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타인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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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화. 타인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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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화. 타인의 연애
2022.12.25.
“체력을 기르고 싶으시다고요?”
카인이 날 위아래로 훑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영 미덥지 못하게 생각하는 눈빛이라 얼른 두 주먹을 불끈 쥐어 의지를 보여 주니 카인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뇨, 아뇨. 마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제게 조언을 구하러 오신 게 놀라워서요. 제가 기사들을 어떻게 굴리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카인은 에일스포드 기사들의 훈련 담당이었다.
새로운 기사가 들어오면 누구나 카인의 손을 거쳤는데, 내 앞에서 유들유들한 모습과는 다르게 썩 무서운 상관인 건지 여러 무시무시한 별명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저는 영주님 밑에서 검을 배워서 적당히 굴리는 걸 모르거든요.”
“음⋯⋯.”
카인의 무서운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구르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어려웠지만, 그래도 난 지금 의지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할 수 있어요. 목표가 있으니까요!”
“목표요?”
“알테어가 날 약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가 되고 싶어요.”
“으음⋯⋯ 그럼 아가씨와 함께 훈련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글로리아와요?”
“네. 아가씨의 검술 지도를 영주님께서 직접 하고 계시니까요.”
“음. 달리 말하면 내가 글로리아가 받는 훈련 정도만 소화할 수 있을 거라는 거네요.”
“하하⋯⋯.”
정확한 지적이었는지 카인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고는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갑자기 왜 체력 단련에 관심이 가셨습니까?”
“알테어가⋯⋯.”
난 온실에서 알테어와 나눴던 이야기를 꺼내려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카인이 못 믿을 사람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만한 말은 아니었다.
“알테어가 내 걱정을 좀 덜었으면 해서요.”
대신 적당히 돌려서 이유를 말하자 카인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정원 한쪽에 놓인 큰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영주님은 평생 마님을 걱정하실걸요. 마님께서 저 큰 바위를 번쩍 드실 정도로 튼튼하다고 하셔도요.”
다른 일에는 무던한 알테어가 유독 내 문제에 민감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온실에서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글로리아를 낳다가 내가 죽을 뻔한 사건 때문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든 신뢰받고 싶다는 생각은⋯⋯ 역시 욕심이겠죠?”
한숨을 푹 내쉬자 카인이 빙긋 웃었다.
“마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영주님을 신뢰하시나요?”
“그럼요!”
당당히 대답했다가 금세 의문이 머릿속에 비죽 솟아올랐다.
“⋯⋯아닌가?”
작게 중얼거리며 턱을 매만지니 카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면에서 상대를 신뢰한다는 건 불가능하죠. 결혼이란 것도 모든 면에서 신뢰하지 않는데도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는 점이 멋있는 거잖아요? 내가 모르는 상대의 모습도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이니까요.”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장황한 카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묘한 생각도 함께 섞여 들었다.
난 ‘설마’ 하는 심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카인 경. 혹시 결혼하고 싶어요?”
“예⋯⋯?”
“관심 없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그런 이야길 하니까⋯⋯.”
영지의 대소사를 신경 쓰는 건 안주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특히 영지민들의 결혼은 영지의 생산력 증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특히 신경 쓰도록 되어 있었다.
영지민끼리 결혼하면 영주가 직접 선물을 보낼 정도였다.
‘그러니까 에일스포드 기사들의 혼사도 내 문제란 말이지.’
모두 번듯한 청년들인데,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은 아직까지 결혼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블란과 카인도 마찬가지였다.
외모도 훌륭하고, 영주에게도 신뢰받는 멋진 기사인데도 어째서인지 아직 짝을 찾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내 모습에 부담스러워진 건지 카인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반응에 난 더욱 확신이 들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거군요?”
“아, 아, 아닙니다! 사람이 있긴요!”
제자리에서 펄쩍 뛰는 카인의 얼굴이 붉었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반응이었다.
“누구랑 결혼하고 싶은 건데요?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아니, 그게, 아⋯⋯.”
당황해서 머리를 헤집는 카인을 보고 있으니 다들 왜 그렇게 타인의 연애에 몰입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게 말하면 도와줄게요. 그게 영주 부부의 의무잖아요. 카인의 결혼이라면 특히 더 신경 쓸 거고요. 상대가 누구인가요?”
늘 알테어와 나의 연애를 관찰당하는 입장이었는데, 그 반대가 되니 아주 신이 났다.
“저, 저는 기사들 훈련을 봐 주러 가야 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 반짝이는 눈빛을 견디다 못한 카인이 줄행랑을 쳤다.
카인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으므로 난 순순히 그를 보내 주었다.
‘나중에 블란이나 파벨에게 물어봐야겠어.’
아냐. 안나도 이미 알고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뒤에서 쿵 하는 충격이 가해졌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달려온 건지 글로리아가 내 다리를 붙잡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어머니!”
헤헤 웃고 있는 글로리아의 얼굴에 흙이 잔뜩 묻어 있는 걸 보고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블루베리요!”
과연 글로리아의 뒤를 따라온 안나의 손에 블루베리가 가득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파이 먹고 싶어서 제가 직접 따 왔어요.”
“직접? 다들 말렸을 텐데⋯⋯.”
말끝을 흐리며 안나를 보니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가씨께서 직접 할 거라고 고집을 부리셔서요. 결국 영주님도 그러라고 하셨어요. 원체 아가씨의 고집에 약하시잖아요.”
글로리아가 혼자 땄다기에는 양이 많더라니.
알테어도 함께 일손을 거든 모양이었다.
문득 오래전, 내가 다쳐서 시골에서 요양할 때 마을 아주머니의 재촉에 못 이겨 열매를 따 왔던 알테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땐 열매 따는 솜씨가 형편없었는데.
바구니를 슬쩍 보니 이젠 수확 솜씨가 아주 훌륭했다.
“파이 만들어요, 어머니!”
글로리아가 내 치맛자락을 잡아끌며 파이 노래를 불렀다.
“파이, 블루베리 파이, 향긋한 파이, 맛있는 파이!”
도대체 어디서 배워 온 노래람.
난 귀여운 꼬마의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방에 시켜 파이를 만들어 오라고 할 수도 있지만, 글로리아는 파이를 직접 만드는 과정도 아주 좋아했다.
사실 글로리아는 시늉만 하고 주방장이 전부 수습하는 식이었지만 말이다.
“아. 그런데 안나.”
난 걸음을 옮기다 문득 떠오른 질문을 안나에게 던졌다.
“카인 경이 요즘 연애를 하는 것 같던데. 결혼까지 할 생각인 듯하고.”
툭.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라고 묻기도 전에 안나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바구니에 가득 찼던 블루베리가 사방으로 흩어지자 글로리아가 ‘꺅!’ 하고 비명을 지르며 굴러가는 블루베리를 줍기 시작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이젠 확실히 프로 시녀가 된 안나가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는데.
의아해서 안나를 쳐다보니 그녀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서둘러 몸을 굽혔다.
“죄, 죄송합니다. 딴생각을 하다가 그만.”
안나가 얼른 글로리아 곁으로 다가가 함께 블루베리를 줍기 시작했다.
허리를 깊게 숙인 상태였지만 귀가 빨개서 얼굴이 아직도 붉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카인에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거냐고 물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지 않은가?
‘어어⋯⋯ 설마⋯⋯?’
카인과 안나가⋯⋯?
***
글로리아와 파이를 만드는 동안에도 난 계속 안나의 얼굴을 살폈다.
그 시선을 모를 리 없는데도 안나는 꿋꿋하게 날 외면한 채 앞치마를 두르고 분주히 움직이는 글로리아를 보조할 뿐이었다.
‘맞는 거 같은데.’
왜 비밀로 하는 거지?
카인과 안나라면 영주 부부의 최측근이다.
영주 부부의 일을 도우며 서서히 가까워지다 연애 감정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굳이 비밀로 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 않나?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이 결혼한다면 다들 환영할 것이 분명했다.
알테어와 나도 두 사람에게 큰 선물을 내릴 테고.
그렇게 생각하니 알리기 힘든 사정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카인과 안나 모두 어려운 시절부터 함께 으쌰으쌰 의기투합한 측근들이니 문제가 있다면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주고 싶었다.
그들이 나와 알테어의 역경에 힘을 보탰던 것처럼 말이다.
“어머나!”
그때 안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블루베리 잼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울상을 짓고 있는 글로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풉.”
그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리아가 달콤해졌네?”
“어머니이이이⋯⋯.”
난 울망울망 눈가에 눈물이 맺힌 리아를 얼른 안아 올렸다.
예전에는 가볍게 번쩍 들 수가 있었는데, 요즘은 점점 무게가 버거워졌다.
‘체력을 길러야 할 또 다른 이유지.’
지금 글로리아의 세계에는 나와 알테어가 전부이지 않은가?
이 애의 세계가 넓어져 내 품을 떠나는 날까지 번쩍 안아 줄 수 있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잼을 엎어 버렸어요⋯⋯.”
“그럼 잼을 다시 만들면 되지.”
“하지만 블루베리 다 썼어요⋯⋯.”
“그럼 블루베리를 다시 따면 돼. 큰일도 아냐. 어렵지 않아.”
차분하게 글로리아를 달래자 촉촉했던 글로리아의 눈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맞아요. 큰일도 아니에요. 안 어려워요. 다시 블루베리 따러 갈래요!”
금세 씩씩해져 의욕을 불태우는 글로리아를 보며 난 웃으며 그 애의 이마에 이마를 마주 댔다.
“그 전에 목욕부터.”
“네!”
글로리아가 얼른 내려 달라는 듯 버둥거렸다.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 주자마자 글로리아가 예고도 없이 후다닥 뛰어나갔다.
얼른 목욕하고 다시 블루베리를 따고, 파이까지 만들려면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나와 안나는 다급하게 글로리아의 뒤를 따랐다.
글로리아가 복도를 달려갈 때마다 블루베리 잼 향기가 퍼졌다.
그 애를 마주친 사용인들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서둘러 허리 굽혀 인사했다.
지금이야 의욕을 불태우고 있지만, 목욕까지 하고 나면 지쳐서 쓰러져 잠들 게 분명했다.
‘알테어도 어릴 때 저랬을까⋯⋯?’
난 어릴 때도 조용하고 방에 틀어박히길 좋아했으니까, 역시 저런 활발한 유전자는 알테어에게서 온 게 틀림없었다.
‘알테어의 어릴 적 모습을 아는 분들이 남아 있다면 좋을 텐데.’
이 시대에는 사진으로 어린 시절을 남길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나마 그림을 그려서 남기는 게 가능하긴 하지만⋯⋯.
‘어? 그림?’
자연스럽게 흐르는 생각 끝에 의외의 깨달음이 찾아왔다.
“안나. 혹시 알테어의 어릴 적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을까?”
나란히 다급하게 걷던 안나에게 물으니 그녀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선대 남작 부인께서 그림을 좋아하셔서, 초상화도 많이 남기신 걸로 알아요. 영지에 화가가 자주 드나들었대요. 유품을 전부 버리진 않았을 테니 창고에 남아 있을 것 같아요.”
“역시 그렇구나.”
안나가 글로리아를 목욕시키는 동안 창고를 한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