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화. 밤낮으로 여러 번. (162/170)


외전 2화. 밤낮으로 여러 번.
2022.12.21.



 
바짝 가까이 다가섰는데도 알테어는 미동도 없이 조각상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앞에서 휘휘 흔들어 보았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잠든 건가?’

난 기가 막혀 알테어 옆에 쪼그려 앉아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타인의 기척에 예민해서 조그만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 그가 여기서 세상모르고 잠들었다는 게 신기했다.

블란이나 카인의 이야길 들어 보면 약이 바짝 오른 고양이처럼 24시간 경계 상태라 깊이 잠드는 순간이 없다던데.

두 사람이 알테어에 대해 없는 이야길 과장하지는 않았을 테고.


‘유독 내 앞에서만 이런다는 건가.’

내가 알테어에게 그만큼 안심되고 편안한 사람이라는 반증이라 생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난 알테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부부가 되어 함께 산 게 오래됐지만 알테어의 얼굴은 첫 만남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매일 얼굴을 보다 보니 조금씩 변한 걸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지만.’

유일하게 변한 걸 체감하는 부분은 분위기였다.

늘 날카롭고 위압적이던 알테어의 분위기가 이젠 확연히 몽글몽글해져 있었다.

서로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뒤에도 그랬지만, 글로리아와 어울려 다니면서부터는 주위 사람들도 그의 변화를 느낄 정도였다.


‘좋은 변화겠지……?’

나와 글로리아가 무서운 검사님의 명성을 희미하게 만든 건 아닐지.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제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와중에도 알테어는 움직임이 없었다.

이쯤 되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몸 상태가 안 좋은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자 알테어의 입꼬리가 움찔했다.

난 그제야 알테어가 이미 내가 다가왔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흐으으음…….’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난 잔뜩 경계한 채로, 하지만 여전히 알테어의 속셈을 알아채지 못한 척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몸이 안 좋네. 리온에게 엄청나게 쓴 약을 만들어 달라고 해야…….”

이마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알테어가 내 팔을 붙잡았다.

가볍게 잡아당긴 손길에 몸이 그대로 넘어가 알테어의 품에 폭 안겼다.

굳게 닫혀 있던 눈이 어느새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잡았어.”

“술래잡기가 아니라 숨바꼭질 중이었잖아요. 알테어가 나한테 잡힌 거예요.”

난 알테어의 위에서 편안하게 자세를 고쳐 잡으며 그의 말을 정정했다.

그러자 알테어가 픽 웃음을 흘리며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줬다.


“글로리아는?”

“새가 날아왔거든요. 그걸 보고 정신이 팔린 모양이에요. 상황을 모르고 계속 숨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찾으러 온 거예요.”

“조류 따위에 내가 밀렸다 이거군.”

“당연하죠. 매일 보는 아빠보다야 가끔 날아오는 새가 더 반갑잖아요.”

아이들의 세계는 부모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세계의 전부인 것도 아니었다.

가끔 어이없는 이유로 외면당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틀런드에 글로리아도 함께 갈까 봐요. 이젠 긴 여정도 버틸 정도로 자랐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내 제안에 알테어가 별다른 대꾸 없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톡 두드렸다.


“나디아. 나와 이런 자세로 있으면서 그런 대화를 하고 싶어?”

“이런 자세라뇨?”

난 천천히 나와 알테어의 자세를 점검해 보았다.

알테어는 여전히 조각상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난 그의 다리 위에 앉아 마주 보는 채였다.


‘그냥 평범한 자세인데……?’

눈을 껌뻑이며 뭐가 문제냐는 듯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아니면 이제 나한텐 감흥이 없나?”

항의하던 알테어가 그대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내게 입을 맞췄다.

불만이 가득 담긴, 다소 거친 입맞춤이었다.

난 알테어가 떨어져 나가자마자 그의 어깨를 찰싹 두드리며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대, 대낮에 밖에서 뭐 하는 거예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하지만 알테어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보면 어때서. 부부가 이러는 게 뭐 이상하다고. 오히려 다들 더 하라면서 박수나 치겠지.”

“그……!”

틀린 말이 아니다.

조금 전에도 블란이 아이는 더 안 낳으시냐며 은근히 날 압박하지 않았던가.

말문이 턱 막혀 버린 날 보며 알테어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더니 조심스러운 손길로 뺨을 쓰다듬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뭐, 뭘요?”

“당신이 술래였고, 날 잡았으니까. 그다음은 당신 뜻대로 하는 거지.”

“난 그냥…….”

손잡고 얌전히 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라 말을 속으로 삼키자 알테어가 내 속을 다 알겠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조심스러운 손길에 어깨를 움츠리니 알테어의 입에서 낮게 울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그는 웃는 걸 어색해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보기 좋아.’

알테어가 마음 놓고 머무를 자리가 있다는 게, 그곳이 나와 글로리아가 있는 이 에일스포드라는 사실이 좋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블란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직접적으로 아이를 더 낳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블란뿐이었지만, 그게 에일스포드 사람들 전체의 바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또 현실적인 문제와는 상관없이…….


‘알테어를 닮은 아이도 있었으면 좋겠어.’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바람이었다.

글로리아는 날 많이 닮은 아이였다.

사람들은 글로리아의 화사한 머리카락 색이 나와 꼭 닮았다고 했다.

알테어는 후계자가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나 아이를 더 갖고 싶단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심 그도 바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달라졌음을 알아챘는지 알테어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나디아?”

다소 조심스러운 질문에 난 내 뺨을 쓰다듬는 알테어의 손을 붙잡으며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우리…… 본격적으로 노력해 보면 어때요?”

“노력?”

“그, 둘째 말이에요.”

“…….”

내 이야기를 환영하리란 생각과 달리 알테어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의외의 반응이라 난 다소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횡설수설했다.


“그게, 글로리아도 혼자는 외롭고…… 또 우리 둘의 후계자가 하나뿐이면 표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누구야?”

알테어가 길어지려는 내 말을 자르며 물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껌뻑이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을 부추긴 사람이 누구냐고.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을 거 아냐.”

“어어…… 블란이 조금 전에 이야길 꺼내긴 했지만…….”

그걸 떠나서 내가 그러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데 알테어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알테어의 손길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자 그가 묘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당신이 그런 문제로 부담 느낄 필요는 전혀 없어. 함께 밤을 보내는 것도 그런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게 아냐.”

“당연하죠. 내가 그걸 모를까 봐요?”

막 결혼했던 때도 아니고,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람.

내가 눈을 껌뻑이며 되묻자 다행히 진심을 알아차린 건지 알테어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 그러니까 나디아 당신은 그것만 생각해.”

‘이미 그것만 생각하고 있는데……?’

“글로리아를 낳을 때의 그 소동만 생각하면 사실 둘째는 없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물론 아이가 생기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그보다 나디아 당신이 힘들고 위험해지는 게 싫어.”

알테어가 단호하게 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난 그제야 알테어가 아이 이야기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아이를 더 가지고 싶다는 마음보다 내 상태를 더 걱정해 준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나 후계에 따르는 현실적인 문제를 모두 젖혀 두고, 날 1순위로 올려 두고 고민한 결과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동시에 마음이 불타올랐다.

난 숨을 크게 들이켜고 슬쩍 멀어져 있는 알테어의 두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내가 걱정되는 것 말고는 알테어도 아이를 원한다는 거죠?”

“그야…….”

“좋아요. 그럼 문제없어요. 최상의 상태로 참전할 테니까 기다려요.”

“참전이라니…….”

의욕에 활활 불타오르는 날 알테어가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물론 그게 내 의지를 꺾지는 못했지만.

***



‘건강이라.’

확실히 난 몸이 그리 튼튼한 편이 아니었다.

숙부가 쓴 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도 연약한 편이라, 글로리아를 낳을 때는 정말로 죽을 뻔했었지.

알테어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알테어는 평생 그런 식으로 아파 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연약하다는 게 엄청난 약점처럼 느껴질 거다.

처음 에일스포드에 시집왔을 때는 내가 피곤해서 쓰러진 걸로도 ‘사람이 피곤하다고 쓰러지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의아해했으니까 말이다.


‘알테어의 걱정은 타당해.’

그러니까 둘째 계획을 세우기 전에 내가 튼튼해지는 게 먼저였다.


“흠. 2세 계획을 세우신다고요.”

내 건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면 리온이었다.

그에게 2세 계획을 상담하니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딱히 문제는 없을 텐데요. 첫 출산 때는 중독 상태였던 게 문제였으니까요. 보약과 함께 운동을 병행하면 이번엔 무리 없이 출산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요?”

“예. 날을 잡아 자세히 진찰한 뒤에 보약을 처방해드리도록 하지요.”

“리온은 바쁘잖아요. 제자를 보내서 살펴봐도 돼요.”

리온은 에일스포드 가문의 주치의지만, 동시에 약학을 연구하는 연구소의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홀로 약을 연구했지만 지금은 제자를 여럿 두고 다양한 분야의 약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내가 소설 속에서 보았던 약도 이미 3년 전에 개발되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고, 그 일로 리온의 명성이 제국 전체에 널리 퍼진 상황이었다.

덕분에 에일스포드에서 생산하는 각종 상비약이 서민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고작 보약 짓는 데 쓰는 건 아깝다.

하지만 리온은 이제 와서 무슨 소릴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생각이셨으면 처음부터 제 제자를 부르셨어야죠.”

“아.”

그렇구나!

깨달음에 눈을 크게 뜨자 리온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연구 쪽을 제자들에게 맡기는 게 더 마음 편합니다. 영주님과 마님께는 빚진 것도 많은데, 두 분의 2세 계획을 위해서라면 제가 힘쓰는 게 맞죠. 저뿐만 아니라 다들 돕고 싶어서 난리일 겁니다.”

“너무 소란스럽게 진행하고 싶진 않아요. 노력한다고 뜻대로 아이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뭐. 방법은 간단하지 않습니까? 일을 성사 시키려면, 시도를 많이 하면 됩니다.”

의사답게 덤덤한 말투였지만 속에 담긴 의미가 내 얼굴을 화르륵 타오르게 했다.


“하루에 한 번은 필수로 하시고, 기회가 된다면 밤낮으로 여러 번…….”

“으아아! 거기까지요! 그, 시도하는 거는, 그,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난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온은 ‘보약과 운동을 병행’하라고 했으니, 다음은 운동 쪽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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