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계속 옷 입고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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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계속 옷 입고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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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계속 옷 입고 있겠네요?
2022.12.07.
정말 놀랐다.
여보라니? 아파 죽겠다니?
알테어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지 않는 소리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다치고 온 것도 모자라서 그걸 숨기려고 한 남편을 단단히 혼내겠다는 생각으로 온 건데.
생각보다 부상이 심각하긴 한 모양이었다.
“호, 혹시…….”
난 너무 걱정되어 까치발을 들어 알테어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머리도 다친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알테어가 이런 반응일 리가 없는데!
“…….”
내 반응에 알테어가 눈을 껌뻑이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분명 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서늘하고 음산하게 느껴졌다.
내가 소설 속에서 읽었던 악당 공작 알테어의 모습을 상상하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죽여 버리겠어, 카인 그 자식.”
“카인이요?”
갑자기 카인을 왜?
아, 혹시 다친 걸 나한테 말해서?
아군이 되어 준 사람이 혼날 위기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카인은 잘못 없어요. 내가 쪽지를 먼저 발견했거든요. 내가 추궁하니까 카인은 어쩔 수 없이 알려 준 거고요.”
“……걱정 마. ‘그 부분은’ 질책하지 않을 테니까. 당신이 날 걱정해서 묻는데 끝까지 숨길 순 없었겠지.”
“정말요?”
“그래. 그 부분은 절대 질책하지 않을게.”
확답을 받으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카인! 내가 카인을 지켰어요!’
난 보이지 않는 카인을 향해 잠깐 생색낸 뒤 다시 알테어의 상처로 관심을 돌렸다.
“곧 리온도 올 거예요. 당신과 이야기하려고 조금 뒤에 오라고 했거든요.”
“정말 걱정할 상처는 아냐. 전쟁터는 아무래도 의료 상황이 열악하니까 급히 처치한 게 어설펐던 거고. 의사 선생 정도면 금방 고칠 수 있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보내긴 했지만 다쳐서 돌아온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침울하게 입을 꾹 다물자 알테어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끌며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무척이나 가까워서 마음이 안정되는 듯했다.
“그러지 말고 이거부터 봐.”
알테어가 레그백에서 알을 꺼냈다.
소설 속에서 묘사하던 것과 똑같은 신비한 알이었다.
“아주 단단하던데. 꽁꽁 언 것처럼.”
알테어가 내게 알을 건넸다.
하지만 꽁꽁 얼었다는 표현과 달리 알은 그리 차갑지 않았다.
“정말로 이 안에 생명이 잠들어 있어?”
“네. 믿기 힘들겠지만요.”
“믿어. 당신이 한 말이잖아.”
알테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럼 이제 이 생명을 어떻게 깨우느냐 하는 건데.”
“아! 그 방법은 이미 준비해 뒀어요!”
난 얼른 알테어에게 화염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비오스케스 공작과 거래해 이미 그걸 구해 뒀다고 말하니 알테어가 눈이 조금 커졌다.
“전쟁터에서 괜히 신경 쓸 것 같아서 거래 이야긴 안 했어요.”
“아니. 그 거래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알테어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비오스케스 공작이 거래 대상으로 내세웠다는 그자, 내가 이번 전쟁에서 인상 깊게 봤던 사람이라 조금 놀랐을 뿐이야.”
“어떻게 인상 깊었는데요? 나쁜 쪽은 아니라고 해 줘요. 그런 사람이면 거짓말로 공을 나눠 주는 것도 힘들잖아요.”
“다행히 긍정적인 쪽으로 인상 깊었어. 한때 공작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자라 그런지 자질은 충분하던데.”
알테어는 타인을 후하게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의 까다로운 기준에서 ‘자질이 충분하다’라는 평가가 떨어졌을 정도면 보통 인물은 아니란 뜻이다.
“그럼 비오스케스 공작께서는…….”
“헛수고하신 거지. 딱히 공을 나눠 주지 않아도 충분히 보상받을 만한 사람이야. 아주 높은 자리까지는 힘들어도 남작이나 자작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을 알게 된 비오스케스 공작은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며 허무해하지 않을까?
“그래도 약속하신 거니까 공작 작위까진 힘써 주셨으면 하는데…….”
“공작 작위라니?”
내 혼잣말을 들은 알테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제틀런드 공작이요. 그 자리를 알테어가 받을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했거든요.”
“제틀런드 공작이면…….”
알테어가 익숙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 읽었다는 이야기 속의 그 악당이 제틀런드 공작이었지.”
“맞아요.”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알테어가 다소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당신은 그 이야기대로 움직이는 게 싫지 않아? 내가 정말로 그 악당처럼 되면 어쩌려고.”
“음. 막 결혼했을 때는 그게 진짜 걱정되고 무서웠는데요. 이젠 아니에요.”
난 헤헤 웃으며 알테어의 손을 잡았다.
오래 검을 쓴 사람답게 곳곳에 굳은살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난 그의 손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알테어가 그렇게 안 될 거라는 걸 내가 너무 잘 알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제틀런드 공작이 되면 좋겠어요. 내가 이야기를 비틀지 않았다면 그건 당신 것이 되었을 테니까요.”
“당신이 이야기를 비틀지 않았다면, 난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망나니가 됐겠지.”
“역시 그 이야기가 잘못된 것 같아요! 알테어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내가 이야기를 쓴 작가를 욕하며 투덜대자 알테어가 픽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사람은 모르는 거야. 한순간 돌아 버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그래도 알테어를 믿어요.”
난 흔들리지 않고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그가 내 눈을 통해서 진심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눈을 마주한 채 알테어가 살짝 미소 지었다. 진심이 전해졌다는 뜻이었다.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돌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거야. 그러니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지.”
“아니에요. 알테어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만들 수도 있었던 거예요. 마음에 싹이 없다면 아무리 물을 줘도 꽃은 안 피거든요.”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알테어의 손이 어느새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무엇을 재촉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나디아.”
알테어의 두 눈에 화염석보다도 더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오늘 밤에…….”
“다 좋은데 치료부터 받으시죠.”
알테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리온이 나타났다.
그는 길게 하품하며 진료 도구를 가지고 터벅터벅 걸어와 알테어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나도 어서 치료받으라며 등을 떠밀자 알테어는 별 저항 없이 리온의 손길에 따랐다.
“카인 경 말로는 왼쪽 옆구리 쪽 부상이라던데 맞습니까?”
“정확해.”
“그럼 상의를 벗어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알테어가 자연스럽게 상의를 벗으려다 날 가만히 쳐다보았다.
“곁에 있으려고?”
“네.”
“부끄러운데.”
알테어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부끄럽다는 소릴 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걸 알지만 내게 상처를 보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싶어서 순순히 그의 말을 믿어 주기로 했다.
“부끄러움 많아서 오늘 밤에도 계속 옷 입고 있겠네요?”
“…….”
“푸흡.”
알테어는 침묵하고 리온은 웃음을 삼켰다.
***
그리고 알테어는 정말로 밤에도 계속 옷을 입고 있었다.
리온은 빨리 치료하지 않아서 상처가 많이 벌어졌다며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벌써 죽고도 남았을 거라고 알테어를 질책했다.
환자를 질책하는 건 의사의 특권이라 그는 신이 나서 알테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알테어는 절대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겠으며 약도 꼬박꼬박 잘 먹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리온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게 꼭 말 안 듣는 어린애들한테나 하는 당부 같아서, 난 그 이야길 듣고 한참이나 웃음을 터트렸다.
“나디아. 언제까지 웃을 거야?”
“내가 웃으면 싫어요?”
“당연히 좋지만…….”
알테어가 웃고 있는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예고 없는 입맞춤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테어가 웃으며 다시 입술을 맞댔다.
순식간에 깊어진 입맞춤에 나는 대응할 새도 없이 휘말렸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거리가 가까운 입맞춤이 알테어가 진짜 원하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당신이 웃으면 못 참게 되니까, 의사 선생과의 약속을 깨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 웃어.”
“아, 안 웃을게요.”
난 벌게진 얼굴로 후다닥 알테어에게서 멀어지며 얼른 상자를 가져왔다.
비오스케스 공작에게 받은 화염석이 든 상자였다.
“여기에 알을 함께 넣어 두면 돼요. 화염석의 온기가 잠든 생명을 깨울 테니까요.”
알테어가 고개를 끄덕이고 알을 화염석 사이에 놓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서서히 차가운 알이 녹아내리고 있을 터였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에요.”
“얼마나?”
“음…… 제가 읽었던 이야기에서는 일주일 정도였어요.”
“일주일.”
알테어가 되새기듯 일주일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럼 일주일 후에는 우리 아이의 이름을 지어 줄 수 있는 건가?”
“생각해 둔 이름 있어요?”
“글쎄. 난 이런 쪽은 전혀 감각이 없어서…….”
“에이. 감각이 뭐가 중요해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붙여 주면 되죠.”
“하지만 다들 내 작명 감각이 아주 별로라고 했거든.”
알테어가 과거를 회상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성에서 말이 출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다들 내가 영주이니까 영주님이 이름을 지어 주라면서 부추겼거든.”
“그렇죠. 성에서 태어난 말이라면 보통 영주가 이름을 짓잖아요.”
“그래. 뭐든 좋다길래 생각나는 이름을 말했더니 다들 그건 안 된다며 말리더군.”
“네? 무슨 이름이었는데 그렇게까지……?”
“다치지 말자-라는 의미에서 말자. 군마로 쓰일 녀석이었으니까, 그런 놈들은 안 다치는 게 가장 큰 미덕이거든.”
난 귀를 의심했다.
말자? 다차지 말라는 의미로 말자?
‘심지어 다치지 말라는 염원이 선량해서 더 무서워…….’
장난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망아지를 축복하는 심정으로 진지하게 ‘말자’라는 이름을 붙이려 했다는 거 아닌가?
원래 장난스러운 것보다 진지한 게 더 무서운 법이다.
‘아, 아이 이름은 내가 책임져야 해!’
갑자기 엄청난 사명감이 밀려왔다.
알테어에게 이름을 맡겼다간 ‘예쁜 아이니까 예삐’ 같은 기절초풍할 작명이 나올지도 모른다.
“아, 아이 이름은 좀 더 고민해 봐요! 좋은 책의 구절을 따서 짓거나, 오래전 위인의 이름을 빌려 와도 좋죠.”
이럴 때는 이미 있는 사례를 변형하는 게 실패 확률이 낮다.
내 말에 알테어도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어때? 좋아하는 구절이나 존경하는 사람이 있나?”
“음…….”
머릿속을 스쳐 가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이 사랑의 봄은 사월 어느 날의 변덕스러운 영광을 닮았구나.”
찬란한 태양이 영원할 것처럼 내리쬐는 듯싶다가도, 어느새 구름이 몰려와 모든 것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와 알테어는 서로를 사랑하게 됐다.
함께 있으면 뭐든 다 좋을 것 같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일도 함께 이겨 내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랑이 변덕스러운 영광인 것이다.
떠오르는 구절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속내가 전부 들킨 기분이라 난 민망하게 웃음을 흘렸다.
“예전에 살던 곳에서 읽었던 어떤 이야기 속에 나오는 구절인데…….”
“영광.”
알테어가 내 말을 다 이해한다는 듯 살짝 웃으며 단어를 집어냈다.
“글로리아. 좋은 이름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