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내가 따르는 건.
(155/170)
155화. 내가 따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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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내가 따르는 건.
2022.11.27.
공작은 긴히 논의할 일이 있다며 방문 허락을 요청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든든한 아군으로 손잡았던 비오스케스 공작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난 흔쾌히 저택에 방문해 주십사 답장을 보냈고, 곧 비오스케스 공작이 당당히 바인 후작저로 찾아왔다.
“후작!”
공작은 반갑게 날 부르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한꺼번에 겪었다고 들었는데.”
좋은 일이라 하면 후계자를 낳은 일일 것이고, 나쁜 일이라 하면 숙부와 있었던 트러블을 말하는 것일 테다.
황제가 자신의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의 소문을 덮으려고 노력 중이었지만, 그래도 알 사람은 전부 안다는 의미였다.
대놓고 ‘발스테드에서 죄수가 죽은 척해서 탈출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며?’라고 말하지 못할 뿐이다.
“나쁜 일은 벌써 잊었고, 좋은 일 덕분에 매일 정신이 없어요.”
웃음으로 비오스케스 공작의 안부 인사에 화답하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시기에 남작이 저택에 없어서 어쩌나. 의지할 사람은 많을수록 좋은 법인데.”
진짜 딸이나 손녀를 걱정하는 듯한 따뜻한 말투였지만, 공작이 고작 내 안부나 묻자고 바인 후작저까지 걸음한 게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공작이지만 결국 그도 한 가문의 가주다.
그의 모든 걸음은 자신과 가문의 이익을 고려한 행보였다. 오늘의 방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거지요?”
조심스럽게 운을 띄우자 비오스케스 공작의 눈빛이 달라졌다.
인심 좋고 호탕한 무인의 눈빛이 서늘한 권력자의 눈빛이 됐다.
“그렇다네. 전쟁에 나간 남작과 관련된 이야기지.”
“알테어요?”
다소 예상 못 한 이야기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공작이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거운 이야기는 아니라네. 그저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남작이 선두에서 전쟁에 기여하고 있으니 뭐라도 얻어 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뿐일세.”
그야 당연한 일이다.
알테어가 인심이 좋아서 얻을 것도 없이 전쟁에 나가 활약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읽었던 이야기 속에서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3황자 오르카가 알테어에게 제틀런드를 하사하고 작위를 내려야 한다며 여론을 몰고 갔었고, 실제로 성사가 됐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세운 공로로 뭘 얻을 것인가 논의하기 이른 시점이었다.
거의 끝을 보고 있는 유리한 전황이 이어지고 있다지만, 어쨌든 전쟁 중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전쟁 후 황제의 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게다가 알테어의 보상을 왜 비오스케스 공작이……?
“네에…….”
여러모로 시원찮은 이야기에 절로 말꼬리가 늘어졌다.
애매한 내 심정을 알아차린 건지 비오스케스 공작이 작게 헛기침했다.
“물론 이건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하지만 보상이 공로가 큰 순서대로 많이 주어지리라 생각하는 건 순진한 생각일세. 미리 세력을 만들어 뒀다가, 논공행상이 이뤄질 때 입김을 강하게 넣어야 해.”
비오스케스 공작의 말이 이어지니 그가 하려는 이야기가 뭔지 슬슬 알 것 같았다.
말하자면, 누가 봐도 훌륭한 공을 세운 알테어에게 슬쩍 묻어가 나도 뭔가 얻고 싶다는 뜻이다.
“……비오스케스에서는 누가 전쟁터로 나갔지요?”
“어흠.”
정곡을 찔린 비오스케스 공작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상속법 개정으로 원래 후계자로 지목되었어야 할 녀석이 자격을 잃지 않았나. 이번 기회에 전쟁에서 공을 세워 뭐라도 얻으려고 한 모양이야. 상황이 그러니 내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네.”
공작이 말하는 것만 들으면 후계자 자리를 뺏기다시피 한 사람이 안타까워 어떻게든 돕고 싶다는 듯하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 이유로 비오스케스 공작이 날 찾아와 아쉬운 소리를 하지는 않을 터.
‘사실은 원한의 싹을 자르고 싶은 걸 테지.’
작위를 내게 넘겨준 숙부가 어떤 미친 짓을 저질렀는지 수도 사교계에는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상황이었다.
제 것이라 생각했던 권력을 빼앗겼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무모해질 수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 준 사건이었다.
그 상황을 지켜본 비오스케스 공작도 당연히 걱정스러웠을 거다.
원래 후계자가 되기로 했던 놈이, 가지지 못한 것에 분노해 소중한 손녀에게 험한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공로를 세웠다면 정당하게 대가를 받을 수 있을 텐데요.”
“그럼. 응당 그렇겠지. 하지만 좀 더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이라네. 불확실한 게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지 알잖나.”
비오스케스 공작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역시 남작을 위해 ‘확실하게’ 길을 열어 주겠네. 남작의 위용이 수도까지 전해져 모르는 사람은 없다지만…… 이런저런 정치적 상황에 얻을 걸 못 얻을 수도 있어. 나와 손을 잡으면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약속하지.”
넘치는 것 하나 없이 정당한 대가만 바랄 뿐인데 이렇게 손을 써야 하나 싶긴 했지만, 공작의 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읽은 이야기 속에서도 3황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작위와 영지를 받았던 거니까.
누군가의 지원이 필요하긴 했다.
나와 알테어는 아직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이 아니라 더 그랬다.
물론 알테어가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시기가 전환점이 되겠지만…….
나는 빙긋 웃고 있는 비오스케스 공작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확실한 권력자였다. 알테어의 앞길에 도움이 된다.
‘게다가 상속법 개정 때도 도움을 꽤 받았어.’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알테어의 공로의 끄트머리에 사람 이름 하나 올리는 것 정도는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알테어가 열심히 싸워 얻어 온 공로를 쉽게 나눠 주기 싫다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도록 충분한 보상을 받아내야 한다.
“그럼…… 제틀런드를 알테어의 품에 안겨 주실 수 있나요?”
조심스럽게 묻자 다소 놀란 듯 공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사실 자네들에게는 딱히 쓸모없는 영지 아닌가? 부유한 에일스포드와 명문 바인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가난함으로 유명했던 에일스포드 앞에 어느새 ‘부유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조금 재밌어서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제틀런드에 붙은 작위가 필요해요.”
“아. 그 영지에 공작 작위가 딸려 있었지.”
“네. 남작은…… 알테어를 담기엔 작은 그릇인 것 같아서요.”
“하하. 그렇지. 확실히 그건 맞는 말이야.”
다소 건방져 보일 수 있는 말에도 비오스케스 공작은 호탕하게 웃었다.
“공작이라. 그래. 충분히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지.”
그렇게 웃는 공작의 반응이 정말로 내 말에 동의하는 듯해서 기분이 한결 편해졌다.
이런 사람과는 언제든 손을 잡아도 좋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여요. 그리고…….”
“또 원하는 게 있나?”
비오스케스 공작이 개의치 않고 말해 보라는 듯 눈을 반짝였다.
자신이 제시한 거래가 받아들여졌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이건 제안해 주신 것과 별개로 드리는 부탁이에요. 구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내가 구할 수 있는 것인가?”
“공작님이시라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이 부탁은 내가 먼저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했겠지?”
“네. 그랬을 거예요.”
짧은 대답에 비오스케스 공작이 아깝다는 듯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후작이 날 먼저 찾길 기다릴 걸 그랬어.”
먼저 찾아와 아쉬운 소리를 한 사람은 공작이었고, 어쩔 수 없이 이 대화에서의 주도권을 내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먼저 공작을 찾아가 구해 주셨으면 하는 물건에 대해 부탁했다면…… 오늘의 대화는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공작은 내 부탁에 대한 대가로 공적을 나누자고 할 수 있었을 테지.
“인내심이 강했던 쪽의 승리네요.”
“다급했던 자의 패배고 말이야.”
비오스케스 공작은 순순히 제 손해와 패배를 인정하며 두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그래서, 구하고 싶은 물건이 뭐지?”
***
평화롭게 전쟁 소식을 받아 보고 있는 수도와 달리 최전선 제틀런드는 매일이 치열했다.
연전연승하며 군의 사기는 높았지만, 그래도 전쟁터는 전쟁터였다.
싸우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참전한 자들의 체력과 의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뒤늦게 이 싸움에 뛰어든 나라들과 달리 제국은 가장 먼저 제틀런드에 발을 들였으니 체력적인 부분에서 손해가 많았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는 속전속결로 남은 지역을 차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일 동북을 치고, 그대로 진격해 북부를 완전히 먹을 겁니다.”
오르카 황자는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계획을 브리핑했다.
설명을 듣기만 해서는 ‘정말 저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이상적인 계획이었다.
“저게…… 가능하겠습니까?”
“너무 무리한 계획이 아닐까 싶은데요.”
당연한 듯 여기저기서 우려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순히 황자의 말에 트집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그들은 정말로 비상한 오르카 황자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내용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오르카 황자는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긴 설득 끝에 자신의 계획을 모두에게 납득시켜야 할 터였다.
하지만 오르카 황자는 지지부진한 설득 과정을 견딜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하시죠.”
가만히 앉아 오르카의 계획을 듣고 있던 알테어가 짧게 내뱉은 말 덕분이었다.
그게 가능하긴 한 거냐며 수군대던 이들도 알테어가 ‘하자’고 말하니 순식간에 입을 꾹 다물었다.
함께 전장을 누비며 그의 무용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터라 다들 알테어에게 기가 눌린 상태였다.
대부분이 알테어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데다 실전 경험도 풍부한 이들이었지만, 모두가 알테어에게는 한 수 접어 줬다.
“……다들 동의합니까?”
오르카 황자가 묻자 이번에는 어떤 반박도 나오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오르카 황자는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늘 의심이 따라붙는데, 알테어의 무용은 어떤 의심도 없이 모두를 설득해 버리니까.
동시에 궁금해졌다.
알테어가 제 계획에 순순히 동의하는 게 자신의 계획을 모두 이해했기 때문인지.
“다들 동의하는 듯하니 내일은 이 전략으로 나가겠습니다. 이만 해산하지요.”
오르카 황자의 말에 회의 참석자들이 우르르 막사를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알테어까지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오르카 황자가 급히 그를 붙잡았다.
“남작.”
알테어는 긴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안색을 하고 오르카 황자를 쳐다보았다.
“따로 전달하실 작전이라도?”
“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단지 내 계획을 이해하고 동의한 건가 해서.”
“의도는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당장의 편리함보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나를 생각하면 시도할 만한 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이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묻고 내 계획에 동의했다고요? 날 그리 신뢰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요. 나에 대한 생각이 조금쯤은 바뀐 겁니까?”
오르카 황자가 슬쩍 제 마음을 떠본다는 것을 깨달은 알테어가 픽 웃음을 흘렸다.
“아뇨. 난 여전히 당신은 안 믿습니다.”
“그런데 내 뜻을 따라요?”
“내가 따르는 건 당신이 아니라 내 아내의 의견입니다. 전쟁터에선 당신 말을 무조건 믿으랬거든.”
“……아내? 후작 말입니까?”
알테어는 의미 모를 소리에 대한 해석을 내놓지 않고 그대로 인사한 뒤 막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오르카 황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어째서 후작이 남작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작이 아내 말에는 의문조차 갖지 않는 팔불출이라 다행이군.”
역시 그 부부의 실세는 후작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