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당연하다는 게 좋아서. (153/170)


153화. 당연하다는 게 좋아서.
2022.11.20.



 
거래라는 소리에 알테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야기가 이렇게 연결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나는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머릿속을 정리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이 문제 삼은 건,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생명이 태어나서 균형이 흔들린다는 거였죠.”

“그랬지.”

“그럼 반대로, 태어났어야 할 생명이 태어나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다면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챘는지 알테어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턱을 매만졌다.


“그걸 우리가 바로잡아 주면 아이를 지킬 수 있다는 거지?”

알테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우리’라는 말이 나오는 게 뭔가 기분 좋았다.

큰 문제를 앞에 둔 상황인데도 ‘우리’가 함께라면 뭐든 잘 해결될 것 같은 기분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요. 제가 읽었던 이야기 속에서는 스치듯 잠깐 등장하는 사연이 있는데, 거기에서 태어나지 못한 생명에 대한 언급이 있었거든요. 그 생명이 태어나지 않아 그 일대 먹이 사슬에 문제가 생겼다고요.”

“그게 황제가 일으키려는 전쟁과 연관이 있다는 말은…….”

“그 일이 발생한 곳과 황제가 지목한 곳이 같은 지역이에요.”

소설 속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여한 오르카는 황폐한 환경에 크게 놀란다.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는 척박한 대지. 말 그대로 죽음의 땅.

수많은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안목을 넓힌 오르카의 눈에도 낯선 풍경이었을 것이다.

크게 놀란 오르카는 그 땅에 사는 노인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노인은 몇 세대 전에는 이곳이 아주 풍요로운 땅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라트람’이 사라진 후 해충이 들끓어 황폐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생명력을 잃고 황폐화된 땅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었다.

결국 인간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자 빈자리를 마수들이 메워 누구의 땅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곳이 되고 말았다.

‘여기가 내 영토다!’라고 주장하려면 그 나라 백성이 살고 있거나, 병력이 주둔하고 있어야 하는데, 마수로 가득한 황폐한 땅에는 누구도 쉽사리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때문에 대륙의 모든 나라들은 공식적인 문서에서 모두 그곳을 자기들 땅이라고 표시하고 있었다.

이름뿐이지만 그 땅에 내려진 작위도 있어서, 영지 없는 귀족들이 명예직으로 그 작위를 얻기도 했다.


‘그 땅이 바로 제틀런드.’

소설 속 알테어는 최전선에서 활약한 보상으로 황폐한 영지와 그 땅에 묶인 공작 작위를 받았다.

제틀런드는 실속이라고는 없는 이름뿐인 영지였지만, 그래도 전쟁 영웅 제틀런드 공작은 단순한 명예직 귀족이 아니었다.

모두가 전쟁에서 무서운 활약을 보여 준 그를 경외했다.


‘하지만 신과의 거래를 잘 해결하면…… 어쩌면…….’

생명력이 회복된 훌륭한 영지까지 알테어의 손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라트람’이 사라지기 전의 그 땅은 무척이나 풍요로웠다고 전해지지 않는가?


“황폐화된 제틀런드 지역에는 오래전 ‘라트람’이 사라졌다고 해요.”

“‘라트람’이라면, 앉은 자리에 맞춰 색이 바뀌는 작은 새 아닌가? 멸종됐다는 이야긴 들었지.”

“맞아요. ‘라트람’을 관상용으로 여겨 성체며 알을 마구잡이로 잡아가서 결국 멸종했다죠.”

제틀런드 지역 먹이 사슬의 한 축을 담당하던 새가 사라지자 연쇄적으로 땅이 황폐해졌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하지만 제틀런드에 부화되지 않은 알이 남아 있어요. 그 땅이 황폐해지는 건 신의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이 마지막 기회를 남겨 둔 거죠.”

“아무래도 평범한 알은 아니겠지? 평범한 알이었다면 몇 세대를 거치는 동안 썩어 버렸을 테니까.”

“네. 신이 남긴 마지막 기회니까요. 특별한 힘으로 보호되고 있어요.”

소설 속 오르카와 알테어는 파괴된 신전에 남겨진 알 하나를 발견한다.

강한 힘으로 던져도, 발로 마구 밟아도 깨지지 않는 신비한 알.

표면이 오색으로 반짝여 ‘라트람’의 알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르카 황자는 그 알을 수도로 가져가 온갖 연구를 동원한 끝에 부화에 성공한다.

그리고 멸종된 새를 되살린 자신의 이미지를 은근하게 신격화하며 황위에 점차 가까워졌다.

당연하겠지만, 오르카 황자의 선전에 이용된 새는 평생을 그의 새장에 갇힌 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전쟁을 치르다 특별한 ‘라트람’의 알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오르카 황자가 탐내겠지만, 그걸 우리가 확보해야 해요. 그러니까…….”

라트람은 새장에 갇혀 있으면 안 되는 새다.

제틀런드의 땅으로 날아가 생명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한다.


“내가 직접 제틀런드로 가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알테어가 눈썹을 꿈틀하며 매섭게 날 몰아붙였다.


“거기가 얼마나 척박하고 위험한 곳인데 직접 갈 생각을 하지? 난 절대 허락할 수 없으니까, 아니, 사실 당신이 어딜 가든 허락받을 필요는 없지만, 난 절대 두고 볼 수 없으니까 다시 생각해.”

“……알테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어요?”

난 우르르 쏟아진 말에 입을 떡 벌리고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알테어는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견고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절대 안 돼.”

“안 되긴요. 애초에 직접 갈 생각도 없었어요.”

“……뭐?”

“그런 곳에 나 같은 사람이 가면 괜히 짐만 된다는 걸 아니까요. 내가 직접 제틀런드로 가서 알을 찾아오는 게 도리지만, 알테어에게 부탁하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

알테어가 입을 꾹 다물고 내 얼굴을 살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지 알아보려는 듯했지만, 정말 그럴 생각이 없었던 터라 난 아주 당당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부탁을 절대 못 했겠지만 이젠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당당한 내 눈빛에서 거짓을 찾아내지 못한 알테어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슬쩍 매서운 시선을 거뒀다.


“……이건 당신 일이 아냐. 우리 일이니 누가 하든 자신의 일인 거지.”

“응. 우리 일이에요.”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알테어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뭘 그렇게 웃어? 당연한 소리를 가지고.”

“그 소리가 당연하다는 게 좋아서 그렇죠.”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계속 생글거리고 있으니 알테어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것마저 어쩐지 즐거워 더욱 빤히 알테어를 쳐다보자 그가 참지 못하고 팔을 뻗어 커다란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어어…….”

“황제에게는 뜻에 따라 전쟁에 나서겠다고 답변하지.”

“네. 그런데 계속 이렇게 눈 가리고 대화할 거예요?”

알테어의 팔을 붙잡아 가볍게 끌어 내리자 저항 없이 그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환하게 돌아온 시야에 알테어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가 있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테어가 깊고 붉은 눈동자로 날 가만히 응시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휙 돌리니 알테어가 내 턱을 살며시 붙잡아 다시 정면으로 시야를 돌려놓았다.

알테어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그가 천천히 다가와 내게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안타까워 ‘아……’ 하고 아쉬운 탄성을 내뱉자,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다시 알테어가 들이닥쳤다.


“……!”

난 동그랗게 떴던 눈을 질끈 감았다.

알테어의 팔을 꽉 붙잡은 채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남편을 계속 놀리면…….”

입술이 맞닿은 채로 알테어가 속삭였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혀 간지러웠다.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 그건 딱히 벌은 아닌데…….”

나도 알테어와 입 맞추는 게 싫지 않은걸.

소심하게 꺼낸 진심에 알테어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는 민망함에 얼른 알테어를 밀어내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 그리고 제틀런드에서 마수만 상대하지는 않을 거예요. 마수를 거의 몰아냈을 무렵에 기회만 보고 있던 다른 나라 병사들도 들이닥치기 시작하거든요.”

마수를 상대하느라 체력이며 병력 소모가 많았을 제국군을 몰아내고 마지막 이득을 자신들이 취하겠다는 전략이다.

상당히 치사한 방법이었지만, 국가의 이득을 경쟁하는 사이에 치사하고 말고를 따질 여유가 있을 리가.

그렇다면 이쪽도 치사한 방법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떤 나라가 무슨 전략으로 제틀런드에 참전할지 알아요. 시기가 조금 달라졌지만, 결국 전쟁이 벌어진 것처럼, 그쪽도 내가 아는 이야기와 비슷한 전법으로 나오지 않을까요?”

 

***

황명에 따라 전쟁이 선포되었다.

그의 의도는 정확히 먹혀들어 가서, 감옥을 탈출한 죄수에 대한 이야기는 전쟁에 대한 불안이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전쟁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고 했다.

그건 바인 저택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전쟁이라니!”

안나가 말도 안 된다며 씩씩댔다.


“이제 막 아가씨께서 태어나셨는데 당장 전쟁터로 떠나라뇨! 폐하께선 염치도 없으시지. 감옥 관리를 제대로 안 하셔서 우리 마님께서 큰일 치를 뻔하셨는데, 이젠 영주님을 밖으로 내돌려요?”

수도에서 제법 시간을 보내며 꽤 진중해진 줄 알았더니.

이런 상황이 되니 안나는 내가 처음 만났던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 냈다.

평소라면 말을 조심해야 한다며 그녀를 타일렀겠지만, 사실 나도 공감하는 말인지라 굳이 안나를 말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방에는 나와 안나, 아직 말도 못 알아듣는 아기뿐이라 쓸데없이 말을 옮길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전쟁에서 공을 세울 기회야. 알테어가 돌아올 때쯤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영웅이 되어 있을걸. 전쟁은 비극이지만 또 그런 기회의 장이거든.”

그걸 알기에 권력자들은 전쟁을 포기 못 하는 거겠지.


“하지만 전쟁에서 큰일이 나면 영웅이 되는 게 무슨 소용이에요.”

안나는 내 말에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투덜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님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는데. 아내와 아이를 두고 전쟁터로 나서는 영주님의 심정이 아주 복잡하실 거예요.”

“응. 나보다야 알테어가 마음이 힘들겠지.”

다행인 건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이 내가 기억하는 소설 속 이야기와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황제가 전쟁을 선언하는 과정, 참여할 이들을 모집하는 방식, 오르카 황자가 자신에게 맡겨 달라며 나서는 일까지. 모든 게 똑같았다.

덕분에 전쟁의 시기만 달라졌을 뿐 이야기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다 잘될 거야.’

나는 작은 침대에 누운 아이의 뺨을 손가락으로 간질이며 바람에 가까운 확신을 되뇌었다.

***

출정대는 빠르게 꾸려졌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참전 대신 물자를 제공하는 노선을 택했기에, 알테어는 남작임에도 출정대에서 꽤 높은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지휘관은 당연히 황제를 대신해 출정하는 3황자 오르카였지만 말이다.

마수를 토벌한 경험이나 기사들을 지휘한 경력을 따지면 알테어가 지휘관에 더 적합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신분 사회란 어쩔 수 없는 거다.

알테어는 출병 준비로 바빠졌다. 기사단도 최소한의 인원은 남겨 두고 모두 전쟁터로 나설 예정이었다.

블란은 알테어와 함께 떠나고, 카인은 이곳에 남아 나머지 기사단을 지휘하게 됐다.


“평소라면 저만 빼놓고 간다고 툴툴거렸을 텐데, 이번만큼은 아주 좋네요.”

카인이 헤벌쭉 웃으며 침대에 누운 아이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다.


“아기는 이렇게 작은 거였군요. 신기합니다.”

커다란 사람이 최대한 몸을 굽히고 아이에게 재롱떠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흘렀다.


“그렇게 애가 좋으면 카인도 어서 결혼해야겠어요.”

“뭐…… 그게 제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카인이 멋쩍게 웃으며 제 볼을 긁적이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출병일이 당겨질 것 같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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