상황이 안 좋습니다.”

리온이 심각한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어쩌면 아이와 부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

알테어는 헛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택하긴 뭘 선택해?”

아이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나디아가 아이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는 다시 가지면 된다. 나디아는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고.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은가?


“당연히 나디아 쪽이 더…….”

“유산하면 다시 아이를 갖기 어려운 몸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리온이 차분하게 알테어의 이야기를 잘라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알테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놀란 건 오히려 안나였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님이 얼마나 아이를 기다리셨는데요! 정말로, 정말로 그리 되면 어떻게…….”

안나가 발을 동동 구르자 리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알테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두 분 사이에 후계자는 꼭 필요하겠죠. 각각 작위와 영지를 가진 분들 아닙니까. 그걸 이해하기에 의사로서 냉정히 묻는 겁니다.”

“…….”

알테어는 사무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리온과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딴 걸. 왜 묻냐고.”

알테어는 분노를 억누르는 듯 뚝뚝 끊어진 말투로 리온에게 명령했다.


“그건 애초에 선택이고 뭐고 할 것도 없는 문제라고. 당장 나디아가 눈뜨게 해.”

다시 그 파란 눈으로 날 보며 웃게 하라고.


“그 이후에 벌어질 문제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아.”

“…….”

생각보다 훨씬 단호한 대답이었는지 리온이 잠시 알테어의 얼굴을 바라보다, 곧 안나를 쳐다보았다.


“안나 양. 당장 따뜻한 물부터 가져 와요. 필요한 약재도 알려줄 테니 구해 오고요.”

“네!”

안나가 후다닥 뛰어나가자 알테어가 비틀거리며 주저앉듯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의 얼굴이 침대에 누운 나디아 만큼이나 창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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