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왜 이런 일이. (145/170)


145화. 왜 이런 일이.
2022.10.23.



 
‘누구세요?’라니.

나디아의 폭탄 발언에 그녀가 깨어났다는 사실로 들떠 있던 방 안이 싸늘해졌다.

침착한 사람은 리온 뿐이었다.

그는 덜덜 떨고 있는 나디아를 향해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


“이게 몇 개로 보입니까?”

“두, 두 개요…….”

나디아는 얼떨떨한 상태로 착실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리온은 차례로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들은 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인지 능력에는 문제가 없군요. 시각과 청력도 훌륭하고요. 사실 제가 걱정한 후유증은 이런 쪽이었는데…….”

리온이 슬쩍 알테어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그에게 부작용이나 후유증에 대해 경고할 때 염두에 둔 것은 신체적인 부분이나 인지적인 부분에서의 문제였다.

이런 쪽의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리온도 예상하지 못했다.

유능한 의사의 예측은 대체로 맞는 편이었기 때문에, 리온도 지금 상황이 다소 당황스러웠다.


“음…… 그럼…… 여기 이 자리에서 아는 얼굴이 있습니까?”

좀 더 확실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리온이 물었다.

나디아는 떨리는 눈으로 방 안을 쭉 살피다 곁에 선 마리의 얼굴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마, 마리……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마님……!”

나디아가 자신을 알아보자 마리가 불행 중 다행이라는 듯 반색했다.

그러나 나디아는 오히려 얼굴이 허옇게 질려 버렸다.


“마님이라니? 내가?”

“아…….”

마리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알테어를 힐끗대며 우물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어제 뭘 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어제……라면…….”

나디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데뷔탕트가 내일이라 드레스를 입어 봤는데…….”

“그, 그럼……!”

한두 달도 아니고, 몇 년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상황이다.

그사이에 나디아는 결혼을 하고, 작위와 재산을 되찾고, 아이까지 낳았다.

수많은 사건을 누가, 어떻게 설명해야 나디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다들 난처함에 어쩔 줄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리온이었다.


“……제가 상황을 설명하죠.”

이런 상황에서 환자를 납득시키는 건 의사의 몫이니까.


“아무래도 강도 높은 치료의 영향으로 몇 년간의 기억이 날아간 모양입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모두 힘을 합쳐 극복하는 수밖에 없지요.”

리온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최악의 경우 기억이 안 돌아올 수도 있지만…… 여러 방향으로 노력해 보도록 하죠.”

기억이 안 돌아올 수도 있다는 말에 모두가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이 됐다.

그 사이에서 가장 당황한 건 역시 나디아였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나디아’ 말이다.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어리둥절하게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고, ‘내’가 알테어를 향해 누구냐고 묻고, ‘내’가 마리를 향해 울상 짓는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

처음에는 꿈을 꾸는 건가 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꿈은 아닌 듯했다.


‘흔히 말하는 유체 이탈 같은 건가?’

그렇다기엔 내 몸이 알아서 척척 움직이고 있는걸.

유체 이탈이라면 정신을 못 차려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몸 주위를 빙빙 돌며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방 안은 초상집처럼 싸늘해졌다.

모두를 걱정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몸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단단한 방어막을 두른 것처럼 내 몸이 계속 나를 튕겨 냈기 때문이다.


‘에잇!’

팅-!


‘에에잇!’

티잉-!


‘…….’

대책 없이 몸을 향해 뛰어들고, 여지없이 튕겨 나가길 수십 번 반복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다른 사람 몸도 아니고 내 몸인데. 어째서 날 거부하는 거야.

답답한 상황에 대한 힌트는 의외로 빨리 얻을 수 있었다.


“혹시 어제 뭘 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어제……라면…….”

마리의 질문에 ‘내’가 어깨를 움츠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데뷔탕트가 내일이라 드레스를 입어 봤는데…….”

“그, 그럼……!”

마리가 깜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놀라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유는 조금 달랐다.

다들 몇 년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진 상황에 놀란 모양이지만, 나는 내 기억이 끊긴 시점이 ‘데뷔탕트 무렵’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하필 데뷔탕트를 기점으로 기억이 끊기다니.’

시점이 묘했다.

나는 데뷔탕트에 참석해 이 책, <검은 장미의 배반>의 여주인공 아벨리나를 보고 이 세상이 내가 읽었던 책 속이라는 걸 깨닫지 않았던가?

그 이후 나는 책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이득을 취했다.


‘수도를 떠나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도 그렇고…….’

에일스포드에서 광산 발견 시점을 당긴 것이나 3황자 오르카와 알테어의 인연을 끊어 낸 것, 리온을 3황자가 아닌 에일스포드의 인재로 끌어들인 것도 전부 책의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어쩌면 어느 사람도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로 많은 것을 얻었다.

덕분에 내가 수십 번 읽었던 책에서 진행됐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현재가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아마 이 세상을 만들어 낸 존재에게 ‘이야기를 아는 등장인물’의 존재는 달갑지 않을 거다.

여태까진 조용히 넘어갔지만, 계속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지켜보다 못한 이 세상의 창조자가 드디어 칼을 뽑아 든 거라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는 거야?’

불길한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 아냐!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어떻게든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면 된다.

어떤 이유로 영혼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창조자의 뜻이라느니 어쩌니 하며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창조자에게 자신이 만들어 낸 세계가 중요하듯 내게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방법을 생각해 내, 나디아.’

나는 주문을 걸듯 다짐을 되뇌었다.

수십 번 읽었던 ‘이야기’ 속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좀처럼 충격받는 일이 없는 알테어가 당황하고 상심한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겨우 눈을 뜬 부인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니, 누구라도 상심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의외다.’

알테어라면 당황하지 않고 척척 해결책을 찾는 쪽일 줄 알았는데 말이다.


‘흐음…….’

나는 내 몸 근처를 맴돌던 걸 멈추고 슬그머니 알테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훌쩍 가까워지자 혼란에 잠긴 알테어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평소에는 민망해서 이렇게 알테어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기 힘들었는데.


‘확실히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많은 게 느껴지는구나.’

나는 알테어의 뺨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보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반투명한 유령이 되어 버린 손은 알테어를 만지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알테어가 뭔가를 느낀 사람처럼 움찔하며 제 뺨을 쓰다듬었다.

정확히 내 손이 스쳐 간 곳이었다.


‘헙!’

 

 
알테어의 눈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놀라서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대담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건 알테어가 당연히 못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해서였는데.


‘설마?’

나는 다시 조심스럽게 알테어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쿡 찔렀다.

그러자 알테어가 또다시 움찔하며 정확히 내가 서 있는 곳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히 맞았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입을 떡 벌리고 있으니 안나가 슬쩍 알테어 곁으로 다가왔다.


“왜 허공을 보고 계세요?”

“……뭔가 기척이.”

알테어가 찜찜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뛰어난 검사는 기척에 예민하다더니. 유령의 기척도 느끼는 건가?


“뭔가…… 익숙한 기척인데…….”

알테어가 작게 중얼거리며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내게 닿기 전에 마리가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마님!”

벌벌 떨던 ‘내’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픽 쓰러진 탓이었다.


“나디아!”

알테어가 순식간에 튀어 나가 침대 모서리로 직행하던 내 머리를 보호했다.

옆에 있던 리온이 손을 뻗는 것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이었다.

너무 급히 막느라 알테어의 손이 강하게 부딪혔지만, 그는 제 손의 상태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알테어의 시선은 오로지 ‘나’를 향해 있었다.

그는 힘없이 축 늘어진 ‘나’를 끌어안은 채 리온을 쳐다보았다.


“왜 또 이러는 거지?”

“아무래도 상태가 불안정하시니까요. 지금 상황에 충격도 받으셨을 테고.”

“……당장 모든 걸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 우선 나디아가 마음 편하게 회복할 수 있도록 해.”

“음. 영주님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나와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벌벌 떠는데 내가 남편이라고 하면 퍽이나 마음 편히 회복하겠군.”

알테어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에일스포드에 와서도 이랬어. 나랑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떨면서 죄송하다고 했지.”

그가 옛일을 떠올리는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누군가 날 두려워하고 멀리하는 건 익숙해.”

그가 작게 중얼거리며 쓰러진 ‘내’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나디아가 건강해지기만 하면 돼. 다른 일은…… 그 후에 생각하지.”

혹여나 연약한 것이 부서질까 두렵다는 듯, 무척이나 소중한 것을 매만지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알테어가 이런 애틋한 눈빛으로, 또 이렇게 다정한 손길로 날 대하고 있었나?

직접 알테어를 마주할 때는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기 바빠서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밖으로 튕겨 나와 제3자의 시선에서 알테어를 보고 있으니…….


‘마치 알테어가 나를…….’

사랑하는 것 같잖아……?

***

기절한 ‘나’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의식이 없을 때는 저항력이 약해질까 싶어 몇 번이나 몸에 들어가려고 시도해 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런 식으로는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서 영혼의 일부가 튕겨 나올 때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위기가 있었으니, 몸에 돌아갈 때도 비슷한 고비가 있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상황을 만드는 건 좀 무서운데.’

애초에 유령이라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할 수 있더라도 혹시 일이 잘못되면 그대로 죽어 버릴지도 모르니 너무 위험하다.


‘으으. 그럼 어떡하지?’

나는 답답함에 방 안을 둥둥 떠다니다 벽에 몸을 기댔다.

단단한 벽에 몸을 지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몸이 그대로 벽을 통과해 뒤로 쑥 넘어가는 게 아닌가?

유령은 벽도 통과할 수 있다는 걸 생각 못 했어!


‘으아아아!’

나는 유령인 채로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유령이라 누가 못 보는 게 다행이야…….’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벽을 넘어왔으니 이곳은 알테어의 방일 거다.

예상대로 오래 두리번거릴 것도 없이 알테어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건지 심각한 얼굴의 블란과 카인도 곁에 있었다.


“마님께서 깨어나셨다니 한시름 놨습니다.”

“위험한 고비는 넘기신 거니까요.”

카인과 블란은 ‘내’가 기억을 잃은 채라는 걸 쏙 빼고 알테어를 위로했다.


“그…… 다른 문제도 서서히 괜찮아지실 거고요.”

블란이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전망을 이야기했으나 알테어는 그 부분을 딱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일에 관심이 있었다.


“아바르 바인은?”

알테어의 입에서 숙부의 이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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