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반드시 좋은 길을. (152/170)


152화. 반드시 좋은 길을.
2022.11.16.



“후작님. 영주님.”

나와 알테어가 어느 정도 평온함을 되찾았을 때쯤.

어떻게 알았는지 마리가 타이밍 좋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황실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보내신 분이…….”

마리가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렵다는 듯 머뭇대자 알테어가 그녀의 말을 마무리했다.


“황제겠지?”

“예.”

“바로 읽어 보지.”

알테어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이미 내용이 뭔지 알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 역시 내용이야 짐작이 간다.


‘아마 숙부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숙부는 황제가 관리하는 발스테드의 죄수니까.

하지만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확신할 필요는 없었다.

섣부른 확신은 대책을 고민하는 시야를 좁힐 뿐이다. 그와 관련해 이야기가 필요할 터였다.

그러나 마리는 곧장 알테어에게 편지를 건네지 않았다.


“서두르시기 전에 다른 일부터 하시는 게 어떨까요? 안나!”

마리가 이름을 부르자 안나가 품에 아이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깜짝 놀라 아래로 내려왔다.

알테어가 서둘러 부축해 줬지만 잔뜩 긴장한 탓에 몸이 떨렸다.


“두 분의 따님이세요!”

안나가 코앞까지 다가와 내게 아이를 보여 주었다.

아이는 안나의 품에서 순한 양처럼 잠들어 있었다.

유령으로 둥둥 떠다녔을 때 이미 아이를 보긴 했지만, 이렇게 몸을 되찾고 다시 보니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유령의 몸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현실적인 느낌이 전해져 왔다.


“다른 일을 해결하시기 전에 아이부터 안아 보셔야죠.”

내가 어쩔 줄 몰라 머뭇대고 있으니 마리가 제안했다.

그 말에 안나는 얼른 안아 보라는 듯 아이를 내게 내밀었다.

하지만 아이가 너무 작아서 서툰 내 손길을 타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아이, 괜찮아요. 덜렁대는 저도 아기님을 잘 안고 있는데요, 뭐!”

안나가 머뭇대는 내게 반쯤 억지로 아이를 안겨 주었다.

자주 아이를 안아 익숙해졌는지 내게 ‘이렇게 하시면 돼요!’라며 척척 자세까지 잡아 줬다.

나는 안나가 가르쳐 주는 대로 조심스럽게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를 품에 안자마자 아기 특유의 포근한 냄새와 뜨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와아…….’

아이를 낳는 것만 생각했지, 그 이후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예전의 삶에서도 일찍 세상을 떠나서 출산 경험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이 작은 생명체가 내 몸에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쩐지 경이롭고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실 신과 마주해 아이를 지키겠다고 외쳤을 때는,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모성애보다는 알테어가 이 아이를 원하니까, 그가 원하는 아이를 잃을 수 없다는 생각이 더 컸다.

아이를 낳자마자 정신을 잃어서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을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이를 직접 품에 안으니 이게 얼마나 대단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신 앞에서 아이를 포기하겠다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물론 그런 결정을 내리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으…….”

엄마의 품에 처음 안긴 게 낯설고 불편한지 아이가 칭얼대며 몸을 틀었다.

내가 뭔가 아이를 불편하게 한 건지 걱정스러워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니 모두 심각한 얼굴 대신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들은 원래 조금만 낯설어도 칭얼댄답니다.”

마리가 작게 속삭였다.


“그, 그렇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아이가 불편하지 않도록 자세를 고쳐 잡았다.

어찌나 아이가 작은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큰일이 날 것 같아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다들 아이를 익숙하게 다루는데 엄마인 내가 아이를 이렇게 낯설어하다니.

미안하고 속상해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알테어가 그런 내 기분을 알아챘는지 손으로 가볍게 내 뺨을 쓰다듬으며 날 위로했다.

한마디 말도 없었지만 알테어가 하려는 이야기가 뭔지 알 것 같아서 나는 빙긋 웃으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마주한 알테어의 눈에서도 따뜻한 기운이 서렸다.


“어머나…….”

 

 
코앞에서 들려온 작은 감탄사에 고개를 돌리자 안나와 마리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감격한 눈빛으로 나와 알테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우리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는 걸 알아챈 걸까?


‘그, 그렇게 티가 나나……?’

난 민망함에 작게 헛기침했다.

특히 마리 앞에서는 ‘알테어는 날 사랑하지 않잖아’라고 말했던 적이 있어서 더 민망했다.

마리와 안나는 내가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걸 보고는 더욱 흐뭇한 얼굴이 되었지만 말이다.


“참! 아이 이름은 생각해 두셨나요?”

“이름?”

안나의 물음에 난 바로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건 가주의 몫이라고 생각해 난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이 아이는 누가 뭐래도 ‘에일스포드 남작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낳았으니까.

후계자를 오래 기다려 온 알테어라면 원하는 이름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고 말이다.


“생각해 둔 거 있어요?”

“글쎄.”

하지만 당장 아이 이름이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알테어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정해 둔 건 없어. 당신이 일어나면 같이 고민하려고 했지.”

“어…… 준비성 좋은 알테어라면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이 이름, 딸이 태어났을 때는 저 이름, 이렇게 미리 정해 뒀을 줄 알았어요.”

“……아무리 나라도 그런 데서까지 준비성을 발휘하지는 않아. 특히 상황이 계속 안 좋았으니까.”

‘확실히 그렇긴 해.’

내가 죽느니 마느니 하다 겨우 아이를 낳고 혼수상태에 빠졌으니, 아이 이름을 고민할 여유는 없었을 거다.


“그럼 지금 같이 고민해 보셔요!”

넉살 좋은 안나가 분위기를 주도했다.


“따님이시니 역시 사랑스러운 이름이 좋겠죠? 다이아나는 어떨까요? 유명한 동화 속 공주님 이름이죠. 어렸을 때 다이아나 공주님 이야기를 얼마나 재밌게 읽었는지 몰라요.”

안나가 의견을 제시하자 마리도 슬쩍 의견을 보탰다.


“공주님 이름보다는 중성적인 느낌은 어떨까요? 아기님께서는 에일스포드 남작, 바인 후작, 두 개의 작위를 갖게 되실 분이니 마냥 사랑스러운 이름보다는 위엄이 느껴지는 이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와.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이 작은 아기님이 나중에 두 작위를 동시에 갖게 되신다는 거니까요!”

안나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감탄하며 아이를 쳐다보았다.

나와 알테어에게서 다른 자식이 또 태어난다면 둘에게 나눠서 작위를 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 아이가 훗날의 바인 후작이자 에일스포드 남작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난 조심스럽게 알테어의 얼굴을 힐끗댔다.

사람들이 부인보다 낮은 작위의 남편을 두고 무어라 속삭이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알테어의 그릇이 남작 정도로 적당하다면 큰 문제는 아니겠으나, 내가 본 이야기 속에서 알테어는 공작까지 오르는 위대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정치적인 공작이나 뇌물로 따낸 작위가 아니라, 전쟁에서 당당히 공을 세워 스스로 얻은 작위였다.

하지만 그건 3황자와 손을 잡고 전쟁에 나섰을 때의 이야기니까 흐름이 달라져 알테어가 공작이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원래 알테어 것이어야 했던 걸 못 얻는 건 말이 안 돼.’

신과 거래할 때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그 일’을 해야 한다면 덤으로 알테어가 원래 가졌어야 할 작위까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알테어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의문이 담긴 눈빛에 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 이름은 같이 고민해 봐요. 정말 좋은 이름을 주고 싶거든요.”

“맞아. 운명이 이름을 따라간다는 소리도 있고.”

“알테어도 그런 말을 믿어요?”

“뭐…… 믿기보단, 굳이 나쁘게 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지.”

이럴 때는 보통 집안 어른들의 조언을 받곤 하지만, 나와 알테어는 모두 부모님을 잃어서 조언을 구할 분들이 없었다.

나는 다소 복잡한 심경으로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얼굴은 알테어를 닮은 것 같아요.”

“그런가? 머리나 눈동자 색이 검은색이긴 해도 눈매는 당신을 닮은 것 같은데.”

“얼굴형이나 입매는 딱 알테어인걸요. 아직 어려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사실 아이가 너무 작아서 기분 탓인가 싶긴 하지만.

어쨌든 나와 알테어를 적당히 섞어 놓은 듯한 아이의 얼굴을 보니 새삼스러웠다.

그와 나 사이의 단단한 연결고리가 생긴 기분이었다.

이 아이이게 반드시 좋은 이름을 붙여 줄 거다.

그리고 이름만큼이나 좋은 길을 걷게 할 거다.

늘 소심함에 흔들리던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

안나와 마리가 아이를 데리고 나간 뒤.

나와 알테어는 다시 둘만 남아 황제가 보냈다는 서신을 함께 읽었다.

서신의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황제는 발스테드의 죄수를 사적으로 처벌한 것이 알려지면 자신의 권위에 큰 상처가 날 것이라 걱정하고 있었다.

숙부가 죽은 척 위장하고 발스테드를 탈출했다는 이야기나, 그가 복수를 위해 바인 저택에 숨어 든 이야기, 결국 발각되어 잔인하게 죽었다더라 하는 이야기까지 사교계에 은밀히 돌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바르 바인이 발스테드를 탈출한 이야기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우리 내부의 사정을 몰라서야 떠들 수 없는 이야기인데.”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어쩔 수 없어요. 사람 입은 아무리 단속해도 새어 나가는 법이니까요. 바인 저택의 수많은 사용인 중 한 사람만 입을 열어도 소문이 퍼지죠.”

바인 저택은 규모가 워낙 커서 에일스포드처럼 작은 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용인이 필요했다.

소규모의 인원을 모두 믿을 만한 이들로 채워 놓고, 확실하게 그들을 통제하며 지내 왔던 알테어로서는 피곤한 상황일 터였다.


“이미 새어 나간 건 어쩔 수 없고, 이후에 폐하께서 한 제안이 문제인데요.”

“아. 그렇지.”

다행히 황제는 알테어를 질책하지 않았다. 사실 못 했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어쨌든 발스테드에서 죄수가 탈출한 건 그의 실책이었으니까.

대신 그는 알테어에게 이 상황을 덮을 수 있는 대책을 한 가지 제시했다.

소문은 더 큰 소문으로 덮는다. 즉, 사람들이 눈을 돌릴 다른 사건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국경 토벌을 원하신다고.”

말을 순화했지만 결국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내가 읽었던 이야기 속에서는 한참 뒤에 일어나는 일이야.’

3황자 오르카와 알테어가 함께 나서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그 전쟁!


“나도 황제의 생각에 동의해. 당신과 아이를 두고 나서는 건 마음이 무겁지만, 그래도 필요한 일이니까…… 멋대로 ‘그’를 처리했으니 보답은 하는 게 맞겠지.”

알테어가 정말 나서기 싫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역시 알테어가 전쟁에 나선다니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누구에게 쉽게 다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두렵지 않았다.


“……저도 황제의 뜻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가지 말라며 막을 줄 알았는지 알테어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제가 일으키려고 하는 전쟁과 그 ‘거래’가 관련되어 있어요.”

알테어에게 신과 나눈 거래를 말할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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