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귀여운 남자가 되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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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귀여운 남자가 되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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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귀여운 남자가 되어야죠.
2022.12.04.
다음에 만날 때는 아마 더 높은 자리에 있겠지.
‘역시 탐나는 인재인데.’
하도 거절당해서 이제는 내 편이 되라는 말을 할 생각도 안 들었다.
내 편이 되라고 할 때마다 오히려 반감만 키우는 기분이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훗날 아버지의 시대가 저물고 둘째 황자와 자신의 경쟁이 벌어졌을 때만 적으로 안 만나면 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적당히 밑밥을 깔아 놨으니 그저 시간이 흐르길 기다릴 뿐이었다.
오르카 황자는 영리하게 자신이 알테어에게 지운 빚을 상기시켰다.
“그러고 보니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않다더군요. 그 후작의 사촌 말입니다.”
알테어가 슥 고개를 돌려 오르카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오르카가 빙긋 웃으며 ‘내가 이렇게 큰 도움이 되었단다’를 어필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부인에게 애를 셋이나 맡기고 매일 여자들이랑 놀아난다고 하더군요. 남편의 무관심이 가문 안에서 부인의 입지를 얼마나 어렵게 하는지, 남작도 알 테죠.”
그 뒤로도 오르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부인이 사기 결혼을 당했다며 이혼을 요구한다는 이야기.
수도에서 번쩍번쩍한 모습으로 왔던 귀부인이 이젠 거의 거지꼴이 되었다는 이야기.
시부모가 남편의 마음도 못 잡는 모자란 것이라며 매일 구박한다는 이야기.
결혼 생활의 온갖 절망을 모아 둔 것 같은 이야기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아들었으니 거기까지 하시죠.”
알테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오르카를 말렸다.
오르카가 굳이 소식을 전해 주지 않더라도 알테어는 멜리사 바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하고 있었다.
아바르 바인의 행적을 놓쳤다가 무슨 일이 벌어졌나?
그 아비에 그 딸이라고, 멜리사가 언제 미친 짓을 할지 모르니 늘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오르카 황자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제대로 생색을 내고 싶었던 거다.
“무슨 말인지 안다면 다행이고요. 그런데 그건 도대체 뭐였습니까?”
오르카 황자가 알테어의 레그백을 쳐다보며 물었다.
“부상도 그것 때문에 당한 거잖아요. 좀 특이한 알처럼 보이긴 했지만, 적에게 등을 내어 줄 정도로 중요한 거였습니까?”
알테어가 챙기지 않았다면 자신이 챙겼을 정도로 특이한 알이긴 했지만, 그래도 부상을 각오하면서까지 손에 넣을 만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알테어는 캐묻는 오르카가 귀찮다는 듯 성의 없이 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대충 대답했다.
“신기한 거 모으는 걸 좋아합니다.”
“흐음…… 그리 물욕 있는 사람은 아닌 걸로 아는데.”
“아내한테 선물하면 좋을 것 같았거든요.”
“아.”
의심스럽게 알테어를 쳐다보던 오르카 황자가 바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그대는 그런 타입이군요.”
“그런 타입이요?”
“해변에서 예쁜 돌을 주워 연인에게 선물하는 타입이요. 상당히 의외인데, 어찌 보면 또 어울리기도 하고.”
오르카 황자가 씩 웃으며 정면을 가리켰다.
“저 문만 지나면 수도로군요.”
정면으로 쭉 따라가는 길 앞에 거대한 문이 있었다. 수도로 입성하는 문이었다.
“그렇군요.”
알테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은 벌써부터 소란스러웠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모든 경계와 긴장이 무뎌져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이토록 행복한 일이었다니.
그 집에서 나디아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알테어는 그렇게 수도에 입성했다.
***
“영주님! 이 녀석들!”
알테어가 기사들과 함께 조용히 바인 저택에 들어서자 카인이 호들갑을 떨어 대며 모두를 맞이했다.
“제틀런드는 어땠습니까? 마수들은 강하던가요? 이야, 다들 반쪽이 됐네!”
“비켜. 정신 사납다.”
알테어가 한숨과 함께 소란을 떨어 대는 카인을 밀어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블란도 시끄러워 죽겠다는 듯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거기에 굴할 카인이 아니었다.
“부상은요? 얼마나 심하신데요? 의사 선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입 좀 어떻게 못 하나? 나디아가 알아채면 안 된다.”
“뭐…….”
질책당한 카인이 어깨를 으쓱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좀 살겠다는 듯 알테어가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해산해서 편히 쉬도록 해. 보름 휴가다.”
“예!”
평소처럼 쩌렁쩌렁하게 대답하던 기사들이 알테어의 눈총에 황급히 입을 다물고 흩어졌다.
심기가 상한 알테어가 휴가를 없던 일로 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블란도 흩어지는 기사들 사이에 섞여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자, 카인이 얼른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어허. 부관은 휴가 가라고 안 하셨다. 어차피 쉰다고 갈 곳도 없으면서.”
“영주님!”
블란이 제발 살려 달라는 듯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간절한 눈빛에 알테어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블란, 너도 보름 휴가다.”
“감사합니다!”
“카인. 블란이 없는 사이에 네가 부관이다.”
“……예? 저요? 이제 막 복귀하셔서 할 일이 엄청 많으실 텐데, 제가 부관요?”
생각지도 못하게 자신에게 일이 넘어오자 그가 입을 떡 벌렸다.
블란은 그런 카인을 향해 코웃음을 흘리고 얄밉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역시 마님 편을 들길 잘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알테어가 투덜거리는 카인의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제가 무슨 소리를 하든 뭐가 중요합니까. 하나도 안 중요하지.”
카인은 친절하게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부루퉁한 얼굴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은 별채에 불러 놨습니다. 어서 가서 치료부터 받으시죠. 걸음이 평소 같지 않으신 거 보니 생각보다 큰 부상이신 듯한데.”
카인이 고개 돌려 알테어의 옆구리를 힐끗거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묘한 변화였지만, 알테어와 오래 검을 맞댄 카인은 다른 점을 빠르게 찾아냈다.
걸음이 미세하게 다른 것만으로도 부상 부위며 심각성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나디아 몰래 의사를 부른 거지. 크게 다친 걸 알면 걱정할 거다. 안 그래도 신경 쓸 일이 많은 사람인데.”
“그~ 러~ 니~ 까~ 마님은 그런 배려를 전혀 바라지 않으신다니까요.”
카인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냥 ‘여보, 나 아파 죽겠어!’ 하고 어리광 부리면서 간호나 받으시지. 얼마나 기회가 좋습니까?”
애교 가득한 ‘여보, 나 아파 죽겠어!’에 알테어가 질린 얼굴로 카인을 쳐다보았다.
“그런 말을 어떻게 입 밖에 내지?”
“허. 참. 못할 게 뭐가 있다고요? 상남자가 환영받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겁니다. 부인에게 귀여운 남자가 되어야죠. 암. 그렇고말고.”
카인이 자신의 지론을 설파하며 슬쩍 알테어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혹시, 만약에, 어쩌다 보니 곤란한 상황이 되셨다면 어리광 작전으로 가시라 그 말씀입니다.”
“됐다. 그럴 일은 없어.”
알테어가 헛소리는 그만하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디아를 만나기 전에 간단하게라도 치료를 받는다면 들킬 일은 없었다.
마침 별채에 도착해 알테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분명 의사 선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는데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분위기가 묘했다.
사람의 기척이 분명 느껴지는데 의사 선생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 기운이 매우 익숙했다.
‘이 기운은…….’
단번에 나디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디아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한 순간 투덜거리던 카인의 입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번뜩 머리를 스쳤다.
“……역시 마님 편을 들길 잘했어.”
저 자식이 다 말했구나!
알테어가 이를 바드득 갈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문은 이미 굳게 닫힌 채로 카인은 벌써 내뺀 후였다.
그리고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던 곳에서 예상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테어.”
나디아였다.
알테어는 그대로 굳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부하의 배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데다가, 잔뜩 화가 난 나디아의 얼굴까지 마주하니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무사히 돌아오기로 약속했으면서. 그걸 어긴 것도 모자라 날 속이려고 해요?”
나디아가 평소의 유순한 표정과 말투를 버리고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알테어를 질책했다.
“……무사히 돌아오긴 했어.”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내가 말한 ‘무사히’에는 큰 부상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도 있었어요!”
“명시되지 않은 부분은…….”
지킬 의무가 없다. 그게 맞는 말이긴 하다.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요?”
하지만 나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미약하게 반박하던 알테어의 입이 다시 꾹 다물렸다.
덩치 커다란 남자가 작은 여자 앞에서 어깨를 움츠린 채 잔뜩 쪼그라들어 있는 모습이 썩 볼만했다.
나디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어딜 얼마나 다쳤는지 솔직하게 말해요.”
“그리 큰 부상은 아냐.”
“큰 부상이 아닌데 몰래 카인에게 의사를 청했어요?”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부상이라고 생각했다면 의사를 부르지도 않았을 거다.
나디아의 지적에 알테어의 입이 다시 꾹 다물렸다.
“……여기.”
알테어가 조심스럽게 제 옆구리를 가리켰다.
나디아는 당장 손을 뻗어 알테어의 상처를 확인했다.
“윽.”
살짝 손이 닿은 것뿐인데도 알테어가 움찔했다. 나디아는 놀라서 알테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다쳤으면 이래요?”
“상처를 제대로 수습 못 하고 와서 그래. 귀환을 서두르느라.”
“치료하고 오지 그랬어요. 뭐가 급하다고 이렇게 무리했어요.”
“급하지. 왜 안 급해.”
알테어의 눈이 똑바로 나디아를 향했다.
“당신은 급하지 않았어?”
“나도 그, 급했지만…….”
살짝 얼굴이 빨개진 나디아가 알테어의 팔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빨리 오길 바란 건 아니란 말이에요.”
“당신이 찾아오라던 알도 가져왔어. 그건 여기에…….”
알테어가 얼른 레그백에서 알을 꺼내려고 하자 잠시 가라앉았던 나디아가 다시 화를 내며 그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아니, 중요하지만, 그래도!”
알테어는 어쩔 줄 몰라 허둥댔다. 허공을 맴도는 손이 나디아를 붙잡지도 못하고 방황했다.
그때 카인의 목소리가 다시 알테어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니까 혹시, 만약에, 어쩌다 보니 곤란한 상황이 되셨다면 어리광 작전으로 가시라 그 말씀입니다.”
엄살 피우는 건 절대 못 한다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하냐고 카인을 타박했지만, 지금 의지할 건 그 조언뿐이었다.
“……아야.”
알테어가 부상 입은 부위를 손으로 감싸며 어색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를 잔뜩 걱정하고 있던 나디아는 그게 어색하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펄쩍 뛰었다.
“역시 아프죠? 많이 아파요?”
“응.”
“어떡해…….”
울상이 되어 발을 동동 구르는 나디아를 보며 알테어는 생각했다.
카인, 그놈이 배신하긴 했어도 살길은 열어 주고 갔구나.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내가 많이…… 아픈데…….”
겨우 꺼낸 말에 나디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놀란 반응을 보니 역시 카인의 조언이 틀리지 않은 건가!
알테어는 조금 더 용기를 내 분명하게 말했다.
“여보. 나 아파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