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항상 반짝거렸으면 좋겠어요.
(151/170)
151화. 항상 반짝거렸으면 좋겠어요.
(151/170)
151화. 항상 반짝거렸으면 좋겠어요.
2022.11.13.
“이제 다 알아보시는 거죠?”
알테어의 품에 안겨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테어를 향해 누구냐고 물었던 때를 떠올리며 자길 알아보는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비롯한 방 안의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응. 다 알아보지.”
“다행이다…… 전 또 못 알아보실까 봐…….”
안나가 안도했다는 듯 활짝 웃다가 곧 눈물을 글썽였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말은 안 해도 마음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장 마음고생이 심했던 건 역시…….
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날 끌어안고 있는 알테어의 머리통을 쳐다보았다.
잠시라도 날 놓았다간 영영 잃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절박함이 느껴져 가슴이 간질거렸다.
“크흠.”
보다 못한 리온이 일부러 크게 헛기침 소리를 냈지만 알테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민망해져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뭐…… 두 분만의 시간이 필요하시겠죠. 정확한 진찰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결국 리온이 포기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짓해 함께 자리를 비워 주었다.
순식간에 찾아온 고요함에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알테어의 등을 토닥였다.
내 손길에 잊고 있던 현실감이 느껴진 건지 알테어가 움찔했다.
“나 이제 정말 괜찮아요.”
“……항상 그렇게 말하지만 늘 안 괜찮았지.”
“그야…….”
“이상한 일을 겪었어. 당신이 하도 눈을 못 떠서 뭐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주술사를 불렀는데…….”
찔리는 구석이 많아서 헤헤 웃으며 대충 말끝을 흐리자 알테어가 한숨을 푹 내쉬어 목덜미를 간질였다.
“난 당신이 그대로 사라진 줄 알았어.”
“어어…….”
알테어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누가 부르기도 전에 다급하게 달려온 거였구나.’
“나 정말로 괜찮아요! 아직 완벽하게 해결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제대로 협상하고 왔으니까…….”
“협상?”
알테어가 내게서 살짝 떨어지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눈에 의문이 가득해서 나는 돌 안으로 빨려 들어가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내가 전에 말했었죠? 난 이 세계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고. 사실 난 당신 손에 죽을 운명이었고, 당신도 죽는 이야기였다고요.”
“그랬지.”
“그래서 문제가 좀 생겼대요. 그…… 태어나지 않아야 할 생명이 태어나서…….”
침착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테어의 두 눈이 살짝 커지는 게 느껴졌다.
누구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알테어도 당연히 ‘태어나지 않아야 할 생명’이 누굴 가리키는지 알아차린 거다.
후사 없이 죽어야 했던 나와 알테어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의 아이 말이다.
“그래서 그걸 경고하려고 신이 날 불러낸 거였어요. 아이를 없애야 한다고…… 그럼 난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막막함이 되살아나 입술을 질끈 깨물자 알테어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그게 아주 큰 위로가 됐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라 내가 다른 방법을 제안했어요. 신도 우선 지켜보겠다고 임시로 날 돌려보내 준 거고요.”
“임시?”
차분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던 알테어의 손이 굳었다.
“그럼 당신이 다시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건가?”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렇겠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잖아요. 그렇죠?”
헤헤 웃으며 알테어를 쳐다보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입매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그래. 뭐든 할 거야. 당신이 무사하도록.”
“알아요. 나도, 아이도, 반드시 지켜 준다고 했잖아요. 알테어는 스스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니까.”
“그래. 난 반드시 당신과 아이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하던 알테어가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는 듯 멈칫했다.
“……내가 당신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있었던가?”
“네?”
“아니. 당신은 아이를 낳은 후 줄곧 의식이 없었잖아. 그런 이야기를 한 건 혼자 아이를 돌볼 때뿐이었는데.”
“어…… 그, 그건…….”
알테어의 추궁에 식은땀이 맺혔다.
유령이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때였으니 알테어는 내가 거기 있었다는 것도, 그가 했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는 것도 몰랐을 거다.
‘당신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런 거 저런 거 다 봤다!’라는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어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고 있으니 그의 얼굴이 다소 창백해졌다.
“설마…… 그…… 의식을 잃었던 사이에…… 단순히 의식을 잃었던 게 아니라…….”
알테어답지 않게 더듬대며 말이 이어졌다.
“혹시 그럼, 그, 내가 떠든 이야기도 전부…….”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늘 따라다닌 것도 아니고요!”
“…….”
재빨리 변명했지만 그게 오히려 알테어에게 확신을 준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알테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 난 한심하다고 생각 안 해요.”
그러자 알테어가 가만히 날 쳐다보았다.
“알테어가 하는 고민이나 품고 있는 망설임이 한심하다는 생각,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앞으로도 없을 거고요. 그건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는 것들이잖아요.”
“……내가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아닌가요?”
알테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눈을 껌뻑이며 물으니 그가 살짝 찡그린 얼굴로 제 머리를 헤집었다.
“내가 당신 숙부를 어찌 처리하라 했는지 알잖아. 평범한 인간은 그렇게까지 안 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난 그렇게 하기로 했어. 무자비하고 뒤틀린 인간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런 인간 곁에 있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해.”
“그걸 걱정하고 있었어요?”
알테어는 상당히 심각하게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나로서는 의아할 뿐이었다.
“내가 읽었던 이야기 속의 당신은 엄청난 악당이었어요. 애초에 내가 그걸 불편하게 여겼다면, 당신을 사랑하게 되지도 않았을 거라고요.”
“……어?”
“난 알테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알테어의 모습을 잘 파악하고 있어요. 어떻게 그리 잔인한 짓을 하느냐고, 이제 와서 벌벌 떨며 거리를 둘 거였다면 애를 낳을 생각도…….”
“아니,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말을 이으니 알테어가 손을 들어 다급하게 내 이야기를 끊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어…… 당신이 악당인 거 안다고 했죠.”
“그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다고 한 거요?”
“그…….”
눈을 껌뻑이며 태연하게 묻자 알테어가 할 말을 잊은 듯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스르르 힘없이 손이 아래로 툭 떨어지자 붉게 달아오른 뺨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말을 무슨…… 이런 식으로 해?”
“그, 그럼 어떤 식으로 해요? 사랑하는 걸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뿐인데…….”
“아니,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냐고.”
“어려운 말인가요?”
나는 머뭇대면서도 얼굴을 알테어 가까이 가져갔다.
사실 쉽지 않은 말이라는 걸 안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말이지만, 유령이 되었을 때 알테어의 속내를 모두 듣고 난 뒤라 자신감 있게 먼저 말할 수 있었다.
알테어가 내게 확신을 줬기 때문이다.
알테어는 그에게 내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내가 그를 생각하듯 그 역시 날 은애한다는 사실을 모두 알려 줬다.
그러니 나도 알테어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당신 삶이 항상 반짝거렸으면 좋겠어요. 그게 나 때문이라면 행복할 것 같고요.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요. 거창할 필요도 없죠.”
“…….”
알테어는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나는 붙잡은 알테어의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겨 그에게 물었다.
“내 삶이 항상 반짝거렸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게 당신 때문이라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당신은 날 사랑하는 거예요. 세상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신과 내 생각이 통하니까, 그냥 그런 걸로 해도 괜찮은 거죠.”
억지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나 홀로 내린 단호한 결론에 알테어는 시선을 마주한 채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 굳게 닫힌 입술로 한참이나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거리를 좁혀 입을 맞춰 왔다.
천천히 부드럽게 시작됐던 입맞춤이 점점 깊어졌다.
나와 알테어는 마치 내 모든 걸 상대에게 내어주는 듯 서로의 온기와 숨결을 나눴다.
“당신 말은 뭐든 옳아. 하지만 당신이 아니라고 했대도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을 거야.”
입술이 맞닿은 채로 알테어가 속삭였다.
“당신이 말하는 게 사랑이라면, 난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
***
“으…… 하나도 안 들려요.”
안나가 문에 바짝 붙어 귀를 가져다 댄 채 울상을 지었다.
“왜 이렇게 방음이 잘되는 거예요?”
평소라면 안나의 행동을 질책했을 마리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한 듯 그녀를 말리지 않고 문을 기웃댔다.
자리를 비우기 전, 나디아를 끌어안은 알테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니 뭔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참 안 나오실 거 같은데, 다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돌아갑시다.”
리온이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해산을 제안하자 안나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예요! 두 분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지도 모르는 이 위대한 순간을 놓칠 수 없다고요!”
“아니…… 어차피 안이 보이는 것도 아니잖아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고.”
“같은 공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라고요.”
“공기 정도야…… 이 제국 어딜 가나 공유할 수 있어요. 다른 곳으로 간다고 공기가 달라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논리적인 리온의 이야기에 안나가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하고 ‘저 메마른 인간!’이라는 눈빛을 보냈다.
“논리로 뭐든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요.”
“그야 그렇겠지요. 이번 일만 해도 그렇고.”
리온은 찡그린 얼굴로 문을 쳐다보았다.
온갖 의학 지식을 동원해 치료할 때는 차도를 보이지 않던 환자가 미지의 힘을 빌려 회복되었으니…… 의사로서 심경이 복잡했다.
“아무튼 영주님께서 무사히 깨어나셨으니 된 거지요. 앞으로는 저택 분위기도 한결 나아지겠군요.”
“그렇겠죠. 주인이 회복하셨으니 활기가 돌 거예요. 저희도 할 일이 많아질 거고요. 칙칙한 저택 분위기를 바꾸려면 할 일이 아주 많다고요.”
안나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을 불태우는 와중에 시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마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시녀장님.”
말해 보라는 듯 마리가 눈짓을 보내자 시종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서신을 건넸다.
“조금 전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마리는 서신을 봉한 인장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귀족 가문에서 오래 일하지 않은 자라도 단번에 알아볼 황가의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게다가 금색 밀랍으로 편지를 봉했으니…….’
이 색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황실에서도 황제뿐이었다.
마리는 본능적으로 좋은 내용이 아닐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발스테드를 탈출한 죄수, 전 바인 후작 아바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테지.
“……급히 답변을 달라고 하던가? 당장 답장이 필요하다는 말은 없었고?”
“예. 별다른 언질 없이 편지만 전하고 바로 돌아갔습니다.”
“그런가. 그럼…… 두 분께는 잠시 후에 전해드리지.”
마리가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두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더 평화로운 시간을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