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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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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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군요.
2022.11.30.
알테어가 없는 사이에도 시간은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어떤 것보다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게 하는 건 아이의 존재였다.
“이제 조금 무게감이 느껴져.”
난 아이를 안아 손가락으로 코끝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처음에 아이를 안았을 때는 공기를 품은 것처럼 가벼웠는데, 이젠 뭔가를 안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 정도였다.
“원래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법이니까요.”
안나가 옆에서 고개를 쭉 빼고 아이의 얼굴을 살피며 말해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애를 낳아 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지만 에일스포드에 있을 땐 온갖 애들을 다 보고 자랐는걸요.”
안나가 자랑하듯 턱을 척 치켜들었다.
“아시다시피 에일스포드는 작은 동네잖아요. 누구 집에 애가 태어났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축하해 주거든요. 영주님도 무뚝뚝한 얼굴로 애를 얻은 부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요.”
영지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건 곧 생산력이 높아진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시골 영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영주가 직접 찾아가 축하하고 선물도 주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마님도 에일스포드에서 아이를 낳으셨다면 그 분위기를 느끼셨을 텐데 아쉽네요. 여기저기서 축하도 많이 받으셨을 텐데…….”
안나가 아쉬움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에일스포드에서 아이를 낳았다면 확실히 지금보다 떠들썩했을 거다.
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을뻔한 것과는 상관없이 수도는 그렇게 떠들썩하게 출산을 축하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일스포드였다면 분명 축제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함께하던 에일스포드에서의 축제 풍경을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게. 아쉽다.”
정말로 아쉬웠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집’이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언제부턴가 내게 ‘우리 집’은 에일스포드의 그 작은 성이 되어 버렸지.
내 손길이 안 닿은 곳 없는 그 성을 이렇게 그리워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처음엔 주인만큼이나 어둡고 음침한, 아주 무서운 성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젠 그 주인도 전혀 무섭지 않지.’
그리워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건 아주 행복한 일이다.
그것이 그리울 만큼 지난 시간이 좋았다는 거니까.
문득 깨달은 행복함에 헤헤 웃으며 아이를 꼭 껴안으니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의 목소리였다.
“후작님. 비오스케스 공작저에서 상자를 하나 보내셨습니다.”
“어? 벌써?”
비오스케스 공작이라면 어렵지 않게 물건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빨리 받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안나가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작은 상자를 든 마리가 안으로 들어와서 그것을 내 앞에 내밀었다.
“심부름꾼에게 공작께서 따로 전하신 말은 없냐고 물었는데, 별다른 이야기는 없으셨다고 합니다.”
“응. 문제없이 내가 부탁한 걸 구하셨다는 뜻이겠지.”
난 아이를 작은 침대에 내려놓고 상자를 받아 들었다.
견고하게 닫힌 상자는 작은 크기에 비해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묵직했다.
“안에 뭐가 든 거예요?”
안나가 옆으로 다가와 상자를 살피며 물었다.
감히 주인의 물건에 먼저 관심을 갖는 건 사용인의 미덕이 아니었으므로, 마리가 질책하듯 안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제야 안나도 제 실수를 알아차리고는 급히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난 그 모습에 웃음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두 사람에겐 다 보여 줄 수 있어.”
“마님…….”
안나가 감격한 듯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주인의 물건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건 특히 가까운 시녀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마리와 안나에게 그런 특권이 없다면 내 주변의 어느 누가 그런 특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어?”
열린 상자 속에 든 물건을 보고 안나는 물론이고 마리까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돌……이네요?”
그랬다. 상자 안에 든 건 돌이었다.
척 봐도 귀한 상자 속에 든 게 겨우 돌, 그것도 다섯 개나 담겨 있는 걸 보고 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범한 돌이 아닌 거겠죠?”
“응. 어렵게 구해 온 거야.”
난 상자에서 돌을 하나 꺼내 안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제 손에 돌이 닿자마자 안나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뜨거워요!”
뜨거운 돌이 없는 건 아니다. 강한 태양 볕 아래에 오래 두면 차가운 돌도 뜨거워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상자 안에 한참이나 들어 있던 돌이 온기를 품고 있는 건 평범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뭐예요?”
“화산지대에서 종종 발견되는 신비한 돌이지. 화염석이야.”
“화염석이요?”
“강한 불의 기운을 품고 있어서 한겨울에도 열기를 낸대. 아주 귀한 돌이라 발견되면 바로 황실로 가져가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잘 몰라.”
비오스케스 공작도 내가 화염석 이야길 꺼내자 깜짝 놀라며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을 정도다.
‘그야 소설에서 봤지요.’
황자였던 3황자가 제틀런드에서 구해 온 알을 깨우려고 여러 방법을 시도하다 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던 화염석을 통해 부화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확실히 읽었다.
물론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 귀한 걸 공작께서 보내신 거예요? 어떻게 구하셨을까요?”
“비오스케스 공작님은 황실의 인척이시니까.”
적당히 입김을 발휘하면 화염석을 구해 오는 것도 가능하다.
그걸 알기에 비오스케스 공작에게 부탁한 거다.
‘그래도 다섯 개씩이나 보내실 줄은 몰랐는데.’
그만큼 우리와의 협력을 바라고 있다는 거겠지.
“공작께서 아주 귀한 출산 선물을 주셨네요.”
안나는 공작이 화염석을 보낸 이유가 출산을 축하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듯했다.
수도의 문화를 잘 아는 마리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의심스럽게 화염석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맞아. 공작님께서 귀한 출산 선물을 주셨어.”
난 화염석을 다시 상자 속에 넣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빙긋 웃어 보였다.
새를 깨울 방법은 준비됐으니 이제 알테어만 돌아오면…….
“마님!”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카인이 튀어 들어왔다.
귀족 여인의 방에 남자가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에 마리가 경악해서 입을 떡 벌렸지만, 카인의 입에서 곧 흘러나온 말이 그녀의 경악을 지워 버렸다.
“끝났습니다!”
“끝나다뇨?”
“전쟁이요!”
“……!”
모두가 놀라 카인을 쳐다보았다.
카인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작은 서신을 보여 주었다.
꼬깃꼬깃하게 접혀 있는 걸 보니 전쟁터에 있는 알테어와 전령 새를 통해 주고받은 서신인 듯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승전. 귀환이 결정됐다.
“세상에! 드디어!”
안나가 기뻐서 펄쩍 뛰었다. 마리도 표현은 안 하지만 미소를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삼키는 듯했다.
나 역시 알테어의 필체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에 카인이 그럴 줄 알았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실 것 같아서 서신을 확인하자마자 달려온 겁니다.”
“고마워죠. 그런데 손에 든 그건 뭐예요?”
카인의 손에는 내게 보여 준 서신 말고도 작은 쪽지가 함께 있었다.
“아…… 이건 마님이 아니라 제게 온 건데요…….”
말끝을 흐리는 모양이 퍽 수상했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카인 앞에 손을 척 내밀었다.
“숨기는 게 있군요. 주세요.”
“마, 마님…… 이건 보여 드릴 수가 없는데요…….”
“군사 기밀이면 안 볼게요. 하지만 그런 게 아니죠?”
정곡을 찔린 듯 카인이 난처한 얼굴로 안나와 마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에 응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뭔데 그래요? 마님이 내놓으라고 하시잖아요. 얼른 줘요.”
“맞습니다. 후작저에서 후작님의 말을 거역할 건 아니죠?”
오히려 안나와 마리가 내 말을 거들자 카인이 ‘사실 저도 숨기면 안 된다고는 생각했습니다만……’이라고 곤란해하며 쭈뼛쭈뼛 쪽지를 내밀었다.
난 얼른 쪽지의 내용을 살폈다. 역시 알테어의 필체였다.
‘전투 중 자상. 도착하면 바로 의사 선생을 만나야 해. 나디아에게는 알리지 마.’
“알테어가 다쳤다는 거예요?”
고개를 번쩍 들며 묻자 카인이 난처한 얼굴로 제 머리를 긁적였다.
“싸우다 보면 다치는 건 당연하지요. 마수 토벌을 다닐 때도 늘 다치셨어요. 원래 자기 몸을 보호하면서 싸우기보단 빠르게 휩쓸어 버리는 걸 선호하시는 편이라.”
“다치는 게 왜 당연해요. 정말…….”
난 속상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카인에게 명령했다.
“내가 다쳤다는 사실 알고 있다는 거, 말하지 말아요.”
“네?”
“도착해서 내 앞에서 어떻게 거짓말을 하나 봐야겠어요.”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고 카인에게 쪽지를 돌려주니 그가 하하 웃음을 흘렸다.
***
알테어가 보낸 서신이 바인 저택에 전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전체에도 ‘전쟁이 끝났다!’라는 소식이 퍼졌다.
거리에는 ‘호외요!’를 외치며 전쟁 승리를 알리는 종이를 뿌려대는 소년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전쟁 영웅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승리를 만끽했다.
그중에서도 알테어 에일스포드의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전쟁 영웅들이 언제쯤 도착할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사람들은 새벽부터 꽃을 들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소문으로만 돌았던 전쟁 영웅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잘하면 그들에게 축복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국 사람들은 전쟁 영웅에게는 신의 가호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들과 말을 섞거나 악수하면 그 가호를 나눠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덕분에 병사들이 귀환하는 날에는 수도 밖까지 인파가 몰려 도시 전체가 떠들썩했다.
“저기다! 온다!”
기대하며 영웅들을 기다리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크게 외쳤다.
고개를 쭉 빼고 먼 곳을 바라보니 정말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위용을 뽐내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와아!”
사람들은 함성을 쏟아 내며 승전보를 안고 돌아온 영웅들을 환영했다.
선두에는 3황자 오르카가 있었고, 그 옆에는 이 전쟁의 가장 큰 스타 알테어 에일스포드가 차지했다.
금발의 황자와 흑발의 남작은 외모마저 수려해 사람들의 환호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오르카는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은 흔들며 알테어에게 말했다.
“손 안 흔들어 주십니까? 다들 남작을 환영하고 있는데요.”
“혼자 즐기십시오.”
“재미없기는.”
오르카가 픽 웃으며 알테어의 옆구리를 힐끗댔다.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제대로 치료해야 합니다. 혹시 상처가 번져서 큰일이 생겨도 내 탓은 아니에요. 거기서 치료하고 오자니까 급히 귀환하자고 했던 건 남작입니다.”
“문제 생겨도 전하 탓은 안 하니까 걱정 마십시오.”
“남작은 그렇게 생각해도, 후작은 나한테 화를 낼 수도 있잖습니까. 후작이 화를 내면 내 탓이 아니라고 꼭 말해야 됩니다?”
나디아 이야기가 나오자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던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오르카를 쳐다보았다.
“제 부인이 화내는 것까지 신경 쓰실 이유는 없으실 텐데요.”
“왜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까? 후작에게 밉보이면 남작까지 적으로 돌리는 건데. 전쟁터에서 그렇게 무섭게 싸우는 사람을 적으로 두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미 제가 적이라고는 생각 안 하시는지.”
“아. 우리 사이가 그렇게까지 나빴나요?”
오르카 황자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알테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여우 같은 놈’이라고 생각하는 게 뻔했다.
오르카 역시 알테어의 생각을 다 알겠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잘 부탁합니다, 남작. 아마…… 이번이 그대를 남작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