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머리카락이 다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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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화. 머리카락이 다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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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화. 머리카락이 다 보여요.
2022.12.18.
톡.
토독.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름다운 새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왔구나!”
난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새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날아와 횃대에 자리 잡았다.
물통에 시원한 물을 따라 주니 다급하게 목을 축이는 게 갈증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 먼 거리를 날아왔으니 당연해.’
손을 뻗어 부리를 쓰다듬자 칭찬이라는 걸 알았는지 새가 기분 좋게 푸드덕댔다.
이 녀석은 몇 년 전, 내가 신과의 거래로 깨워 낸 라트람이었다.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본 존재가 나여서 그런지, 아니면 그 이후에 열심히 물과 먹이를 주며 키운 덕분인지.
성체가 되어 제틀런드로 날려 보낸 이후에도 녀석은 정기적으로 날 찾아오고 있었다.
첫해에는 혼자만 오가다가, 다음 해에는 짝을 데려왔고, 그다음 해에는 어린 새들을 한 무리 데려와서 에일스포드 사람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라트람이 잘 번식했다는 증거였다.
달리 말하자면, 황폐했던 제틀런드 땅도 서서히 정상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녀석이 에일스포드로 날아오는 시기는 정해져 있었다.
나와 알테어가 제틀런드로 시찰을 떠나는 시기다.
날이 풀려 에일스포드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줄어들면 제틀런드로 시찰 가는 일정을 잡곤 했는데, 이 똑똑한 새가 그걸 알아차리고는 날이 풀리는 시기마다 에일스포드로 날아왔다.
그래서 이젠 이 녀석이 에일스포드에 도착하면 ‘아, 이제 제틀런드를 시찰하러 가야겠구나’라고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이번엔 혼자 왔구나? 너희가 좋아하는 블루베리를 많이 준비해 뒀는데.”
아무래도 잔뜩 준비한 블루베리는 잼을 만들거나 파이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 줘야 할 것 같았다.
‘블루베리 파이는 글로리아가 아주 좋아…….’
“어머니!”
블루베리 파이는 글로리아가 아주 좋아하니까, 라고 생각하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고 발랄한 글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도도 달려와 품에 쏙 안기는 글로리아를 마주 껴안자 뜨끈한 온기가 훅 느껴졌다.
옅은 땀 냄새까지 느껴지는 걸 보니 제 아빠와 한바탕 숨바꼭질하다 온 모양이었다.
“벌써 놀이가 끝났어?”
이제 다섯 살인 글로리아는 알테어와 숨바꼭질하는 걸 아주 좋아했다.
크고 강한 아빠가 자길 못 찾고 ‘글로리아가 어디 있지? 하나도 안 보이는군.’이라며 주위를 맴도는 걸 특히 좋아했다.
당연히 알테어가 어린애의 기척을 못 느껴서 그럴 리는 없다.
딸이 어디에 숨었는지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 글로리아의 기분을 맞춰 주는 것이다.
물론 글로리아는 아버지가 자길 봐주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제 숨바꼭질 실력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애의 꿈이 신출귀몰한 비밀 요원일 정도다.
“아버지를 찾다가, 다다가 날아오는 게 보여서 얼른 달려왔어요!”
글로리아가 내 다리를 껴안은 채 배시시 웃으며 날 올려다보았다.
‘람바다’라는 새의 이름이 어려운지 글로리아는 아름다운 새를 ‘다다’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분홍색 밝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글로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넘쳐나는 생기로 반짝였다.
내 딸이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란 귀한 아가씨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당연히 자길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 순진무구함을 힘껏 지켜 주는 것이 나와 알테어의 역할이었다.
“아버지에게는 말하고 왔어?”
“우움…… 아버지랑 기사 아저씨들은 숨어 있는데, 아직 못 찾아서…….”
글로리아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말끝을 흐렸다.
술래가 되어 알테어를 비롯한 기사단과 함께 숨바꼭질을 하던 와중에 아름다운 새에 홀려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럼 알테어는 아직도 놀이가 끝난 줄 모르고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건가?’
글로리아가 찾아내기를 기다리며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있을 알테어를 떠올리니 웃음이 쿡쿡 흘러나왔다.
“리아는 다다랑 놀고 있을래? 아버지랑 기사님들은 내가 대신 찾아볼게.”
“네!”
매일 보는 아버지와 기사들보다는 가끔 찾아오는 다다랑 노는 게 더 좋았는지 글로리아가 만세를 부르며 아름다운 새가 앉은 횃대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깃털을 매만지자 새도 손길이 싫지 않은지 부드럽게 날개를 퍼덕였다.
“헤헤.”
난 즐겁게 웃고 있는 글로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밖으로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안나가 헥헥 대며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가씨께서는 역시 이쪽으로 오셨죠?”
“응. 새가 날아오는 걸 봤나 봐.”
“세상에. 눈도 좋으셔라.”
안나가 숨을 고르며 뒤늦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내 전속 시녀로 일하던 안나는 이제 글로리아를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가장 믿을 만한 시녀인 데다, 발랄한 안나의 성격이 글로리아와 잘 맞을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예상은 아주 잘 들어맞았다.
둘은 매일 에일스포드 성을 쏘다니며 오늘처럼 활기찬 매일을 보내는 중이었다.
“영주님께서는 장미 정원에 계셔요. 그쪽에서 숨바꼭질을 하다 온 거라서요.”
“글로리아가 거기서부터 달려온 거야?”
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미 정원은 내가 있던 서재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새가 날아든 시간과 글로리아가 뛰어든 시간을 생각하면 믿기 힘들었다.
안나도 내 놀라움을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발이 어찌나 빠르신지. 영주님을 닮으셔서 체력이 아주 좋으세요. 따라잡기가 힘들다니까요.”
글로리아는 체력만 좋은 게 아니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몸이 날래서 기사들이 벌써부터 ‘차기 기사단장은 아가씨!’라고 말할 정도였다.
얼마 전부터는 알테어가 목검을 들고 글로리아와 놀이 겸 훈련을 시작했는데, 기준 높은 알테어도 글로리아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어날 때 죽을 위기를 겪을 정도로 허약했던 아이가 이렇게 건강해지다니.
어쩌면 목숨을 쥐고 흔들었던 신의 보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글로리아는 새와 놀고 있어. 스스로 깨닫진 못해도 뛰어다니느라 수분을 많이 소모했을 테니 시원한 아이스티를 가져다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난 안나에게 당부하고 장미 정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근처에 도착하니 기사들이 어설프게 커다란 몸을 구겨 숨어 있는 게 하나둘 보였다.
글로리아의 수준에 맞춰 놀아 주는 거라 애초에 어려운 장소에 숨을 생각이 없었던 거다.
난 수풀 밖으로 삐죽 나온 익숙한 머리카락을 보고 가까이 쑥 다가갔다.
“블란 경. 머리카락이 다 보여요.”
“어라.”
글로리아가 아니라 내가 술래가 되어 나타나자 블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눈을 껌뻑였다.
“언제 술래가 마님으로 바뀌었지요?”
“글로리아가 새를 보고 내 서재에 뛰어왔거든요. 선수 교체했어요.”
“아아.”
블란이 하늘을 쳐다보며 주변의 공기를 가늠하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 보니 공기가 아주 따뜻해졌군요. 벌써 그 시기인가요.”
“네. 올해는 글로리아도 함께 갈까 봐요.”
“아가씨도요?”
놀란 듯 되물었던 블란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틀런드도 봐 두셔야지요. 언젠가 그곳의 주인이 되실 테니까요.”
글로리아는 에일스포드 남작, 바인 후작, 제틀런드 공작, 총 3개의 작위를 물려받을 유일한 후계자였다.
아직 본인은 그 무게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주위의 어른들은 그 점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알테어의 부관인 블란이나, 영지의 내정에 큰 도움을 주는 파벨이 늘 그 부분을 내게 상기시켜 줬다.
“벌써 그런 걸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제틀런드를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 애를 살리기 위해 깨운 새가 그 땅에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
그리고 제틀런드의 환경은 에일스포드와 완전히 다르니까, 새로운 걸 좋아하는 글로리아가 아주 즐거워할 것 같았다.
“아가씨께서 행복한 유년을 보내셨으면 하는 생각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보통은 이 나이부터 후계자 교육을 받습니다. 특히 아가씨께서는 작위를 세 개나 물려받으셔야 하니까…….”
블란이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형제자매가 계신다면야 작위를 나눠 가질 수 있으니 훨씬 부담이 덜하실 수도 있지만…….”
‘오호라.’
난 눈을 가늘게 뜨고 블란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평소와 달리 말이 장황하더라니.
결국 ‘형제자매가 더 계신다면야’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내가 제 속셈을 모두 간파했다는 걸 알았는지 블란이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제가 영주님을 옆에서 모시면서 여실히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처음에 마님께서 이쪽에 시집오실 때도 후계 문제로 불안하지 않았습니까. 남작 작위 하나만 가지고 있을 때도 군침을 흘리는 자들이 많았는데, 아가씨께서는 작위를 세 개나 갖게 되실 겁니다.”
블란이 말하는 ‘부담’에는 단순히 책임감만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발하일이 오랫동안 알테어의 목숨을 노렸던 것처럼, 글로리아가 계속 외동딸이라면 감히 욕심을 부리는 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겠지.
그 부분은 나 역시 공감하고 있었다.
나와 알테어 사이에서 아이가 많이 태어날수록 아이들은 안전해진다.
물론 아이들 사이에서 다툼이 생길 수는 있지만 그건 나와 알테어가 잘 정리해 주면 될 일이다.
외부에서 위협이 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아이를 더 원하지 않는 건 아냐.’
하지만 그게 원한다고 바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하늘의 뜻에 달린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도 이젠 이런 이야기를 얼굴 안 붉히고 할 수 있다니.’
이제 제법 귀부인다워졌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해졌다.
헤헤.
난 겉으로는 마님의 위엄을 유지하며 속으로 뿌듯한 웃음을 흘리고 블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튼 숨바꼭질은 끝났으니 돌아가서 할 일을 해도 좋아요. 글로리아와 어울려 주느라 고생했어요.”
“고생이라니요. 아가씨와 어울리는 건 저희들의 즐거움인걸요.”
블란이 진심을 담아 손을 내젓고는 장미 정원 더 깊은 곳을 쳐다보았다.
“영주님께선 저 안쪽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마 아직 계실 것 같습니다.”
“저 안쪽까지요? 깊이도 숨었네요.”
“아가씨의 숨바꼭질 실력이 날이 갈수록 늘어서요. 영주님께서도 은근히 진심이 되신 게 아닐까요?”
성실한 알테어는 아이와의 놀이에서도 늘 진심이었다.
그게 역시나 알테어답다는 생각에 난 웃으며 블란을 보내고 그가 알려 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 정원은 하루아침에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시집와서 막 정비했던 에일스포드의 정원은 이제야 제법 아름다운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난 아름다운 녹음을 지나쳐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 사이로 더 깊은 곳까지 걸어갔다.
장미 정원의 깊은 곳에는 작은 유리 온실이 있는데, 아마 그쪽에 숨지 않았을까 싶었다.
알테어를 찾아 걷는 와중에도 난 몇 명의 기사들을 더 발견하고 그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유리 온실에 다다른 나는 별로 조심스럽지 않게 문을 열어젖혔다.
어차피 내가 기척을 숨기고 다가간다고 해도 알테어를 속일 수 없을 테니까, 괜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내가 들어서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도 온실 안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숨은 건가?’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온실 구석의 꽃 무리 사이의 작은 조각상 뒤로 검은 머리카락이 비죽 보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알테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