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아무래도 결혼을…….
(160/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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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아무래도 결혼을…….
2022.12.14.
오르카 황자가 환하게 웃으며 우릴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매우 친근한 태도라 ‘전쟁을 함께 치르며 친해진 건가?’ 싶어 알테어를 쳐다봤지만, 그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잔뜩 서린 걸 보면 그건 아닌 듯했다.
어쨌든 황족이 먼저 다가와 인사하니 우리도 예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냥 평범한 인사였을 뿐인데 오르카 황자가 반색했다.
“제틀런드에서 남작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부대 지휘에도 큰 도움을 받았고요.”
“지휘에도요?”
“전장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는 남작이 내 지휘에 의문 없이 따르니까요. 다소 의문스러운 면이 있어도 다들 아무 말도 못 했죠. 덕분에 내가 편하게 부대를 통솔했고요. 그런데…….”
오르카 황자가 말끝을 흐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나와 알테어를 살폈다.
“그렇게 내 지휘에 순응했던 이유가 부인의 명 때문이었다지 뭡니까. 내 전략을 신뢰해서 그런 줄 알았다가 이유를 듣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입으로는 실망했다고 하지만 전혀 그런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안심입니다. 후작이 날 못 믿는 줄 알았는데 내 지휘에 잘 따르라고 남작을 달래기까지 했다니.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오르카 황자가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걸 잡아야 하나 고민도 하기 전에 옆에서 불쑥 알테어가 손을 내밀어 오르카 황자와 악수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알테어가 맞잡은 손을 두어 번 대충 흔든 뒤 오르카 황자를 쫓아냈다.
억지로 떠밀린 것이지만 오르카 황자는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난 멀어지는 오르카 황자의 모습을 쳐다보다 알테어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내가 시켜서 말 잘 들은 거라고 그랬어요?”
“실제로 그랬으니 그렇다고 말했을 뿐이야.”
알테어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황자의 전략은 확실히 훌륭했지만 위험 부담이 많은 수였어. 당신 조언이 아니었다면 쉽게 따르지는 못했을 거야.”
“대충 변명할 수도 있었잖아요.”
“있었겠지. 하지만 저 여우 같은 황자가 그걸 몰랐을까? 자기 전략이 여러모로 모험수라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인데.”
“그야 그렇겠지만…….”
난 묘한 기분으로 훌쩍 멀어진 오르카 황자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알테어와 내 관계가 달라지면서 사건의 흐름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소설 속에서 봤던 것처럼 오르카 황자가 마냥 못 믿을 만한 여우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내가 읽은 이야기 속에서 오르카 황자는 알테어를 철저하게 도구로 사용하고 마지막 순간에 그를 버렸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오르카 황자는 알테어에게 썩 호감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내게도.’
많은 것들이 바뀌기 전처럼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게 나쁘지 않은 변화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입구가 소란스러워지며 황제가 등장했다.
지존의 등장에 무리끼리 모여 수군대던 이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황제는 그 고요함을 익숙하게 가르며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랐다.
그 모습을 2황자와 3황자가 각각 다른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대놓고 눈을 빛내며 욕망을 드러내는 2황자와 조용히 예를 갖추며 몸을 낮추는 3황자를 지켜보며 귀족들의 눈도 바쁘게 움직였다.
1황자가 사라진 이후 한동안 2황자에게 집중되어 있던 후계 구도에 파란이 일어날 조짐이었다.
미래는 내가 아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틀런드의 영웅들에게 포상을 내리려고 한다. 이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 주기 위함이다. 오늘의 기록은 역사서의 기록으로, 화가의 그림으로, 시인의 시로 남아 후대에 널리 전해질 것이다.”
황제가 엄숙하게 작위 수여식의 의의를 선언했다.
그의 말처럼 한쪽에서 사관과 화가, 시인이 열심히 손을 놀리며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을 종이에 남기고 있었다.
“알테어 에일스포드.”
가장 먼저 이름이 불린 건 역시 알테어였다.
예정된 순서였기에 알테어는 당황하지 않고 황제 앞으로 나아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엄숙하게 선언한 후 첫 번째 순서라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틀런드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이를 꼽으라면 모두가 주저 없이 그대를 꼽을 것이다. 나는 군주로서 그대에게 제틀런드 땅을 하사하고, 그에 걸맞은 지위를 함께 내리고자 한다.”
황제가 군주의 왕홀을 들어 알테어의 머리와 양어깨를 차례로 두드렸다.
“그대는 이 순간부터 ‘제틀런드 공작’으로서 제틀런드에 속하는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이 권리는 제국의 군주인 내가 내린 것이다. 이를 부정하는 자들은 곧 내게 반기를 드는 것과 같도다.”
알테어에게 공작의 작위가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차분하게 현장을 기록하고 있던 사관과 화가, 시인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졌다.
황제는 제 앞에 무릎 꿇은 알테어를 손수 일으켜 손을 붙잡으며 당부했다.
“그대는 내게 부여받은 완전한 권리로 제국의 땅을 풍요롭게 하라. 이는 권리이자 의무이다. 그 막중한 권리와 의무를 대대손손 이어 갈 수 있겠나?”
“그리하겠습니다.”
“제틀런드 공작. 그대의 맹세를 믿는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알테어에게 큰 상자를 내밀었다.
황제가 처음 작위를 내릴 때는 영토를 상징하는 깃발과 인장, 작위에 맞는 의복, 작위를 받은 해에 황실에서 난 포도로 만든 와인을 주게 되어 있었다.
아마 그것들이 담긴 상자일 것이다.
알테어가 상자를 받아 들자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새로운 권력자의 탄생이었다.
알테어가 작위를 얻은 것보다도 모두의 앞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알테어는 모두의 축하를 만끽하는 대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를 향해 빙긋 웃자, 알테어도 살짝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제 집에 갈 수 있어요.’
입 모양으로 그렇게 속삭이자 알테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
“아니…… 공작 작위를 받자마자 에일스포드로 돌아간다니…….”
비오스케스 공작이 황당하다는 듯 나와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그는 알테어가 작위를 받은 걸 축하하겠다며 좋은 와인을 가지고 저택에 들이닥쳤다가 열심히 짐을 꾸리느라 분주한 저택을 보고는 넋이 나갔다.
“보통은 작위를 받으면 수도에서 열심히 인맥도 만들고, 권력의 맛도 좀 느껴 보고, 어? 다들 그렇게 하는데, 바로 돌아가?”
“저희는 ‘에일스포드’니까요. 본진을 너무 오래 비워 두면 안 되잖아요.”
“자네는 바인 후작이고 남편은 공작인데, 본진이 그 작은 남작가라고?”
“크기와 상관없이 그곳이 저희의 뿌리예요.”
나와 알테어가 가족이 된 곳.
그곳에서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니 우리 가족의 뿌리는 누가 뭐래도 에일스포드가 맞다.
“뭐…… 자네들 생각이 그렇다면야 내가 말릴 수는 없지만…….”
비오스케스 공작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랜만에 마음 맞는 젊은이들을 만났다 싶었는데. 이리 떠나면 누구와 마음을 나눌지.”
“수도에 완전히 발길을 끊는 건 아니니 자주 뵐 수 있을 거예요. 특별한 수단도 개발하고 있고…….”
“특별한 수단?”
흘리듯 스쳐 간 말에 비오스케스 공작이 관심을 가졌다.
“네. 말과 마차로는 영지와 영지를 오가는 게 힘드니까요. 마력석으로 움직이는 일종의 마차인데…….”
“투자하겠네.”
“네?”
그게 뭐라고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투자라니?
놀라서 눈을 껌뻑이자 비오스케스 공작이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들의 운과 안목이 보통 아니라는 건 진즉에 알아챘네. 그 작은 땅에서 마력석 광산도 찾아내고, 수도에 등장한 후로 승승장구 아닌가? 그러니 누구보다 빠르게 찰싹 붙어 있어야지. 자네들이 뭘 계획하든 난 무조건 투자하겠네.”
‘딱히 투자받거나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차피 연구를 시작했으니 일을 크게 벌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교통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삶도 훨씬 쾌적해지지 않을까?
‘사실 이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바꿔야겠다는 훌륭한 마음 같은 건 없어.’
하지만 여기에 내 가족이 살고, 앞으로 그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아갈 것을 생각한다면 좋은 걸 많이 남겨 두고 싶었다.
내겐 전생에서의 기억이 있고, 이 기억에는 사람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줄 많은 아이디어가 있었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이걸 마시면서 나눠 보자고. 공작! 어디에 있나! 어서 한잔하자고!”
비오스케스 공작이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며 알테어를 찾아 나섰다.
대단한 술판이 벌어질 것 같았다.
***
‘으으…….’
두 술고래 사이에서 술을 마시는 건 역시 안 좋은 생각이었어.
난 숙취에 괴로워하며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새벽인지 아직 주변은 어둑했다.
예상대로 비오스케스 공작이 벌인 술판은 대단했다.
처음은 알테어와 나, 비오스케스 공작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에일스포드의 기사들까지 합류해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분명 알테어의 작위를 축하하는 자리였는데 끝에는 자리가 만들어진 이유를 죄다 잊은 채 다들 즐거운 분위기를 즐기기 바빴다.
“나디아. 더 자. 어제 고생했잖아.”
침대에서 빠져나가려는데 알테어의 팔이 내 허리를 감았다.
순간 몸이 뒤로 훅 딸려가 알테어의 품에 안기자 그가 두 팔로 완전히 날 끌어안았다.
“으으…… 숨 막혀요.”
가벼운 항의에 순식간에 날 압박하던 힘이 풀렸다.
슬쩍 알테어의 얼굴을 보니 정말로 내가 괴로웠나 싶어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내가 왜 이런 사람을 무서워했었지?’
편견이라는 게 정말로 무섭구나 싶었다.
난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알테어의 얼굴을 만졌다.
조물주가 유려하게 깎아 놓은 듯 아름다운 얼굴은 분명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따뜻한 감정이 느껴졌다.
“나디아?”
얼굴을 더듬는 손길에 알테어가 의아하다는 듯 날 불렀다.
난 헤헤 웃으며 알테어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갑작스런 접촉에 알테어의 눈이 커졌다.
“이상해요. 그냥 같이 누워 있을 뿐인데 모든 게 다 충족된 기분이에요.”
“전혀 이상하지 않아.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난 언제나 그런 기분이니까.”
“그래요? 내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요?”
알테어가 날 가득 채우는 건 이상하지 않아도 내가 알테어를 가득 채운다는 건 뭔가 좀 어색했다.
난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하지만 알테어는 단호했다.
“내 세상에 나디아 당신보다 대단한 사람은 없어.”
어떻게 들으면 엄격하기까지 한 말투였다.
사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늘 없다.
누구나 그럴 거다. 살아가면서 온전히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누군가 날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힘껏 노력해 부응해 주고 싶은 것 역시 사람의 마음이다.
무엇보다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존재가 있다는 건 아주 멋진 일이었다.
“알테어는……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요. 더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게 하고, 또…….”
이어지는 말을 알테어의 가벼운 입맞춤이 가로막았다.
아니다, 가벼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쪽- 하고 떨어져 나갔던 나의 귀여운 입맞춤과 달리 알테어의 입맞춤은 훨씬 깊었다.
길어진 입맞춤에 숨을 헐떡이며 알테어를 밀어내자 그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매만졌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도,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도 괜찮아.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지금 나한테 모든 걸 편히 기대고 편안하게 잠을 더 자는 거야.”
“왜 자꾸 날 재우려고 해요?”
“잠은 중요한 거야. 잠들어 있을 때 사람은 가장 나약하거든. 그 모습을 타인과 공유하는 건 큰 결심이지.”
알테어가 어서 다시 눈을 감으라는 듯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토닥이며 쓸어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에일스포드로 돌아갈 짐을 싸야겠다, 제틀런드로 보낼 새에게 모이를 줘야겠다, 아이가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해야겠다 등등.
수많은 생각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이 알테어의 다정한 손길에 사르르 녹아내려 서서히 눈이 감겼다.
“그럼 알테어도 더 자요. 내가 알테어를 지켜 줄 테니까.”
난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고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알테어가 낮게 웃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든 게 아니라 그런 척하고 있는 거라는 걸 알지만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알테어를 보니 나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왔다.
눈을 부릅뜨려는 노력과 상관없이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선명했던 의식이 희미해지고 그 사이로 다정한 손길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게 느껴졌다.
따뜻하고 안락했다.
이 기분을 알테어에게도 선사하고 싶어져 나는 잠드는 순간 그를 꼭 껴안았다.
눈을 뜨면 언제나 그랬듯 새로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겠지.
새로운 하루에는 이제 내가 읽었던 책 속의 이야기는 없다.
온전히 내가 써 내려가야 하는 미래인 것이다.
하지만 막막하고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미래를 알고 있을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안했다.
나의 가장 나약한 순간을 기꺼이 지켜 주는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떤 일도 다 괜찮을 테니까.
그러니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결혼을 정말 잘한 것 같아.
<아무래도 결혼을 잘못한 것 같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