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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마음의 준비를. (143/170)


143화. 마음의 준비를.
202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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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정도는 하셔야 할 겁니다.”

리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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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닙니다. 혹 아이가 잘못됐을 때의 죄책감까지 나눠 갖자는 이야기입니다.”

의사가 모든 사람을 살리지는 못한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산다.

산다면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만약 환자가 죽는다면 죄책감이 마음에 남는다.

의사는 신이 아니니 환자의 죽음은 당연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걸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받아들이는 건 천지 차이였다.

의사로 일한 경력이 긴 리온도 아직 환자의 죽음이 마냥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환자를 살리지 못하고 일과를 마무리하는 날이면 집에서 몇 번이고 그 순간의 기억을 되새기고는 했다.

이렇게 했다면 살았을까. 내가 처치를 잘못해서 죽은 걸까.

그런 죄책감을 안고 사는 건 의사의 숙명이었다.

하지만 알테어 에일스포드는 평생 그런 숙명과 맞설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 짐을 나눠 갖자고 손을 내밀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환자는 그의 아이였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의 타격은 훨씬 클 터.

리온은 그런 점을 감수할 것인지 미리 경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겁게 질문한 리온과 달리 알테어의 반응은 담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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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서지 않아서 아이가 죽더라도 똑같이 죄책감을 안고 살겠지. 혹시라도 내가 갖게 될지도 모를 죄책감 따위가 아이를 살릴 기회보다도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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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당연히 아니다.

그제야 리온은 자신이 바보 같은 경고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이런 방법이 있다는 걸 알리지 않았다면 모를까, 입 밖으로 꺼낸 순간부터 알테어 에일스포드에게 ‘거절’이라는 길은 없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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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협력을 요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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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나오면 몸에 오러를 주입하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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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주의할 점은, 아이의 몸이 스스로 작동할 수 있을 때까지는 오러가 계속 몸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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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쉽지 않은 요구에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들은 오러를 생명의 힘이라고들 하지만, 어쨌든 강한 힘을 가진 기운이었다.

신체가 받쳐 주지 않으면 강한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검사들은 먼저 신체를 단련하고 오러를 쌓는 식으로 수련한다.

갓 태어난 아이는 당연히 많은 오러를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다.

그러니 오래 오러를 품고 있어야 한다고 해서 한꺼번에 많은 양을 주입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너무 적게 주입하면 자주 오러를 나눠 줘야 할 테니까…….

그 균형을 맞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알테어 정도의 수준에 이른 자이니 겨우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할 수 있었다.

평범한 검사라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며 손을 내저었을 것이다.

알테어는 가볍게 손을 들어 몸속의 오러를 움직여 보았다.

한순간 몸을 가득 채운 힘이 그의 의지에 따라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전투할 때가 아니라면 몸 깊은 곳에 갈무리해 두기 때문에 타인은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 힘의 존재감에 리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뭉쳐진 기운이 품은 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알테어는 외부로 뽑아낸 힘을 손바닥 위에 뭉쳐 보았다.

오러는 일렁이며 빛을 내다 천천히 공처럼 둥글게 모습을 바꾸더니, 곧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달리했다.

단순한 원형의 구에서 복잡한 조각의 형태까지.

알테어는 시험하듯 오러를 세심하게 깎아 낸 뒤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서 맴돌던 기운이 한순간에 타올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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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했어.”

알테어의 대답에 리온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서 세심하게 오러를 다루는 모습을 본 터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

아이가 곧 태어날 거라는 이야기에 안나와 마리는 잔뜩 긴장한 채 리온의 곁을 지켰다.

두 사람에게는 아이가 나오면 탯줄을 자르고 포에 싸서 알테어에게 넘기는 역할이 주어졌다.

안나는 물론이고 오래 귀족가에서 시녀로 일한 마리도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에 함께하는 것은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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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위험한 방법입니다. 그런데도 이 방법을 시도하는 건, 이 상태로는 더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태아 때문에 산모에게 쓸 수 있는 약이 제한되어 있어서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 결과가 어떻든 아이를 빼내는 겁니다.”

리온은 몇 번이나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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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나오면 저는 바로 산모의 기력을 살리는 데 집중할 겁니다. 그러니 아이는 영주님께서 맡아 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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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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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이가 울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렁찬 아이의 울음은 성공적인 출산을 알리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산에 가까운 조산이라 아이가 우렁차게 우는 건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시녀들과 알테어가 아이가 울지 않는 사실에 당황해서 허둥댈까 봐 미리 일러 둔 것이다.

안나와 마리는 긴장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고, 알테어도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산모에게 출산을 촉진하는 약을 먹이면 곧 과정이 진행될 것이다.

일반적인 출산이라면 이런 약으로 아이를 빼낼 수 없지만, 지금은 태아가 워낙 작은 상태라 가능했다.

리온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나디아에게 준비한 약을 먹였다.

의식이 없어 반은 입 안으로 들어가고, 반은 옆으로 흘렀지만 그걸 고려해 양을 정했으니 괜찮았다.

약이 바닥을 드러내자 리온이 조심스럽게 나디아의 상태를 살폈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림뿐이었다.

사람이 다섯이나 있는데도 방 안은 무거운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만히 나디아의 하반신을 지켜보던 안나가 펄쩍 뛰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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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와요! 나오고 있어요! 아니, 다 나온 거 같아요!”

평범한 출산처럼 산모와 아이가 실랑이를 벌이듯 밀고 당기는 과정이 전혀 없었다.

안나와 마리는 놀라서 할 일도 잊고 나디아의 몸 밖으로 나온 아이를 쳐다보았다.

너무 작아서 이걸 아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어질 정도였다.

물론 그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의문이 있었다.

아이가 살아 있기는 한 걸까?

미동도 없는 작고 조용한 존재.

우렁찬 울음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존재만으로도 생명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절망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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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게 아닙니다!”

리온이 재빨리 나디아의 상태를 살피며 두 사람에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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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움직여요!”

죽은 게 아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안나와 마리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탯줄을 자르는 안나도, 아이를 포에 싸서 알테어에게 넘기는 마리도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건 아이를 받아 드는 알테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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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만 잡으면 알테어를 놀리기 바쁜 카인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알테어가 손을 떤다며 장난치지 못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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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훨씬 작아.’

출산이니 태아니 하는 부분에 대한 알테어의 지식은 미천했다.

아이가 작을 줄은 알았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서 그는 잠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미리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미세한 오러를 아이의 몸에 나눠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양이 적은 만큼 오러는 빠르게 몸 안에서 소진될 것이고, 알테어는 그럴 때마다 계속 오러를 주입해야 한다.

한시도 아이에게서 손을 뗄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아주 긴 싸움이 될 거라는 뜻이었다.

알테어는 이를 악물고 가까운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사흘 밤낮을 선 채로 버틸 수도 있는 알테어지만 오러를 섬세하게 운용하는 건 심력이 크게 소모되는 일이라 다른 무리한 요소를 전부 제거해야 했다.

알테어는 최대한 편안하게 자리 잡은 후 아이의 손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겨우 손가락 하나에도 손 전체를 전부 접촉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가 작았다.

그 사실에 어째서인지 알테어는 심장이 조여 왔다.

이 작은 생명이 보호받아야 할 모체에서 이르게 떨어져 나와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있는 것이 두려운 것 없는 그를 무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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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어머니인 나디아가 필사적으로 이 애를 지켰지.’

이제는 아버지인 자신이 이 애를 지켜야 할 때였다.

알테어는 맞닿은 손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오러를 밀어 넣었다.

체질이 맞지 않으면 시작부터 큰 거부 반응이 일어나 서로의 장기가 뒤틀릴 수도 있으므로 알테어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제 장기가 뒤틀리는 거야 우습게 넘길 수 있지만 작은 아이의 장기가 뒤틀리면 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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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맞닿은 곳을 타고 오러가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자마자 알테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타인의 몸에 오러를 넣으려면 아무리 세심하게 조정해도 거부 반응이 약간 느껴지기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오러가 넘어가는 과정에 전혀 막힘이 없었다.

거대한 폭포수가 아래로 쏟아지듯, 마치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양 거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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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 애의 체질이 그만큼 비슷하다는 건가?’

그랬다. 이 아이는 알테어와 나디아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아이였다.

정말 신기했다.

피로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건 이처럼 대단한 거였나.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은 후 이러한 유대감을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알테어는 굽이치는 생각의 격류 속에서도 평정을 찾으려고 애썼다.

아이의 몸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이 기운이 끊이지 않게.

살면서 이토록 집중한 적이 있었나 싶어질 정도였다.

어느새 알테어의 몸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온 힘을 쏟아 훈련하던 때나 흐르던 땀이었다.

간절한 알테어의 노력을 알아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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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으엥…….”

죽은 것으로 착각할 만큼 미동 없이 조용하던 아이의 입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어쩌면 숨소리로 착각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아이가 울었다!

울음이란 생명의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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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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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알테어의 처치에 집중하고 있던 마리와 안나도 그 소리를 분명히 들었는지 반색하며 펄쩍 뛰었다.

웃는 일이 매우 드문 알테어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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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 아이가 울었어요! 살았다는 뜻이겠죠? 네?”

안나가 호들갑스럽게 기쁜 소식을 알렸는데도 리온은 대답이 없었다.

그 사실에 자연스럽게 불길함을 느낀 세 사람이 아이에게 집중하던 시선을 서서히 나디아에게 돌렸다.

나디아의 안색은 아이를 낳기 전보다 훨씬 더 나쁘게 변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창백했던 얼굴이 이제는 잿빛이었다.

그게 마치 시체처럼 보여서…….

알테어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나디아 앞에 서자 뭘 아는 것도 아니면서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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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앵…… 우에앵!”

조금 전보다 더 큰 울음이었다.

여전히 평범하게 태어난 아이들보다 훨씬 작은 소리였지만 이제 확실히 아이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리온은 귀가 먹은 사람처럼 땀을 흘리며 분주하게 나디아에게 처치를 이어 갈 뿐이었고, 나디아는 힘없이 축 늘어져 모든 기력을 잃은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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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테어는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엉켜 도무지 입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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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를.”

아이의 미약한 울음이 이따금 들려오는 싸늘한 고요 속에서 리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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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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