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악연은 여기까지겠지.
(148/170)
148화. 악연은 여기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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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악연은 여기까지겠지.
2022.11.02.
분명하게 날 부르는 목소리였다.
‘헙!’
나는 몰래 지켜보던 것을 들킨 사람처럼 놀라서, 아니, 실제로는 몰래 지켜보던 것이 맞지만…….
아무튼 깜짝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소리 지른대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지만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알테어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이나 내가 있는 자리를 쳐다보다 그런 제 모습이 우습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없지. 나도 제정신이 아니군.”
당연하겠지만, 알테어는 죽지도 않은 아내의 유령(?)이 주위를 맴도는 걸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그게 평범한 반응이었다.
특히 알테어처럼 현실적인 사람은 유령이니 영혼이니 하는 걸 더 안 믿을 것 같으니까.
몰래 지켜보던 걸 안 들켜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게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알테어는 아이가 칭얼대어 잠시 중단했던 오러 전달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이렇게 넘어가면 앞으로는 도움을 청하기 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내 존재를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미약하지만 접촉이 가능한 거 같으니 옆구리를 마구 찔러 봐?’
그럴듯한 생각 같았지만 난 금세 고개를 저었다.
‘오러를 전달하는 건 섬세한 작업이랬어. 괜히 건드렸다가 문제가 생기면 안 돼.’
우선은 오러 전달이 끝나길 기다리자는 결론을 내리고 나는 알테어와 아이의 주위를 둥둥 떠다녔다.
알테어는 아이가 칭얼댔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오러를 전해 주는 내내 작게 허밍 하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에일스포드의 축제에서 사람들이 노래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들었던 것과 멜로디가 비슷했다.
물론 자연스럽게 노래 부르던 사람들에 비해 알테어의 허밍은 어딘가 딱딱하고 어색한 구석이 있었지만 말이다.
허밍에서도 묘하게 씩씩함이 느껴진다는 점이 또 알테어다워서 신기했다.
키득대며 알테어의 허밍을 감상하는 동안 오러 전달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나는 알테어가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기만을 기다렸다가 숨을 크게 들이켜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 손이 알테어에게 닿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영주님! 여기 계시다고 들었어요!”
거칠게 문이 열리기에 안나가 들이닥쳤나 했더니, 생각지도 못하게 마리가 다급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 다른 마리의 모습에 뭔가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는지 알테어의 표정이 단번에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지?”
“그…… 마님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져서…….”
“…….”
알테어가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놀라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왜? 난 이렇게 멀쩡하게 있는데……!’
영혼이 이렇게 멀쩡하면 뭐 하나. 돌아갈 몸이 죽어 버리면 모든 게 끝이었다.
“……우선 가지.”
“네!”
알테어와 마리가 다급하게 걸음을 옮겨 내 방으로 향했다.
나도 얼른 벽을 통과해 누구보다 빨리 내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나는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그 앞을 지키고 열심히 처치하는 리온의 안색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안타까움에 내 몸 주위를 빙빙 돌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몸에 뛰어드는 것도 시도해 봤지만 역시나 맥없이 튕겨날 뿐이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튕겨내는 힘이 약해진 것처럼 느껴진다는 게 희망적이었지만…….
‘이래서야 내가 힘을 키우기도 전에 몸이 죽어 버리겠어!’
곤란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어느새 도착한 알테어가 리온에게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의식은 없지만 상태는 안정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의식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로 몸 상태가 괜찮아져서 오히려 이상하다고까지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가끔 잘 만들어진 공예품에서 부품이 하나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리온이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힘없이 늘어진 날 힐끗댔다.
“분명 의학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상황인데 상태가 이렇게 급변하니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라고요…….’
영혼의 일부가 뚝 떨어져 나온다는 건 나 역시 듣도 보도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까지는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제안 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만.”
“제안?”
리온의 말에 알테어는 물론이고 나까지 솔깃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뒤에 이어질 말이 ‘손쓸 방도가 없습니다’라는 부정적인 말일 줄 알았는데, ‘제안 드리고 싶은 게 있다’라는 말에서는 다소 긍정적인 사인이 느껴졌다.
“예. 내키지 않으실 수도 있겠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뭐든 희망을 걸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의해. 무슨 제안이길래 이렇게 조심스럽지?”
“뭐…… 의학을 공부한 의사가 할 만한 제안이 아니라서…… 영주님 같은 분이 반기지 않을 말이기도 하고요.”
리온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제가 원래 지내던 마을에 비슷한 일을 겪은 아이가 있었는데, 거의 죽을 뻔한 걸 살려 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아니라…… 주술사가요.”
“주술사……?”
“예. 아무래도 그쪽은 시골이다 보니 고대적부터 내려오는 신앙이 남아 있어서요. 산속에 뛰어난 주술사가 산다는 말을 듣고 그 애 부모가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우연이었는지, 정말로 그 주술사가 영험했던 건지, 의식을 치른 뒤에 애가 나아졌고요.”
주술사라니.
늘 현실적인 지식에 근거해 상황을 해결하는 리온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도 얼마나 상황이 답답하면 이런 제안까지 하나 싶었다.
‘게다가 지금 내 상황을 생각하면 의외로 돌파구가 될지도 몰라.’
주술사들은 영적인 눈이 트여 있다고들 한다.
사람들은 그 점을 불길하고 두렵게 여겨 고대의 신앙을 배척했다.
현실과 맞닿은 지식이 발전하면서부터는 그들을 단순한 거짓말쟁이로 치부하는 자들도 많아졌고 말이다.
특히 귀족들은 고대의 민간 신앙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언급하는 것조차 꺼려 했다.
만약 주술사가 바인 저택에 드나들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돈다면 ‘바인 가문이 누군가를 저주하려고 한다!’라는 둥의 소문이 퍼질 게 분명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고대의 신앙이 가지는 이미지가 딱 그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주술사라니…….”
귀족가에 오래 몸담은 마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표정이 어두웠다.
알테어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귀족인 그가 리온의 제안을 듣고 기분 상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리온도 가라앉은 분위기를 읽은 건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저도 제안 드리기 쉽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그만. 됐다.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도록 하지.”
알테어가 손을 들어 길어지려는 리온의 이야기를 잘라냈다.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계속 생기고 있으니 뭐든 의지해 봐야겠지. 그게 나디아의 목숨을 살리는 길이 된다면 어떤 것이든.”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리온이 눈을 크게 떴다.
먼저 제안하긴 했지만 알테어가 허락할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모양이었다.
“정말로 주술사를 부르시겠다고요?”
“그러자고 제안한 거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저택에 주술사를 들이는 걸 허락하실 줄은 몰라서.”
“허락하고 말고 할 게 있나? 어차피 여긴 내 저택도 아냐. 주인은 후작인 나디아지. 주인을 살리기 위해서인데 내가 뭐라고 그러지 말라고 해.”
덤덤한 말에 리온이 의외라는 듯 눈을 껌뻑였다.
보통 남편들은 아내가 더 높은 지위에 있으면 주눅이 들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아예 언급하는 걸 꺼린다.
주위에서도 아내보다 못한 남편이라며 수군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알테어는 언제나 내 아내가 후작이고 난 남작인 게 뭐가 대수냐는 듯 굴었다.
“남작께선 부인이 후작인 게 전혀 불편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왜 그게 불편하지?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 아닌가?”
그럴듯하게 이미지 관리를 하겠다고 꾸며 내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 가득 담긴 말투였다.
이건 단순히 이해심이 많다거나 ‘아내 것도 내 것이니까’라는 생각을 해서 보일 수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스스로가 단단한 사람이어야 이런 태도가 나올 수 있었다.
내가 늘 닮고 싶은, 중심이 곧고 단단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알테어를 바라보는 리온과 마리의 눈에 호의가 서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제대로 눈을 뜨고 있었다면 똑같은 눈빛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알테어는 그들의 눈빛을 깨닫지도 못하고 다른 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하지만 주술사가 드나들었다는 건 숨겨야 해. 그 영험하다는 주술사가 어디 있지? 믿을 만한 놈들을 보내 은밀히 데려오라고 하지.”
알테어는 턱을 매만지며 벌써 주술사를 데려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리와 리온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웃음을 흘렸다.
“……?”
중얼거리며 계획을 세우던 알테어만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을 뿐이다.
“흠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술사의 행방은 예전에 제가 살던 마을에 사람을 보내면 그쪽에서 잘 알려 줄 겁니다.”
“서두르도록 하지. 언제 또 나디아의 상태가 악화될지 모르니까.”
기대감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주술사라는 존재가 가진 힘이 거짓이 아니라면 알테어에게 내 이야기를 전해 힘을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물론 그렇게 힘을 받을 필요도 없이 주술사가 날 다시 몸 안에 집어넣어 줄지도 몰라.’
다소 비현실적인 희망이었지만, 애초에 내가 책 속의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 창가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부리로 창을 톡톡 두드렸다.
지나가는 새가 아니라 알테어가 기사들과 서신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전령새였다.
‘에일스포드에서 서신이 온 건가?’
나는 서신을 확인하기 위해 창가로 다가가는 알테어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알테어는 능숙하게 새의 다리에 돌돌 말린 채 묶여 있는 쪽지를 풀어냈다.
새가 가져온 쪽지에는 긴 이야기가 적혀 있지 않았다.
보고. 까마귀산. 명령 이행. 아직 죽진 않았습니다.
블란의 글씨였다.
블란과 카인이 어떤 명령을 받고 까마귀산에 갔는지 알고 있었던 터라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직 죽진 않았다’라는 말이 죽었다는 말보다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산에 던져져 날아드는 까마귀들에게 살을 파먹히면서…… 서서히 죽음을…….
‘으으.’
상상하기만 해도 끔찍했다.
숙부와 나, 둘 중 하나가 사라지기 전에는 절대 멈추지 않을 대립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결말이 날 줄은 몰랐다.
알테어가 없었다면 저런 식으로 사라지는 게 내 쪽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몸이 싸늘해졌다.
“……더 고통스럽게 죽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알테어는 그렇게 숙부를 보낸 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지 싸늘하게 중얼거리다 오러를 사용해 쪽지를 태워 버렸다.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쪽지가 마치 숙부의 삶을 보여 주는 듯했다.
아바르 바인. 내 숙부와의 악연은 여기까지겠지.
무거운 짐을 털어 낸 듯 시원하면서도 누군가를 벼랑에서 떠밀었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소설 속의 알테어도 수많은 적을 밀어내며 늘 마음이 무거웠겠지?
악당의 편에 선 그의 심정에 대해서는 잘 묘사가 되지 않았었지만, 알테어처럼 적을 해치우는 자리에 서고 보니 읽지도 않은 그의 마음을 잘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소설 속에서 보지 못했던 알테어의 마음을 더 알아가고 싶어.’
그러니까 우선은 몸을 찾는 것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