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이야기를 뒤틀리게 한 자.
(149/170)
149화. 이야기를 뒤틀리게 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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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이야기를 뒤틀리게 한 자.
2022.11.06.
“미친놈들 같으니!”
아바르 바인은 포박당한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필사적으로 욕설을 쏟아 댔다.
물론 건장한 기사들이 보기에는 그다지 필사적이지도 못한 움직임이었다.
나디아를 해치려다 잡힌 이후 그는 어두운 방 안에 감금되어 제대로 먹고 자지도 못했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물을 줘서 살겠다는 욕망에 그걸 허겁지겁 들이켰던 기억만 났다.
굴욕스러웠지만 살겠다는 본능이 더 앞서서 앞뒤 가릴 것도 없었다.
게다가 나름의 확신도 있었다.
이놈들이 자길 함부로 죽이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었다.
“이따위로 굴면 너희도 무사하지 못해! 멍청한 놈들!”
아바르 바인은 황제의 죄수였다.
처벌을 내리는 것도 황제의 몫이지, 이처럼 사적으로 처벌하는 건 황명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나디아가 명망 깊은 바인 후작이고, 그 계집의 남편이 떠오르는 신성 에일스포드 남작이라도 황제보다 높은 자리에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감옥에 끌려가는 건 막막했지만 아무리 약 올려도 이들이 자신을 죽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에 자신이 승자가 된 기분을 만끽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따위 미친 짓을 벌이다니!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산에 내던져질 때만 해도 겁을 주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웃음을 치며 어디 한번 죽여 보라고, 네 주인이 반역죄로 같이 목이 잘릴 거라고 여유를 부렸었는데.
뻣뻣하게 자리를 지키고 선 기사들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태평하게 저녁 메뉴를 논의하고 있었다.
“오늘 고기는 좀 그렇겠네. 생선으로 준비해 달라고 할까.”
“이런 게 하루 이틀이야? 그냥 주는 걸로 먹어.”
카인과 블란의 대화에 아바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친놈들!’
시체가 널린 이곳에서 먹는 이야기가 나오다니!
주위를 쳐다보기만 해도 먹지도 않은 걸 죄다 게워 낼 판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아바르에게는 그들의 대화에 열을 낼 여유조차 없었다.
“아악! 꺼져! 이놈의 까마귀들!”
신선하게 팔딱대는 먹잇감을 발견한 까마귀들이 하나둘 아바르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고 악을 쓰며 새들을 쫓아내려고 애썼다.
처음에는 그게 통했는지 새들이 머뭇대며 그의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새들도 그가 힘없이 포박당한 상태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매섭게 그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뾰족하고 단단한 부리가 몸 곳곳을 쪼아대서 피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자, 그 냄새에 더 많은 새들이 몰려들었다.
“악! 으윽! 으…….”
새가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악을 써대던 아바르의 입에서 나오던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런 꼴이…….’
아바르 바인은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정신 사이로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는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원래 가지지 못할 것이었기에, 그것을 갖기 위해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했지만, 결국 그는 원하는 걸 얻었다.
달콤한 승리의 맛. 아늑한 승자의 자리.
모두가 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끝내 얻어 낸 것이었기에 무엇보다 달콤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리 허무하게 잃다니.
내가 어떤 짓을 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입 밖으로 외침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아바르의 몸은 먹잇감을 노리고 몰려든 새로 뒤덮여 형체를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더 지켜봐야 하려나?”
카인이 길게 하품하며 블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블란은 알테어에게 보낼 쪽지를 써 새에게 들려 보낸 참이었다.
그는 새로 뒤덮인 아바르 바인을 쳐다보았다.
새 무리 아래로 삐죽 나온 발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보면 아직 죽진 않은 거겠지만, 살아남을 길은 없을 테다.
그래도…….
“끝까지, 제대로 지켜보지. 한 번 죽었다 살아난 놈이잖아.”
블란의 차분한 말에 카인도 아바르 바인을 던져 둔 쪽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우리 영주님이었다면 끝까지 지켜보고, 목을 잘라 확인 사살까지 하셨을 테지.”
“그래. 우린 그분을 대신해 온 거니까.”
까악까악.
배부른 까마귀들은 목청 높여 울며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먼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은 그림자도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
“영주님. 도착했습니다.”
마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알테어를 찾았다.
알테어가 벌써 발 빠른 기사들을 보내 주술사를 데려온 거다.
“그…… 후작님께 데려가기 전에 영주님께서 먼저 만나 보셔야겠죠?”
“그래야지.”
주술사라는 불길하고 음침한 존재를 만난다는 생각에 얼어붙은 마리와 달리 알테어는 덤덤했다.
나 역시 마리처럼 살짝 긴장됐다.
정말 주술사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우선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
마리의 이야기에 알테어가 일어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둥둥 그 뒤를 따랐다.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알테어의 걸음은 다소 급했다.
물론 나는 지금 유령 상태라 가볍게 알테어의 걸음에 속도를 맞출 수 있었지만 말이다.
유령이 되어 좋은 유일한 점이라고나 할까?
알테어가 응접실 문을 열자 후드를 깊게 눌러 쓴 검은 로브 차림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주술사에 대한 편견 탓에 왜소한 체격의 노파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자리에 앉은 사람은 의외로 체격이 건장했다.
온몸을 로브로 감싸고 있는데도 건장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쪽이 주술사라고?”
알테어의 질문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후드를 벗었다.
과묵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별다른 대답 없이 알테어의 모습을 천천히 살피더니, 과묵한 얼굴 그대로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떤 이유로 절 찾으셨는지는 들었습니다. 몸에는 큰 문제가 없는데 부인께서 깨어나질 못하신다고요.”
“그래. 비슷한 일을 해결한 적이 있다던데.”
“비슷한 상황은 아닐 겁니다. 물론 ‘평범한 분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남자가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알테어의 얼굴을 쳐다보던 눈길이 그의 등 뒤를 향했다.
그러니까, 내가 둥둥 떠 있는 곳이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물론 알테어와도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지만, 그때보다 더 확실한 느낌이었다.
남자는 분명하게 날 보고 있었다.
알테어도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텅 빈 공간만 보였을 테지만 말이다.
“신기하군요.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남자가 알테어의 존재를 잊기라도 한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알테어를 스쳐 지나가 내 앞에 서기까지 하는 남자를 보니 그가 확실히 내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가 보이나요? 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남자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럴 때마다 남자의 시선도 나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이 사람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커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경우라는 건…….”
하지만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알테어는 남자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완전히 늦추지 않은 모양새였다.
남자는 그런 의심과 경계가 익숙하다는 듯 알테어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내 움직임에만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보통은 영혼 전체가 떨어져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건 일부로군요.”
“……일부?”
“예. 당신 정도의 기운을 가진 사람이라면 느꼈을 텐데요. 주변을 떠도는 기척의 존재를.”
“……!”
정확한 말에 알테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몇 번이나 ‘익숙한 기척이 느껴진다’라며 의아해했던 것을 나도 보았다.
“영혼의 일부만 떨어져 나오다니. 몸에 남은 쪽의 영혼도 성하진 않겠군요. 빨리 손쓰지 않으면 양쪽 모두 점점 약해지다 소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멸한다고?”
“예. 이 세상은 자정 능력을 갖추고 있거든요. 온전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없애지요. 그게 신께서 만든 세계의 섭리입니다.”
“글쎄. 나는 신이니 세계의 섭리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예. 그런 분으로 보이십니다. 세상이 어떻든 흔들리지 않고 본인의 길이 있는 분이지요.”
내 움직임을 따라오던 남자의 시선이 이번에는 알테어를 향했다.
내면까지 읽어 내릴 듯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부담스럽지도 않은지 알테어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까딱였다.
“내가 궁금한 건 하나뿐이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겠나? 사례는 분명히 하지.”
표정은 딱딱했지만, 주술사를 향해 묻는 알테어의 목소리에 담겼던 경계심이 다소 희미해져 있었다.
그러나 남자에게서 돌아온 답은 그리 시원하지 않았다.
“그걸 정하는 건 제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정하지?”
“신께서 정하시죠.”
남자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제 역할은 신께 의사를 묻는 것 정도입니다.”
“……그리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니군.”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전 누구에게도 절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중개자일 뿐이니.”
남자는 차분하게 대답하고는 품에서 작은 돌을 꺼냈다.
평범한 조약돌처럼 보였는데, 기이하게도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우선 만남을 주선해 보지요.”
‘만남?’
의미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남자가 중얼거리듯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어……?’
반투명한 몸이 조금씩 돌을 향해 끌려갔다.
갑작스러운 힘에 깜짝 놀라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지만,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부유물처럼 흐름에 거스를 수가 없었다.
‘어어어……!’
한번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니 순식간이었다.
나는 그대로 작은 돌 속으로 빨려 들어가 어둠 속으로 뚝 떨어졌다.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고 서늘한 공간이었다.
나는 묘한 두려움에 몸을 떨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사방이 어둠에 물들어 눈으로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었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하지만 혼란스러움이 커질 무렵.
[이렇게 만나는군.]
공간에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 이야기를 뒤틀리게 한 자.]
***
어느 순간 남자의 주문이 뚝 끊어졌다.
동시에 알테어의 주위를 익숙하게 맴돌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뭐지?’
알테어는 이유 모를 오싹함을 느끼며 주술사가 쥔 돌을 쳐다보았다.
돌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알테어는 주술사를 만나자마자 그가 악한 일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에게서 오랫동안 수련한 듯한 정제되고 맑은 기운이 느껴진 탓이었다.
이런 기운을 가지는 건 쉽지 않았다. 평생을 청렴하게 수련해 온 구도자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이 잘못되었던 걸까?
남자는 자리에 우뚝 선 알테어의 손에 자신이 들고 있던 조약돌을 건네주었다.
서늘하게만 보였던 돌에 미미한 온기가 느껴져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자 남자가 처음으로 빙긋 웃으며 그에게 조언했다.
“미약한 영혼이니 든든한 지지자가 필요할 겁니다. 가련한 영혼이 신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도록 힘을 빌려 주시는 게 어떨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굳이 수수께끼를 풀어낼 필요도 없었다.
알테어가 가볍게 돌을 쥐자마자 엄청난 힘이 그의 오러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
이 작은 돌 안에서, 거대한 힘이 휘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