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일반적이고 평범한. (146/170)


146화. 일반적이고 평범한.
2022.10.26.



 


“포박한 채로 가둬 뒀습니다.”

카인의 짧은 대답에 블란이 슬쩍 말을 얹었다.


“슬슬 처분을 내리셔야 합니다. 발스테드의 죄수이니, 원칙적으로는 다시 돌려보내는 게 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이렇게 오래 붙잡고 있는 것도 황실 입장에서는 거슬릴 테죠.”

숙부의 공식적인 신분은 ‘발스테드의 죄수’다.

발스테드는 황제가 직접 잡아다 가둔 이들의 감옥이니 죄수의 관할권도 모두 황제에게 있었다.

그러니 블란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알테어는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순순히 그놈을 돌려보내자는 건가?”

결코 화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침착함이 오히려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며 길길이 날뛰었다면 이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을 텐데.

내게 향한 것도 아닌 싸늘한 시선에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물론 지금은 몸이 없지만…….’

기분이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알테어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블란은 그 서늘함이 익숙하다는 듯 움찔하지도 않았다.

카인도 덤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약한 나와는 달리 담대한 기사들이니 알테어의 기세를 충분히 받아 낼 수 있는 거겠지.


“당연히 그냥 보낼 수는 없습니다. 감히 마님을 죽이려고 한 놈인데요.”

내가 두 사람의 대처에 감탄하는 사이 블란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에일스포드는 반드시 보답한다’라는 말, 늘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저희 선에서 ‘보답’하려면 황제 쪽에 양해를 구하든 핑계를 대든…… 절차가 필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글쎄. 그쪽에서 우리에게 할 말이나 있을까 싶군. 살아 있는 놈을 사망한 줄 알고 밖으로 내보냈다가 이 사달이 벌어졌으니 발스테드의 견고함에 상처가 난 셈이지.”

알테어가 픽 웃음을 흘렸다. 비웃음이 담긴 싸늘한 미소였다.


“우리에게 항의한다면 발스테드에서 죄수에게 속아 자유를 줬다는 사실을 스스로 들쑤시는 셈이니 감히 나서지 못할 거다.”

“그럼 처분한 뒤 시체만 넘기는 쪽으로…….”

“시체를 넘겨?”

알테어가 블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조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끊어 냈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쪽에 넘겨줄 시체가 있기나 할까? 포박한 채로 까마귀 산에 던져지면 시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안 남을 텐데.”

까마귀 산은 수도 외곽의 빈민촌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다들 산이라고는 부르지만 사실 언덕에 가까운 곳인데, 장례 치를 비용이 없는 빈민가 사람들이 대충 시체를 던져 놓아 늘 밥을 찾아 날아드는 까마귀가 득실거리는 곳이라 ‘까마귀 산’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산 채로 던져진다면…….


“신선한 먹잇감을 찾은 까마귀들이 아주 즐거워할 테지. 까마귀들이 쪼아대는 상처로는 쉽게 죽지도 못해. 내장이 모두 파먹히는 순간에도 정신이 또렷하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거야. 물론 그게 쉽지 않겠지만.”

차분하게 이어지는 알테어의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오싹했다.


‘알테어가 정말로 악역이긴 했구나.’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알테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앞에서도 늘 무표정하고 싸늘한 안색이지만…… 이렇게까지 날것의 잔인함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정하고 달콤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날 존중하고 상식적인 남편이었다.

덕분에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알테어가 소설 속의 무서운 악역이라는 것도 잊고 경계를 풀고 말았다.

마음의 문을 열고, 더 나아가 사랑하게 됐다.

어쩌면 내가 본 소설 속의 알테어는 악역의 편이라는 이유로 더 무섭게 표현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사실은 그저 무뚝뚝할 남자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본 알테어가 ‘진짜’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이게 진짜 알테어야.’

소설 속의 활자만으로도 나를 벌벌 떨게 했던 그 모습이 알테어의 속에 있었던 거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는데도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앞에서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 없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블란. 당장 아바르 바인을 까마귀 산으로 끌고 가서, 아니, 내가 직접 하지.”

알테어가 산책하러 나가겠다는 듯 가벼운 말투로 까마귀 산을 언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까마귀에게 먹히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참으십시오. 영주님은 눈에 띄는 편이라 빈민가에 나타나면 반드시 소문이 퍼질 겁니다.”

블란이 당장 밖으로 나서려는 알테어의 걸음을 붙잡았다.

물론 알테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지금 내가 소문 따위를 두려워할 거 같나?”

“마님을 생각하셔야죠.”

나를 언급하는 블란의 말에 알테어가 처음으로 날카롭던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어깨를 움찔했다.


“저도 뭐…… 영주님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무슨 소문에 휩쓸려도 콧방귀를 끼실 분인데요. 하지만 마님은 다르시잖습니까.”

“…….”

“게다가 까마귀 산은 시체가 가득한 곳이라 잠깐 발을 들여놓기만 해도 몸에 냄새가 밸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시체 냄새는 아무리 목욕해도 쉽게 안 빠져요.”

“…….”

“그런 냄새를 잔뜩 밴 채로 마님과 아기님 곁에 가실 수는 없잖아요?”

블란의 말이 이어질수록 알테어의 기세가 한 단계씩 꺾이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도 제 기세가 꺾이는 것이 느껴졌는지 알테어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렇게 된 게 언제부터였지?”

“이렇게요?”

“그래. 내가 네 조언에 따르지 않을 때마다 나디아를 무기로 삼아서 설득하는 거 말이다.”

“그야 꽤 되었죠? 이보다 영주님께 잘 먹히는 설득은 없거든요. 마님께 그저 감사할 뿐이죠.”

블란이 빙긋 웃으며 마치 내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정중하게 기사의 인사를 올렸다.


“이번에도 제 설득에 넘어와 주시겠죠, 영주님?”

“……고약하긴.”

알테어가 밖으로 나가려던 걸음을 멈춰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으며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부인 눈치를 보느라 이젠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군.”

“사실 마님은 영주님이 뭘 하시든 존중하실 테지만요.”

“……그런 사람이니 더 눈치 볼 수밖에 없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쉽게 말하지 않으니까.”

알테어가 고개를 돌려 내가 통과해 온 벽을 쳐다보았다. 내 방이 있는 곳이다.


“그…… 돌아오실 겁니다. 기억이요.”

한참이나 침묵을 고수하던 카인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알테어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자 카인이 답지 않게 풀이 죽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기억이 돌아오셔야 마님의 호위를 제대로 못 한 저도 제대로 사죄드릴 수 있으니까요.”

죄책감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사실은 숙부가 미친 거지, 다른 사람들은 잘못 없는데.’

미친 사람이 괜히 미친 사람인가? 예측할 수 없이 황당한 행동을 저지르니 미친 사람인데.

카인의 잘못을 따지는 건 피해자의 잘못을 추궁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사죄해도 안 받아 줄 거야.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카인의 주위를 빙빙 맴도는데 알테어가 픽 웃음을 흘렸다.

숙부의 시체를 운운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웃음이었다.


“글쎄. 나디아는 네 녀석의 사죄를 안 받아 줄 거다.”

“아…….”

“네 잘못이 아니니까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지. 그런 사람이니까.”

“아아……?”

하늘이 무너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던 카인이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눈을 번쩍 떴다.

눈이 동그래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홀로 했던 생각을 알테어가 정확히 맞춰 놀랐다.

나만 일방적으로 알테어를 깊이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알테어도 나를 깊이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분의 마음이 깊은 곳에서 닿아 있으니, 영주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마님도 분명 그러실 테죠.”

카인이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알테어가 머쓱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야.”

“사랑하는 부부의 마음은 하나라고 하잖습니까. 아주 정확할 겁니다.”

완전히 기운을 되찾은 카인이 평소처럼 능청스러운 언사로 알테어를 쿡 찌르자, 알테어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사랑하는 부부…….”

“예. 사랑하는 부부요. 말을 많이 하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게 미덕이라고는 하지만, 영주님은 말이 너무 없으시다니까요. 마님께 마음을 말로 많이 표현하세요. 얼마나 말이 없으시면 마님께서 영주님이 자길 안 사랑한다고 착각하시는지.”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이 쿡 찔린 듯했다.

알테어가 쉽게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이 길어지자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역시 쓰러진 ‘나’를 끌어안았던 알테어의 시선이 그렇게 애절했던 것도 사랑까지는 아니었던 거고…….


“난…….”

알테어가 입을 떼 머릿속의 생각이 뚝 끊겼다.


“나는…….”

알테어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블란과 카인을 힐끗대다 겨우 입을 뗐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다.”

“…….”

“…….”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는지 블란과 카인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니까…… 영주님이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결혼하신 건 저희도 다 알거든요?”

“에일스포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

“다들 괜히 첫날밤은 괜찮으실까 걱정했던 게 아니라니까요.”

“뜬금없이 왜 그걸 자랑하시는 건지…….”

블란과 카인이 두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의 의구심 가득한 시선에 알테어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내 말은, 그러니까, 잘 모르겠다는 거야. 애초에 사랑이라는 게 뭔지 관심도 없었고, 그런 걸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으니까.”

알테어가 찡그린 얼굴로 제 머리를 헤집었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그렇게 잃고, 친척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서 뭘 뺏어 갈까 궁리했지. 난 그저 지키는 데 급급했어. 다른 감정이나 생각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고. 결혼 역시 영지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으니까…… 당연히 일반적이고 평범한 부부는 아닐 거라고…….”

횡설수설하는 알테어를 쳐다보는 블란과 카인의 시선이 묘해졌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알테어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적이고 평범하다는 건…… 내게 아주 큰 가치야. 에일스포드의 영주가 된 후로 일반적이지도 않고 평범하지도 않은 길만 걸어왔으니까. 절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라는 뜻이야. 하지만 나와 나디아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부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알테어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의 두 눈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가득 서려 까마귀 산에 시체를 던지러 가겠다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변화가 나를 떠올리며 일어난 거라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알테어는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가 생각하는 마음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했으니까.

그렇다면 그 감정에는 분명한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아니, 그런 눈빛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읍!”

블란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는 카인의 입을 틀어막으며 빙긋 웃었다.


“마님 앞에서도 딱 그 정도만 말씀하시면 좋을 텐데요.”

“……절대 못 해. 이런 한심한 소리는.”

알테어가 스스로가 질린다는 듯 한숨에 가까운 긴 숨을 내뱉었다.


“한심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

“……와. 중증.”

카인이 블란의 손을 밀어내며 혀를 찼고, 나는 몸이 없는데도 얼굴이 뜨끈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주먹을 꽉 쥐었다.

알테어는 내 앞에서 절대 말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들어 버렸고,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절대 한심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나 역시도 모든 게 처음이고 낯설어서, 알테어의 모든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그런데 여기서 계속…….”

민망한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였는지 알테어가 헛기침하며 걸음을 옮겼다.

정확히 내가 있는 방향이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알테어를 보며 어깨를 움츠리자마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저었다.


“확실히 아무도 없는데. 왜 계속 익숙한 기척이 느껴지는 거지.”

알테어의 손이 내 몸을 휙 통과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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