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말할 필요도 없어. (164/170)


외전 4화. 말할 필요도 없어.
2022.12.28.


나는 조심스럽게 창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에일스포드 성의 열쇠는 모두 내가 관리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작은 창고까지 샅샅이 살피진 않는다.


‘창고에 어떤 물품이 있는지 품목 정도야 확인했지만⋯⋯.’

어떤 크기의 그림이 몇 점 있는지 정도로 정리된 목록 정도였다.

오래 발길이 닿지 않은 창고는 먼지가 가득했다.

물건이 상하는 걸 막기 위해 덮어 둔 하얀 천을 걷어 내자 뽀얀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콜록!”

황급히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지만 기침이 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기침이 잦아들자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소박하지만 우아한 느낌의 조각상과 가구들,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크고 작은 그림들이 한편에 가득했다.

난 조심스럽게 그림 쪽으로 걸음을 옮겨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가장 앞쪽에 놓인 그림은 가족의 초상화였다.

행복하게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젊은 부부와 다소 뚱한 얼굴의 검은 머리 소년.


‘알테어다.’

어린 모습이었지만 난 단번에 알테어의 모습을 알아차렸다.

이 뚱한 얼굴은 어릴 때부터 변함없었구나.

신기하고 재밌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분들은⋯⋯.’

난 선대 남작 부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아직 살아 계셨다면 이렇게 웃는 모습을 실제로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음 그림은 좀 더 어린 시절의 알테어였다.

작은 고양이를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

귀여운 고양이와 귀여운 아이의 조합이라니!

흐뭇하게 웃으며 그림의 뒷면을 살피니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 알테어. 세 살. 요즘 ‘내 꺼야!’라는 말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

단정한 글씨체가 선대 남작 부인의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빠르게 그림을 휙휙 살폈다.

알테어가 그려진 그림에는 모두 짧은 육아 일기가 담겨 있어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기록들도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난 시기부터는 뚝 끊겨 있었다.

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가족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이렇게 멋진 사람을 제게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접 뵐 수는 없지만, 내 감사가 하늘에 계실 두 분에게 닿기를 바랐다.


‘알테어는 외로웠고, 저 역시 그랬으니까, 떠들썩한 가족을 만들고 싶어요. 부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두 분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아마도 착각이겠지만 그림 속의 두 분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걸 멋대로 ‘두 분께서 내 소망을 들어주시려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작은 그림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기 고양이를 안고 있는 알테어의 그림이었다.

엽서 정도의 작은 크기라 침대 옆 협탁에 두면 좋을 것 같았다.


“으으⋯⋯.”

‘그림 감상은 여기까지 할까.’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몸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오래 쪼그려 앉아 있었던 탓인지 순간 현기증까지 느껴졌다.

몸이 비틀거린다고 느낀 순간, 뒤에서 누군가 단단히 어깨를 붙잡았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살짝 느껴지는 체향만으로도 상대가 알테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뭘 하고 있었어?”

알테어가 내 정수리에 제 머리를 턱 얹으며 물었다.


“그림을 보고 있었어요. 선대 남작 부인께서 남기신 그림이 많다고 해서요.”

“아.”

알테어가 슬쩍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단란한 세 사람의 모습이 담긴 가족 초상화였다.


“⋯⋯그래. 여기에 그림을 다 모아 뒀었지.”

“당신 초상화가 엄청 많던데요? 이건 협탁에 두려고 챙겼어요.”

어린 알테어와 고양이가 함께 그려진 그림을 쓱 내밀자 그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했다.


“그런 걸 뭐 하러 협탁에 둬?”

“왜긴요. 귀엽잖아요.”

“귀엽다고?”

“네. 귀여운 고양이, 귀여운 어린이. 두 배로 귀여운데요?”

그림을 빤히 쳐다보자 알테어가 서둘러 그림을 뺏어갔다.


“안 귀여워.”

“귀엽다니까요.”

난 얼른 알테어의 손에서 다시 그림을 가져왔다.

그렇게 알테어와 나 사이의 그림 쟁탈전이 시작됐다.

알테어는 자신의 그림이니 자신이 가져갈 거라고 주장했고, 난 내가 먼저 챙겼으니 내가 가져갈 거라고 난리였다.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실랑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는 사이 난 알테어에게 완전히 제압당했다.

두 손을 붙잡힌 채 벽에 바짝 붙은 내 앞에 알테어가 우뚝 서 있었다.


 
그림은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알테어. 언제 이렇게 유치해졌어요?”

“당신이 내 유치한 면을 자극하니까 그런 거지.”

“당신이 유치한 게 내 탓이라고요?”

“내가 나답지 않은 일을 한다면 대체로 당신 탓이지.”

“와.”

당당한 태도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알테어는 승자의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

평소와 같은 입맞춤인데, 장소가 달라져서인지, 아니면 조금 전까지 말도 안 되는 실랑이를 벌여서인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날 제압하고 있던 알테어의 손에서 어느새 힘이 빠졌지만 도망갈 생각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대신 알테어의 목에 두 팔을 두르자 서로의 거리가 훌쩍 가까워졌다.

몸이 맞닿은 채로 입맞춤이 짙어져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입술이 잠시 떨어진 순간.

서로의 눈이 오래도록 마주쳤다.

이 눈빛이 어떤 열망을 품고 있는지.

이제는 서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것에 손을 뻗었고, 저항 없이 서로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었다.

***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뒤.

나와 알테어는 창고의 물건을 덮어 뒀던 하얀 천을 이불 삼아 그 위에서 뒹굴며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이젠 우리도 5년 차 부부라 이거다.


“참. 아무래도 카인과 안나가 사귀는 것 같아요.”

“뭐?”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문득 떠오른 이야길 꺼내자 알테어가 눈썹을 치켜떴다.

알테어 역시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인 듯했다.


“확실한 건 아닌데 낌새가 그래요.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하면 집도 하나 해 주고, 선물도 크게 내려야 하잖아요. 결혼식도 직접 열어 주고 싶고⋯⋯.”

“그야 그렇지만, 확실한 거야?”

“알테어가 카인에게 확실히 물어보는 게 어때요? 나도 안나에게 이야기해 볼게요.”

“⋯⋯그 녀석과 그런 이야길 한다고 생각하니까 벌써 소름 돋는데.”

“영주의 역할이에요, 알테어.”

엄격하게 말하자 알테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거 알아? 당신, 글로리아를 키우면서부터 나한테도 훈계가 늘었어.”

“글로리아나 당신이나 다를 게 없으니까 그렇죠. 오늘도 봐요. 이런 데서 막 뒹굴고⋯⋯ 먼지투성이인데⋯⋯.”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입을 비죽 내밀자 알테어가 몹시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일은 나 혼자 치렀나? 나디아, 당신도 내 허벅지 만졌잖아.”

“내, 내가 언제요?”

“내가 당신 허리에 손 얹었을 때.”

“몰라요. 난 기억 안 나요.”

“정말로 기억 안 난다고?”

“그렇다니까요?”

분명 기억이 나지만 난 모르는 척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걸 순순히 넘어갈 알테어가 아니었다.


“기억나게 해 줘?”

알테어가 다시 그 순간을 재연하려는 듯 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다시 허리에 턱 얹어져 난 기겁해서 얼른 항복했다.


“아, 아니에요! 기억났어요! 이건 쌍방과실 맞아요.”

“⋯⋯.”

내 항복을 받아 냈는데도 알테어는 영 개운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왜 이렇게 싫어하지?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좋아했는데.”

“뭐든 적당해야 좋죠. 당신한테 맞추느라 죽을 것 같아요.”

알테어는 지치지 않고 트랙을 달리는 경주마 같았다.

그에 비해 나는 터덜터덜 산책하는 당나귀 수준이라고나 할까.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마다 정신을 못 차리며 끌려 다니다가 힘들다고, 그만하라고 눈물을 쏟으며 끝날 때가 많았다.

지쳐서 축 늘어진 날 보며 알테어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많이 힘든가?”

“많이는 아니고⋯⋯ 조금⋯⋯.”

엄청 힘들었지만 침울해진 알테어의 얼굴을 보니 그렇단 이야기가 차마 안 나왔다.

알테어가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카인에게 확인해 볼게. 정말로 안나와 결혼하려는 건지.”

“응. 고마워요.”

“고맙긴. 그게 내 일이라며?”

알테어가 상체를 세워 앉은 채 날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사람이 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내 모든 걸 감당해 줘서 고마워, 나디아.”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난 손을 휘휘 저으며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난 어떤 것도 감당한 적 없어요. 그냥 여기 있을 뿐이에요.”

“그래. 그게 고맙다고.”

알테어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떨어져 나갔다.


“이제 제틀런드에 갈 일정을 짜야 해. 수도의 사교 시즌도 다가오고.”

“글로리아도 데려가려면 평소보다 신경 쓸 게 많겠네요. 게다가 수도라니⋯⋯.”

거기서 만날 사람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르카 황태자가 벌써 편지를 보냈어요. 수도에 언제 올 거냐,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 딸은 잘 자라고 있냐⋯⋯ 무시할 수도 없고 정말.”

오르카는 이제 황자가 아닌 황태자였다.

황제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일이 그렇게 흐른 건 작년이었다.

당시 수도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밀수 스캔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오르카 황자의 형님, 2황자가 연루된 사실이 밝혀져 황제가 크게 분노했다.

그 길로 2황자는 황위계승권을 박탈당하고 먼 시골 영지로 쫓겨났다.

그 밀수 스캔들을 조사하고 진상을 밝힌 게 오르카 황자였다.


‘밀수 스캔들을 기획한 것도 오르카 황자겠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진실은 누구도 모른 채 묻혀 있었다.

그리고 몇 개월 전.

황제의 건강이 서서히 악화되어 공식적으로 오르카를 황태자로 세우며 후계 구도가 명확히 정리되었다.

누구도 황제 후보로 생각하지 않았던 병약한 3황자의 역전승이었다.


“이제 곧 자기가 황제가 될 테니 약속을 지키라고 눈치 주는 거겠지. 제 아버지를 섬기는 것까진 방해하지 않겠다고, 대신 자기가 황제가 되면 제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힘을 보태 달라고 했었으니까.”

“아무튼 그 사람, 알테어를 너무 좋아한다니까요.”

소설 속에서도 아주 곳곳에 잘 부려 먹더니.


“내가 보기엔 나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는 것 같던데. 수도에 가면 당신을 많이 괴롭힐 것 같아. 귀찮으면 이번 사교 시즌은 건너뛸까?”

“안 되는 거 알아요. 황제께서 당신을 불렀잖아요.”

“그야⋯⋯.”

내가 가지 말자고 하면 황제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을 거라는 의지가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괜찮아요. 앞으로 황제 될 사람이 우릴 싫어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도대체 보여 주고 싶다는 게 뭔지 보기나 하죠. 글로리아는 안 보여 줄 거지만.”

영악한 오르카 황자라면 순진한 글로리아를 이리저리 꾀어 제 편으로 만들어 버릴 게 분명했다.


“아무튼 한동안은 에일스포드를 떠나게 되겠네요.”

바쁜 나날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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