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차마 가까이 못 가겠어.
(147/170)
147화. 차마 가까이 못 가겠어.
(147/170)
147화. 차마 가까이 못 가겠어.
2022.10.30.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어어……?’
마치 내 몸이 알테어의 손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그런가 싶어 그의 손이 스쳐 간 곳을 슥슥 문질러 보았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알테어도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허공에서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지나가는 공기라도 붙잡아 보려는 것일까?
“왜 그러십니까?”
알테어의 기이한 행동에 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으로 다가왔다.
“넌 기척이 안 느껴지나?”
“전 아무것도요.”
알테어의 질문에 카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영주님은 저보다 훨씬 감각이 예민하시니, 제가 못 잡아내는 걸 잘 찾아내실 때가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카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알테어가 손을 휘저었던 곳, 그러니까, 내가 선 곳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럴 리 없는데도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라 괜히 어깨가 움찔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데요? 알고 보니 유령이라도 보신 거라든가!”
카인이 유쾌한 농담을 하듯 웃으며 말했다.
‘맞아. 정답이야. 유령이 여기 있답니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는다더니.
정확히 정답이 튀어나와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알테어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카인의 다리를 걷어찼다.
이제는 걷어차이는 것도 익숙한지 카인이 실없이 웃고 있으니 블란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영주님. 슬슬 가 보셔야 하는 시간 아닙니까.”
“아. 그렇지.”
‘어디를?’이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알테어는 구멍 뚫린 블란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들었다.
알테어가 품 안에서 검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내가 선물한 그 시계였다.
‘헤헤. 잘 쓰고 있구나.’
따로 티 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자연스럽게 꺼내 쓰는 모습을 보니 제법 손에 익은 듯해 선물한 사람으로서 뿌듯했다.
알테어는 한참을 매만지던 회중시계를 다시 소중하게 품 안에 넣으며 블란과 카인에게 명령했다.
“그럼 쥐새끼 처리는 너희 둘에게 맡기도록 하지. 마무리 정도는 제대로 해라. 황실과의 문제는 내가 정리할 테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 주십시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블란은 살짝 고개 숙여, 카인은 장난스럽게 경례하며 상관의 명령을 받들었다.
조금 전까지 잔뜩 풀이 죽어 있더니 어느새 회복한 모습이었다.
알테어는 두 사람에게 대충 손을 저어 어서 가 보라는 듯 신호를 보낸 뒤 다소 급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얼른 그에게 따라붙었다.
평소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유령이 된 덕분에 알테어와 나란히 속도를 맞춰 걷는 게 가능했다.
둥둥 떠다니는 탓에 눈높이도 평소와 달랐다.
늘 조금 뒤에서 알테어를 올려다보다가 나란히 선 채로 동등한 시야에서 쳐다보니 같은 얼굴인데도 분위기가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늘 위압적인 기세를 뿜어낸다고 생각했는데. 나란히 눈높이를 맞추고 보니 알테어도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체격이 지나치게 건장한가 싶긴 하지만.’
어쩐지 즐거운 기분에 키득대며 알테어의 옆을 둥둥 떠다니다 보니 어느새 그의 걸음이 멈췄다.
알테어는 익숙한 듯 문을 열고 들어갔고, 나도 그 뒤를 졸졸 따라 들어갔다.
아늑하게 꾸며진 방의 중앙에는 작은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둔 의자에 앉은 안나가 꾸벅대며 졸고 있었다.
작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아기.’
누워 있는 아이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는데도 침대에 누운 아이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 느껴졌다.
머뭇대며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나와 달리 알테어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아이를 안아 들었다.
“우으에…….”
“아가씨!”
칭얼대는 아이의 울음에 졸고 있던 안나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아이를 안고 있는 알테어를 보고 안심한 듯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졸고 있던데.”
“죄송해요. 아가씨께서 좀처럼 안 주무셔서 한참 달래다가…….”
“혼내려는 게 아냐.”
안나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자 알테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 너와 마리가 고생하고 있는 건 안다. 잠깐 쉬고 와.”
“아니에요! 저는 끄떡없어요! 아가씨 옆에 있을래요!”
안나가 말과는 전혀 다른 퀭한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의욕은 대단했지만 거짓말로도 끄떡없는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 너한테 맡길 테니 잠깐 쉬고 오라고. 두 시간 주지. 나도 이 녀석과 둘만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까.”
“……네.”
알테어의 설득에 안나가 머뭇대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섰다.
완전히 떠나기 전, 살짝 열린 문틈으로 한마디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주님은 친절하세요! 말은 좀 툴툴대시지만요!”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안나는 후다닥 문을 닫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뭐라는 거야.”
알테어는 굳게 닫힌 문을 잠시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칭얼대는 아기를 토닥였다.
커다란 알테어의 품에 안기니 그렇지 않아도 작은 아기가 더 작게 보였다.
알테어도 작은 아기를 다루는 게 조심스러운지 움직일 때마다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제대로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지금보단 훨씬 컸겠지.’
평범하게 열 달을 품고 있다가, 평범하게 출산했다면, 평범하게 축복받으며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을 텐데.
일찍 태어나 몸도 약한 아이가 엄마가 몸져누워 있어 제대로 귀염도 받지 못하고 이렇게 쓸쓸하게 있다니.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아서 차마 아이를 가까이에서 볼 용기가 안 났다.
여태까지 발걸음도 못 하고 애써 생각에서 지워 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제대로 아이를 못 지켰다.
조금 더 엄마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이 아이를 너무 일찍 세상에 내보냈다.
알테어의 간지러운 진심을 듣고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땅으로 쿵 처박혔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죄인이 맞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이가 궁금해서 나는 고개만 쭉 빼고 알테어에게 안겨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알테어의 품이 익숙한 건지 침대에서 칭얼대던 아이는 편안한 얼굴로 아빠의 품에 쏙 안겨 있었다.
“……내 딸.”
알테어가 조심스럽게 아이를 불렀다.
돌아오는 건 쌕쌕대는 숨소리가 전부였지만 알테어는 그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직 이름을 못 지어 줘서 미안하다. 네 엄마가 깨어나면…… 그때 제대로 지어 줄 테니까.”
알테어의 손끝에서 작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기운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아이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알테어는 기운이 흘러드는 과정을 유심히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네 엄마가 날 기억 못 해. 너도 기억을 못 하고. 그래도 차라리 덜덜 떨면서 내가 누구냐고 하던 때가 나았어. 다시 누워만 있는 걸 보니…….”
알테어가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래도 걱정 마라. 내 가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거니까. 예전에는 그럴 수가 없었거든.”
아이에게 말하기 때문인지 알테어의 말투가 평소보다 더 조곤조곤했다.
저런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는 털어놓지도 못하고, 제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아이 앞에서야 조심스럽게 꺼내 보이는 알테어의 모습이 짠해서 가슴이 쿡쿡 아렸다.
저 사람은 모두의 앞에서 강한 모습으로만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순간도 편히 있을 수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엄마가 어떡하면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 너는 알겠어? 응?”
한 번 말을 꺼내고 나니 걱정을 털어놓는 게 편해졌는지 알테어가 아이에게 물었다.
당연히 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을 거다.
그런데 그 질문을 들은 아이가 마치 제게 뭔가 묻는다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팔을 휘저으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으에…… 우에엥……!”
갑자기 아이가 몸을 움직이자 알테어가 아이에게 전해 주던 기운을 서둘러 흩어 버렸다.
혹시 기운을 전달하다 문제가 생긴 걸까?
아이가 힘도 없는 몸으로 버둥대니 무슨 큰일이 난 건가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미안함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맴돌던 것도 잊고 얼른 아이 옆으로 날아갔다.
아이의 안색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혈색이 돌아 보기 좋았다.
잠시 불편했을 뿐인지 칭얼거림도 금세 멈췄고.
‘다, 다행이다.’
큰 문제는 아니었나 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었다.
알테어가 사방으로 흩어 버린 기운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눈앞에 알테어의 오러가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이리저리 부유하던 기운이 반투명한 내 몸 가까이 다가왔다.
알테어의 손길이 그랬던 것처럼 당연히 내 몸을 스쳐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기운이 그대로 내 몸으로 흡수됐다.
‘어……?’
나는 당황해서 기운이 흡수된 자리를 쳐다보았다.
육안으로 식별되는 차이는 없었지만 분명히 내 몸이 흡수했다!
날 지나쳐 가는 기운을 보지 못했으니 확실했다.
‘도대체 뭐지?’
게다가 기운을 흡수하고 묘하게 힘이 생긴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기분 탓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알테어와 눈이 마주쳤다.
물론 눈이 마주쳤다는 건 내 착각이겠지만…….
알테어의 시선이 내가 선 곳에 꽂혀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기운이 왜 사라졌지……?”
알테어가 아이를 안지 않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알테어의 손 주위로 그가 흩어 버렸던 기운들이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알테어가 오러를 흩어 버리기 전보다 크기가 조금 작아진 상태였다.
내 몸이 흡수해 버린 만큼의 크기가 줄어든 거다.
‘뭐, 뭐지?’
내가 알테어의 기운을 뺏어 버린 거야?
그렇지 않아도 알테어는 아이에게 오러를 나눠 주느라 고생인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내가 그걸 뺏기나 하고!
‘도, 돌려줄 방법이 없을까?’
나는 허둥대며 알테어에게 손을 뻗었다.
원래 알테어의 오러니까, 이렇게 닿으면 다시 그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반투명한 손이 알테어의 몸에 닿자마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
“……!”
알테어도 나도 화들짝 놀랐다.
반투명한 손이 알테어를 통과하지 않았다. 미약하지만 알테어가 분명히 만져졌다.
‘조, 조금 힘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착각이 아니었나?’
정말로 힘이 생긴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묘수가 번뜩 떠올랐다.
다시 ‘나디아의 몸’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했을 때.
어떤 보호막이 ‘나디아의 몸’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저항이 느껴져 계속 튕겨 나가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힘이 생긴 상태라면, 그 저항을 뚫고 몸에 다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 근거 있는 희망이었다.
물론 ‘나디아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저항은 매우 강했다.
그만큼 큰 힘이 필요할 것이다.
그 방법을 시도하려면 당연히 알테어의 도움이 필요했다.
‘목소리는 전달이 안 되는 상태니까, 편지라도 써서 상황을 알려야 하나?’
그러려면 펜을 움직일 정도의 힘이 있어야 하는데, 시험 삼아 아이의 침대에 깔린 이불을 움직여 보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 사물을 움직일 정도의 힘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걸 어쩐다…….’
고민이 길어지는 와중에 굳어 있던 알테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나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