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공작님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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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공작님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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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공작님이라니!
2022.12.11.
황제는 전쟁 영웅들에게 빠르게 보상을 내렸다.
가장 첫 번째로 이름이 오른 건 그의 아들 오르카 황자였다.
황제의 아들인 데다 전선을 지휘한 총책임자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아들의 유능함을 크게 치하하며 그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가 가장 아끼는 반지를 오르카 황자에게 보냈는데, 그걸 들은 둘째 황자가 길길이 날뛰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반지가 황제가 선황에게 선물 받은 반지였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황제에게만 전해지는 반지는 아니었지만 몇 대를 이어 후계자에게 전해진 반지이다 보니 다들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눈치였다.
‘어쨌든 오르카 황자는 원하는 걸 얻은 셈이네.’
이제 황제의 후계자를 언급하면 다들 오르카 황자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테니 말이다.
알테어는 그런 오르카 황자에 이어 두 번째로 보상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황제는 알테어에게 제틀런드의 땅과 함께 공작 작위를 내렸다.
이로써 알테어는 제틀런드 공작이면서 에일스포드 남작, 두 개의 작위를 갖게 됐다.
순식간에 지위가 몇 단계는 올라간 것이다.
곧 이에 대한 작위 수여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이러한 파격적인 처우에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크게 잡음이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 비오스케스 공작이 손을 잘 써 두었기 때문이겠지.’
비오스케스 공작은 그 대가로 자신이 바랐던 사람의 이름을 보상 리스트의 일곱 번째에 올릴 수 있었다.
알테어의 말로는 따로 신경을 안 썼어도 10번 대에서 이름이 오르내렸을 사람이라는데, 약간의 이득을 본 셈이었다.
“공작이라니. 우리 영주님이 공작이라니!”
알테어가 큰 보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기사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동안 작은 시골 영주 밑에서 일하며 친근하게 지내왔는데, 갑자기 공작이라는 높으신 분이 된 게 다들 영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난 조용히 화염석 사이에 둔 알을 쳐다보며 블란과 카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영주님께 좀 더 깍듯해져야 하는 건가?”
카인이 의아해하자 블란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원래도 깍듯했어야지. 남작은 작위도 아니냐?”
“아니…… 그래도 공작님은 공작님이잖아. 귀족 중에 제일 높은 자리고, 남작은 저어어어어기 끄트머리니까…….”
힐끗 쳐다보니 카인이 손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키며 자신이 체감하는 자리의 무게를 설명하고 있었다.
남작은 그래도 여럿 있지만, 공작은 정말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숫자니까 카인이 갑자기 거리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알테어가 공작이 됐다고 갑자기 달라지진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열심히 읽었던 소설 속에서도 딱히 공작의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무섭고 미친 사람 같았을 뿐이지.’
하지만 지금은 무섭고 미치진 않았으니까…….
“어?”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카인이 뭔가를 발견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러나 싶어 카인을 쳐다보니 그가 내 쪽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마님! 금! 금이 갔습니다!”
“네?”
난 화들짝 놀라 다시 알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인의 말처럼 알에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나야 바로 앞이니 이게 보인다지만, 멀리서 이걸 볼 정도면 시력이 얼마나 좋은 거람.
난 감탄하며 유심히 알을 관찰했다.
그러자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알이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미세한 금이 점점 선명해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블란과 카인은 물론 아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안나까지 다가와 알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알테어가 제틀런드에서 신비한 알을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사용인들 사이에 쭉 퍼져서 다들 언제 이놈이 깨어날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빠각!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작은 새의 발이 오색으로 반짝이는 알을 뚫고 나왔다.
힘겹게 알을 깨고 나온 새는 미약하게 날개를 움직이며 연약한 다리로 비틀대며 주위를 걸었다.
무사히 부화한 것이다.
이 녀석은 수컷이었다.
완전히 자라면 제 고향으로 날아가 잠들어 있는 반려의 알을 깨우고 번식을 시작할 것이다.
그럼 황폐해졌던 제틀런드의 생태계도 서서히 작동하겠지.
“세상에.”
안나가 생명의 탄생이 경이롭다는 듯 감탄했지만 내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아기!’
신과 약속했던 것처럼 라트람을 부화시켰으니 이제 아이의 목숨은 안전하다.
이젠 이름을 붙이는 것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난 당장 작은 침대로 다가가 아이를 안아 올렸다.
“글로리아.”
알테어와 둘이서만 몰래 지어 뒀던 이름을 귓가에 속삭이자 그게 제 이름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아이가 꺄륵 웃음을 흘렸다.
“글로리아요?”
새의 움직임에 푹 빠져 있던 세 사람도 이름에 관심을 가졌다.
“드디어 아기님의 이름을 정하신 건가요?”
“글로리아라. 예쁜 이름인데요. 마님께서 생각하셨나요?”
블란의 질문은 맞고 카인의 질문은 틀렸다.
“네. 이름을 정했어요. 글로리아라는 이름은 알테어가 생각했고요.”
내가 떠올린 문장에서 알테어가 건져 올린 이름이니까, 알테어가 생각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내 말에 세 사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르는 사이 영주님 작명 솜씨가 많이…… 나아졌는데요.”
“말 이름을 말자라고 지었던 건 아주 충격적이었죠. 저희가 막지 않았다면 그 불쌍한 녀석은 진짜 말자가 되었을 겁니다.”
블란과 카인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음. 이 애는 영광이가 아니라 글로리아가 됐으니 다행이네요.”
알테어의 단순한 작명 구조라면 영광이가 되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알테어는 지금 어디 있어요?”
부관인 블란을 보며 묻자 블란이 카인을 쳐다보았다.
“전 휴가 중이니 영주님의 동선은 카인이 압니다.”
“어? 휴가 중인데 여기 왜 있어요?”
“그야 여긴 아기님도 계시고, 신비한 알도 있고, 마님도 계시니까요. 수도에는 달리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휴가 중인데도 주인이 있는 곳에 나와 따뜻함을 누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네. 난 이곳 출신이지만 다들 에일스포드에 연고가 있으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니 수도에 너무 오래 있었구나 하는 실감이 느껴졌다.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수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었다.
이제는 에일스포드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카인에게 물으니 다소 난처한 기색으로 알테어가 개인 훈련 중이라고 했다.
‘분명 리온에게 무리한 움직임은 금지당했는데 말이야.’
하루라도 훈련을 안 하면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는 건지.
그게 알테어답다면 알테어다웠다.
리온의 눈에 띄지 않고 개인 훈련을 한다면 장소야 뻔했다.
후작 부부만 드나들 수 있는 정원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을 거다.
난 아이를 안고 예상되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정원에 다다르자 역시나 검이 허공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깔끔하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라 위협적이기보다는 시원하게 느껴졌다.
알테어는 멀리서부터 나와 아이의 기척을 느낀 건지 바로 검을 갈무리하고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나디아.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아기까지 데리고.”
얼굴에 살짝 염려스러운 기색이 떠오른 걸로 봐서는 아이에게 문제가 생겨서 데려온 건가 걱정하는 눈치였다.
“알에서 새가 나왔어요!”
난 활짝 웃으며 아이를 알테어의 품에 안겨줬다.
“자. 정식으로 ‘글로리아’에게 인사해요. 당신이 지은 우리 딸 이름이잖아요. 이제 마음껏 불러도 돼요.”
얼떨결에 아이를 받아 든 알테어가 머뭇대며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아이를 쳐다보았다.
“……글로리아.”
입으로 이름을 내뱉으니 정말로 아이가 우리 품 안에 안겼다는 실감이 난 건지 알테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제 모두 안전한 거지? 당신도, 글로리아도.”
“네. 이제 모두 안전해요. 신의 응답은 아직 없었지만…….”
아이에게 글로리아라는 이름을 불러 줬을 때 저주가 내리지 않았던 걸 보면 거래는 성사된 듯했다.
“그러니 이제 슬슬 움직여도 될 것 같아요.”
“움직이다니?”
“집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다고요. 글로리아에게 아버지의 땅도 보여 줘야죠. 작위 수여식이 끝나면 에일스포드로 가요.”
“바인 후작저는 어쩌고?”
“후작저 관리는 마리에게 맡기려고요. 사실은 나보다 후작저를 잘 알아요. 업무는 에일스포드에서도 처리할 수 있고요. 무엇보다 제틀런드는 수도보다 에일스포드에서 더 가까우니까, 그쪽까지 신경 쓰려면 거점은 에일스포드가 되는 게 낫잖아요.”
차분하게 알테어를 설득하고 있자니 내 고향이 에일스포드고, 알테어의 고향이 수도인가 싶을 정도였다.
알테어는 세심하게 내 얼굴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지내기에 수도가 더 편하지 않나? 뭐든 구하기도 쉽고, 유행도 빠르고.”
“확실히 수도가 그런 면이 있죠. 하지만 그런 걸 이유로 자기 집을 떠나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내 집은 에일스포드예요. 내가 ‘바인 후작’ 나디아 에일스포드인 건 잊지 않았죠?”
후작 작위를 받았어도 여전히 내 공식적인 이름은 나디아 ‘에일스포드’였다.
알테어와 결혼한 후로 쭉 그랬다. 그러니 내 집은 에일스포드다.
“게다가 수도에서 유행하는 거, 내가 구하고 싶은 거. 필요하다면 에일스포드에서도 알테어가 다 구해 줄 거잖아요?”
“당연하지.”
알테어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망설임 없는 긍정에 모든 것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같이 집에 가요. 우리 글로리아랑 함께.”
***
전쟁 영웅들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날이었다.
이 일로 작위를 받는 이들이 여럿 있는 데다가, 황제가 크게 승전 축하 파티를 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작위 수여식은 아주 화려하게 진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만천하에 제국의 위용을 뽐내는 자리니까 황제도 욕심이 났을 거다.
나와 알테어는 오랜만에 열심히 치장하고 황궁으로 향했다.
평소에도 멋진 알테어지만 신경 써서 옷을 빼입은 알테어는 예술품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마차에서부터 빤히 쳐다보며 웃으니 알테어가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창밖만 바라봤다.
그게 재밌어서 난 더 열심히 알테어의 뺨을 쳐다봤고 말이다.
작위 수여식이 열리는 대연회장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귀족들이 화려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바인 후작 나디아 에일스포드 님, 에일스포드 남작 알테어 에일스포드 님 드십니다!”
입구에서 시종이 크게 나와 알테어의 등장을 알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예전에는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었는데, 이번에는 열심히 우리의 모습을 살필 뿐 감히 가까이 다가오질 못하고 있었다.
이건 권위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처음 알테어와 수도에 왔을 때 우리는 운 좋게 마정석 광산으로 부자가 되어 인생 역전에 성공한 졸부 정도로 여겨졌을 거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난 역사 깊은 명문가 바인 후작가의 주인이 되었고, 알테어는 전쟁 영웅으로 곧 공작이 될 몸이었다.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고 말을 걸 수 있는 건 동등하거나 위치가 높은 사람뿐이지.
이제 공작이나 직계 황족이 아니라면 누구도 나와 알테어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게 된다.
아직 알테어가 공작이 된 건 아니었지만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라 몸을 사리는 듯했다.
그때 우리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곁으로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걸었다.
“바인 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