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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가능할까? (142/170)


142화. 가능할까?
2022.10.12.



 
나디아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리가 서둘러 달려왔다.

진지한 얼굴로 처치를 이어가는 리온과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축 늘어진 나디아를 보며 마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상황은 누가 봐도 좋지 않았다.

피가 눈을 어지럽혀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방 안의 공기가 묵직해 숨이 턱 막혔다.

마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테어는 평소와 달리 평정심을 잃은 상태였고, 안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떡해요. 우리 마님 어쩌면 좋아요. 아기님은 또 어떡하고요. 흐윽.”

안나는 벌써 초상이라도 치른 사람처럼 울먹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오히려 그 모습에 마리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모두 넋을 놓고 있으면 안 된다. 나라도 정신을 붙들고 마님을 도와야 한다.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마리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아 억지로 진정시키고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리온의 곁으로 다가섰다.


“약재는 충분한데 따뜻한 물이 더 필요합니다. 방 안의 온도도 올려야겠습니다. 생각보다 체온이 안 올라서.”

“벽난로를 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급한 대로 화로를 가져올게요.”

“뭐든요. 체온을 올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마리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그녀는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고 있는 두 기사와 마주쳤다.

안에서 사람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마리를 발견하자마자 블란과 카인이 후다닥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님은 어떠십니까?”

블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인의 건강 상태는 함부로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워낙 상황이 다급해 소란이 일었던 터라 저택 내부는 이미 불길함에 휩싸여 있었다.

평소라면 알테어가 나서서 소란을 수습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도 그럴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다들 정확한 상황은 몰라도 마님께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 정도는 깨달은 상태였다.

그 이야기에 가장 놀란 건 카인과 블란이었다.

알테어는 이런 일이 생길 걸 걱정해 진즉에 나디아 곁에 호위를 붙였다. 그게 카인이었다.

중요한 임무를 맡았는데도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임무를 등한시했다.

알테어가 감히 주인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죄를 묻는대도 변명거리가 없었다.

카인에게 부탁받고 대신 호위를 서고 있던 블란도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알테어가 직접 나디아 곁에 붙어 지키겠다고 한 걸 막은 장본인이었다.

카인에게 그 역할을 맡기면 잘할 거라고 장담한 걸로도 모자라 자신이 대신 임무를 맡았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알테어의 분노가 자신을 향한대도 모두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죄나 벌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에일스포드 모든 기사들의 유일한 레이디,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며 바인 후작인 나디아가 무탈한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마리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대신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벌벌 떨었다.

안에서는 최대한 태연하게 움직였지만, 사실은 그녀도 안나처럼 울면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외치고 싶었다.

뒤늦게 참고 있던 감정이 울컥 치고 올라온 것이다.


“마, 마리 양?”

질문을 건넨 블란이 당황해 허둥댔다.

마리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걸 겨우 참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감히 공유하지 않았겠지만, 블란과 카인은 알테어의 측근이자 나디아도 신뢰하는 기사들이니 그녀의 상황을 알 자격이 있었다.


“위급한 상황이에요. 유산하실 수도 있어요. 마님도 목숨이 위험하시고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유산한 뒤 다시는 아이를 못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귀부인에게 무척이나 치명적인 문제여서, 든든한 아군이라도 차마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리가 전한 상황만으로도 충격적이었는지 블란과 카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런…….”

“그럴 수는…….”

마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겨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체온이 너무 떨어져서 방을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화로를 여러 개 가져와서 방을 데워야 해요. 벽난로는 굴뚝 정돈이 안 된 상태라 쓸 수 없거든요.”

아직 계절이 아닌지라 벽난로와 연결된 굴뚝 청소가 안 되어 있었다.

이대로 불을 피우면 연기가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와 방을 데우려다 질식해 죽기 십상이었다.


“저 혼자서는 힘드니 두 분이 함께 화로를 옮겨 주세요.”

“그럼 다른 기사들에게도…….”

“아뇨!”

카인이 당장 움직여 도움을 청하겠다는 듯 발길을 돌리자 마리가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이렇게까지 위급한 상황이라는 걸 많은 사람이 알아서 좋을 게 없어요.”

“……그렇군요.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서 화로를 옮기죠.”

 

***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는 건 의사인 리온이었다.

하나둘 방 안에 화로가 채워질수록 공기가 후덥지근해져 언젠가부터 그는 땀을 비 오듯 쏟아 내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온도를 높인 상황에서도 환자의 체온이 여전히 차가워 초조하기까지 했다.

리온은 유능한 의사였다.

생각한 대로 처치가 이뤄지지 않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이번만은 정말로 힘들군.’

의사는 냉정해야 한다.

환자를 위해 최선을 선택하고, 최선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의사의 역할.

이런 상황에서 둘 모두 살리기 어렵다면 산모 쪽을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리온은 복잡한 심경으로 나디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얼마나 아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리온이 잘 알고 있었다.

그간 이상한 대책 회의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일정으로 나디아를 휘두르고 다녔지만, 아이를 위해서라고 하니 그녀는 모두 납득하고 따랐다.

진료할 때마다 자신의 몸 상태에는 관심 없이 늘 아이 걱정뿐이었다.

이런 사람이 만약 아이를 잃고,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견뎌낼 수 있을까?

목숨을 살린다고 해서 삶까지 살리는 것은 아닐 테지.


‘어떻게든 둘 다 지키는 쪽이어야 한다.’

리온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 한 가지 방식을 생각해 냈다.

여태까지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방식이라 가설로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희망을 걸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리온은 소파에 죽은 듯이 몸을 파묻고 있는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알테어 에일스포드는 위대한 검사라고 들었다.

이렇게 더운 공간에 있으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걸 보면, 위대한 소드 마스터의 능력으로 자연스럽게 신체를 최적화된 상태로 유지하고 있는 것일 테다.

논리로만 세워 둔 가설이지만 저 사람이 있다면 현실에서 가능할 수도 있다.

사실 알테어의 존재가 없었다면 ‘가능할까?’라는 생각조차 못 했을 방법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 여기 있지 않은가?

리온은 마음을 굳혔다.


“영주님.”

짧은 부름에 흐리멍덩하게 비어 있던 알테어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의 시선이 분명하게 자신을 향하자 리온이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산모의 상태가 너무 불안정해서, 아이가 계속 배 속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양쪽 모두에게요. 그래서 아이가 몸 밖으로 나오도록 할 겁니다.”

“……출산을 유도한다는 건가?”

알테어가 선뜻 이해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출산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알테어지만, 아이가 정해진 달수를 채우고 나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보다 빨라지거나 늦을 수는 있겠으나 한 달 내외일 것이다.

하지만 나디아의 경우는 그 기준에 한참 못 미쳤다.

리온도 알테어의 의문을 이해했다.


“보통 조산이라고 합니다만, 사실 개월 수가 모자라 유산에 가깝습니다. 이 시기에 산모의 몸 밖으로 나오면 아기는 더 자라지 못하고 죽거든요.”

정해진 개월 수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나는 경우와 두 달 먼저 태어나는 경우의 태아 생존율은 천지 차이다.

하물며 이렇게 일찍 태어난 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죽은 아이를 배 속에서 꺼내는 거나 마찬가지인 작업이다.


“하지만 영주님의 힘을 빌린다면…… 아이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정적인 말들만 이어지다 처음으로 등장한 긍정적 표현에 알테어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리온의 제안을 수락했다.


“아직 뭘 해야 하는지 듣지도 못하셨잖습니까.”

“당신은 유능한 의사잖아. 내게 이야길 꺼냈다는 건 성공 가능성이 크거나, 그게 유일한 방법이어서겠지. 어느 쪽이든 해야 할 이유가 충분해.”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알테어가 눈빛으로 그를 재촉했다.

리온은 당장 자신의 계획을 말하는 대신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영주님처럼 강한 검사들은 몸에 거대한 오러를 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그걸…… 타인에게 넘겨 줄 수도 있습니까?”

생전 처음 듣는 질문에 알테어의 눈이 커졌다.

오러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힘이 아니었다.

쉬지 않고 수련해 정순한 힘을 체내에 쌓아 가는 과정은 긴 인내를 요구했으므로,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나가떨어지지 않고 오래 수련한다고 모두 거대한 오러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재능이 없거나 타고난 신체 기질이 오러 친화적이지 않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체내에 오러가 쌓이지 않는다.

하지만 알테어는 노력도 많이 하고, 재능도 뛰어난 데다가, 친화력도 높았다.

말 그대로 타고난 마스터의 재목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해서 쌓은 오러를 타인에게 넘긴다고?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정제되어 체내에 쌓인 오러는 오로지 그 사람의 특성에 맞춘, 이른바 맞춤형 오러였다.

이게 타인의 몸에 들어간다면 오히려 상대를 파괴하지 않을까?

검사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타인의 오러를 받는다’라거나 ‘타인에게 오러를 준다’라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리온은 의사이니 이런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테어는 그 점을 이야기하는 대신 리온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걸 묻는 이유가 뭐지?”

“이르게 세상 밖으로 나온 태아의 사망률이 높은 이유는 스스로 작동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러는 생명의 힘, 신체를 최적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죠. 그 힘을 태아가 스스로 작동할 수 있을 때까지 주입한다면…….”

리온이 말끝을 흐리고 알테어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표정을 통해 이 계획의 가능성을 점쳐 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알테어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긍정이나 부정을 읽어 내기 힘들었다.

알테어는 조용히 나디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그녀의 모습에 알테어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결론을 내뱉었다.


“하지.”

그게 무슨 일이든 나디아와 우리의 아이를 위해서는 해야 한다고.

결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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