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그런 말은 하지도 마. (154/170)


154화. 그런 말은 하지도 마.
2022.11.23.



 


“얼마나요?”

“마지막 정비만 끝나면 바로 움직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제틀런드로 향한다는 이야기에 다른 나라들의 동향도 심상치 않아서요.”

“역시 그렇겠죠.”

나는 내가 읽은 소설 속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설 속에서는 다른 나라가 먼저 제틀런드를 노리고, 제국이 후발주자로 참전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이야기가 꼬여 제국이 먼저 제틀런드를 노리고 타국이 후발주자로 참전한다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물론 누군가 제틀런드를 노리고 다른 나라들이 뒤따라 참전하는 양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뜻이겠지.’

앞으로의 일을 상상해 보며 생각에 잠겨 있으니 카인이 살짝 놀랐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런데 마님께서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네?”

“생각보다 침착하셔서요. 전쟁이 났다고 하면, 또 거기에 영주님이 나간다고 하면 무서워하실 줄 알았습니다.”

“전쟁은 무서워요.”

직접 전쟁에 참여해 본 적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기 전의 세상에는 온갖 자료나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전쟁의 참상 같은 부분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두려운 마음이 한구석에 있었다.


“하지만 알테어는 잘할 거예요.”

이건 내가 읽었던 이야기와 상관없이 내가 지켜본 알테어에 대한 신뢰였다.

알테어는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든 해 내는 우직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나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거다.

소심해서 쉽게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내게 이 정도까지 신뢰하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카인에게 말하고서도 스스로 놀라울 정도였다.

카인도 내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영주님이라면 잘하실 겁니다. 오히려 영주님을 상대하는 마수나 다른 나라의 적들을 걱정해야 할 정도라고요. 싸울 때는 어찌나 앞만 보고 달리시는지 뒤따르는 부하들은 아주 죽을 맛…….”

“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군.”

하소연에 가까운 카인의 이야기는 조용히 방에 들어온 알테어가 뚝 끊어 버렸다.

나는 언제 알테어가 들어온 건지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카인은 이미 그의 등장을 알아차렸는지 태연했다.


‘본인이 들어온 걸 알면서도 투덜대다니.’

카인의 담력은 역시 대단하다고밖에는.

난 감탄해서 눈을 반짝이며 카인을 쳐다보았다.

카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참 가벼워 보이는데, 사실은 담력이 대단해서 나 같은 소심한 사람이 롤 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심지가 단단했을 것 같은 알테어나 진중하고 차분한 블란과 달리 어딘가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리감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카인을 향한 내 시선은 슬그머니 나와 그 사이를 가로막는 알테어로 인해 차단되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시야를 막은 알테어를 쳐다보니 그는 살짝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리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언제부턴가 내 눈에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알테어와 내가 가까워진 증거라고 느껴진다면 이상한 걸까?

기분 좋게 웃으며 알테어를 빤히 쳐다보니 부루퉁하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저 녀석이 전부 떠든 모양이지만, 출정일이 당겨졌어.”

“그럼 언제 떠나요?”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새벽.”

“네?”

당겨진다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보다 훨씬 빠른 일정에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알테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출정의 지휘를 맡은 3황자의 뜻이야. 우리가 언제 출발했는지 최대한 다른 나라에 알리고 싶지 않다고.”

“아. 3황자의.”

그의 계획이라면 믿을 만하다.

내가 읽은 소설 속에서도 3황자의 전략은 항상 신묘하게 잘 맞아떨어졌었다.

오르카 황자가 계획을 세우면 알테어가 그걸 그대로 수행하는 식이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자 제국은 승승장구했다.

그건 오르카 황자의 책략만 훌륭하다고 이룰 수 있는 일도, 알테어의 무력만 대단하다고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목적을 이룬 후 오르카 황자가 매정하게 알테어를 내쳤던 걸 생각하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전쟁에서만큼은 두 사람의 합이 아주 잘 맞았다.


“그의 의견이라면 따를 만해요. 다소 의아한 부분도 있겠지만 결과는 다 좋을 거예요.”

“그를 아주 신뢰하는 것 같네.”

“그야 내가…….”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죠.

같은 공간에 있는 카인을 의식해 명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알테어는 내 이야기를 다 알아들은 것 같았다.


“이유는 알아. 그런데도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전적으로 신뢰하는 게 아니라…….”

“크흠!”

변명하려는 찰나 카인이 못 참겠다는 듯 크게 헛기침을 했다.


“이제 서로 마음을 확신하셨다 이거죠? 방해꾼은 사라지겠습니다.”

카인이 과장스럽게 인사하고 뒤로 물러났다.


“바, 방해꾼이라뇨!”

난 민망하고 놀라서 펄쩍 뛰었지만, 알테어는 코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치 날파리를 쫓아내는 듯 성의 없는 손짓이었다.


“아직도 있었나. 더 빠른 타이밍에 떠났어야지.”

“예, 예. 그렇고말고요.”

알테어의 타박에 카인이 날 향해 ‘보셨죠? 이 인간이 이렇게 재수가 없습니다!’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간의 억울함이 잔뜩 담긴 눈빛에 웃음을 터트리자 알테어가 아예 발길질까지 하며 카인을 내쫓았다.

카인은 잽싸게 알테어의 공격을 피하며 후다닥 밖으로 내뺐고 말이다.


“부러워요.”

툭 던진 말에 알테어가 ‘도대체 뭐가?’라는 듯 황당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카인이 나간 문을 힐끗댔다.


“카인은 알테어와 동등하게 느껴지거든요. 편안하고 가깝게 느껴져요. 난 아마 알테어랑 평생 저런 사이는 못 될 거예요. 난 카인처럼 활기차고 넉살 좋은 성격은 아니니까요.”

“……저놈 같은 성격이 부러워?”

알테어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네. 되고 싶은 사람을 그려 보면 카인 같은 사람이 이상향에 제일 가까워요. 나도 활발하게 여러 사람과 잘 어울리고 싶었거든요. 소심해서 그런 걸 전혀 못 했으니까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당신도 여러 사람이랑 잘 어울리고 있잖아.”

“네?”

“마리는 당신에게 충성하고, 안나도 어느 순간 당신 사람이 됐지. 내 부하놈들도 나보다는 마님이 더 좋다며 노래를 부르잖아. 비오스케스 공작도 당신을 좋아하고, 그 3황자 놈도…….”

하나둘 사람의 이름을 늘어놓던 알테어가 오르카를 언급하다 말고 미간을 팍 찌푸렸다.


“여기서 더 사람들이랑 잘 지내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맘 같아서는 나랑만 어울리라고 하고 싶다고.”

“어어…….”

알테어가 말하는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난 소심하고, 사람들 앞에서 답답하게 구니까, 잘 지내는 건 아니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알테어의 말을 들어 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다.


“그러니까 카인처럼 되고 싶단 말은 하지도 마. 당신이 그놈처럼 생글대면서 사방팔방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 난 아마 속 터져 죽을 테니까.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다면 카인을 데려가고 블란을 두고 가는 건데.”

“무슨 소리예요. 블란은 당신 부관인데.”

“그럼 내가 없는 동안에 절대 카인 그 녀석에게 휩쓸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카인은 함부로 날 휘두르지 않아요. 날 마님으로 깍듯하게 모시는 걸요.”

“……언제 그 녀석과 이런 신뢰 관계가 형성된 거지?”

알테어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런 반응이 우스워서 웃음을 흘리며 알테어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보다 알테어가 내게 약속해요.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툭 던져진 말에 알테어가 가만히 내 손을 쳐다보았다.


“당신을 못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약속하고 가면 반드시 지키려고 할 거잖아요. 나와 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니까. 그럼 기다리는 동안 안심할 수 있어요. 응.”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이어진 말에 알테어가 부드럽게 손가락을 걸어왔다.


“약속하지.”

나를 향해 분명히 말하는 눈빛에는 흔들림이 하나도 없어서, 정말로 마음이 놓였다.


“잘 다녀와요, 알테어.”

“……그래. 다녀올게.”

 

***

깊은 새벽.

알테어는 누구의 배웅도 받지 않고 기사들과 조용히 저택을 나섰다.

작전상 소란스럽게 떠날 수 없다는 고지식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마저도 알테어다웠다.

3황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지만,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한 부분에서는 절대적으로 명령을 따르니까.

알테어는 이대로 3황자 오르카가 이끄는 군단에 합류해 제틀런드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쟁 영웅이 되어서 돌아오겠지.’

나는 알테어와 마주 잡았던 손을 매만지며 창문을 통해 멀어지는 알테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떠나기 전에 내가 기억하는 사건들을 모두 정리해서 주긴 했는데.’

그게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다면 알테어와 함께 전장에서 싸운 것처럼 뿌듯할 거다.


“우으…….”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에 잠에서 깬 건지 아이가 칭얼댔다.

나는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와 비교하면 한결 자연스러워진 동작으로 아이를 안아 올렸다.

아이도 내가 익숙해진 건지 처음처럼 낯설어하지 않고 내 품에 안착했다.


“아빠가 널 위해 작은 새를 데려올 거야.”

 

 
아직은 아이의 이름을 짓지 않았다.

신의 인정을 받고 온전한 생명임을 인정받기 전에 이름을 붙인다면 부정이 탈 수도 있었다.

이 아이가 온전한 존재로 인정받는 날 어떤 부정도 없는 상태로 이름을 주고 싶었다.


“엄마가 잠든 사이에 아빠가 널 지켰듯, 지금은 엄마가 널 지켜 줄게.”

나보다 약한 상대를 지킨다.

그런 마음가짐만으로도 나 자신이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제야 알테어가 어떻게 그리 단단한 사람이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내 땅을, 내 사람들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살아왔겠지.

그 단단함이 지금의 알테어를 만든 것일 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테어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 본 적이 있을까?’

그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면, 내가 그를 보호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깊이 안아 주고 싶어졌다.

***

비밀스럽게 제틀런드로 향하겠다는 3황자의 전략은 잘 먹혀들었다.

그는 군단의 구성을 간소화해서 이동 속도를 높여 다른 나라가 준비를 마치기 전에 많은 영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뒤늦게 참전한 나라들도 분전하고 있지만 우리 제국군의 기세에는 못 당하고 있다’라는 소식이 연일 수도에 들려왔다.

소문의 중심에는 3황자 오르카와 알테어가 있었다.

특히 알테어의 무용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쫙 퍼져 벌써부터 그를 전쟁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알테어의 위상이 올라가니 바인 후작가를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후작이라는 대단한 자리를 어린 여자가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바인 후작가도 이젠 내리막길뿐이야’라고 말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줄을 대려고 난리였다.

각종 파티와 모임 초대장이 날아와 곤란할 지경이었다.

당연히 난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남편이 전쟁터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파티라니? 모임이라니?

생각 짧은 제안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마음이 동하는 제안도 있었다.

상속법 개정 때부터 우리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준 비오스케스 공작으로부터 날아온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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