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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화. 아빠 미워! (165/170)


외전 5화. 아빠 미워!
2023.01.01.



 


“제틀런드요? 수도에도요?”

글로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나와 알테어가 영지 시찰을 떠나는 시기가 되면 늘 홀로 성을 지켰으니 쉽게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래. 이번에는 글로리아도 같이 가자.”

지도를 펼쳐 에일스포드가 여기 있고, 제틀런드는 저기, 수도는 저어기 있다고 알려 주니 글로리아가 함박웃음을 지은 채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알아요! 전부 알아요!”

그러더니 손으로 직접 지도를 짚어 가며 제가 아는 이야기를 조잘대기 시작했다.


“제틀런드는 다다가 사는 곳이구요. 수도에는 마리가 있어요.”

수도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마리가 종종 에일스포드를 찾아왔는데, 그럴 때마다 수도의 온갖 신기한 장난감을 잔뜩 가져와서 글로리아는 마리를 아주 좋아했다.

역시 프로 시녀답게 아가씨에게 사랑받는 법을 잘 안다고나 할까.


“위치도 정확히 알고 있네?”

“아버지가 알려 줬어요. 나중에 내 땅이 된대요.”

“음⋯⋯.”

지금 상황에서는 확실히 맞는 말이지만, 그게 꼭 ‘아이는 글로리아 하나로 충분하다’라는 알테어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시원하게 긍정할 수가 없었다.

글로리아는 내 반응이 미묘한 걸 바로 알아챘다.


“틀렸어요?”

“틀린 건 아니지만, 동생이 생기면 그걸 나눠야 할 수도 있어.”

“동생⋯⋯?”

글로리아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금세 입이 떡 벌어졌다.


“동생 있어요?!”

“아니, 아직⋯⋯.”

“글로리아 동생 있어!”

만약을 이야기한 거라고 얼른 말해 봤지만, 잔뜩 신이 난 글로리아에게는 내 말이 제대로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두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외치며 내 주위를 맴돌던 글로리아가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아가는 언제 와요? 이름 있어요? 장난감 나눠 줄래요!”

“언제 올지는 몰라.”

“에이⋯⋯.”

잔뜩 들떴던 글로리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외동으로 오래 자란 아이들은 동생이 생기는 걸 싫어하기도 한다는데, 글로리아는 동생의 존재를 무척이나 환영하는 듯했다.


“글로리아는 동생이 있으면 좋겠어?”

내 질문에 글로리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는 심심해요. 인형 놀이도 혼자 해야 하고, 검술 연습 상대도 없어요.”

“기사님들하고 노는 건 재미없어?”

“재밌지만⋯⋯ 그래도⋯⋯.”

글로리아가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다들 나중엔 돌아가니까⋯⋯.”

기사들도 근무 시간이 지나면 각자의 숙소나 집으로 돌아간다.

신나게 같이 놀다가 다들 인사하며 사라지는 게 퍽이나 섭섭했던 모양이었다.

떠들썩함 뒤에 찾아오는 고요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랬구나, 글로리아.”

난 빙긋 웃으며 글로리아를 안아 올렸다.

품에 쏙 안긴 글로리아는 속상한지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절대 일부러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큰일이네. 글로리아는 동생이 있으면 좋은데, 아버지는 그게 싫다니까.”

“네?!”

글로리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버지는 아가 싫어해요?”

“응. 아가 싫대.”

“아버지 나빠⋯⋯.”

아버지를 아주 좋아하는 글로리아가 잔뜩 심통 난 얼굴로 투덜거리는 걸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게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

***

알테어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글로리아가 들이닥쳤다.

에일스포드의 작은 아가씨가 영주의 집무실에 이렇게 들이닥치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평소라면 문을 열자마자 제 아버지에게 달려가 쏙 안겨야 했는데.

글로리아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심통 난 얼굴로 알테어를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류에 집중하는 척하면서도 달려오는 글로리아를 안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던 알테어가 의아하다는 듯 제 딸을 쳐다보았다.

알테어의 시선이 닿자마자 글로리아가 도도도 달려와 주먹으로 알테어의 다리를 때렸다.

자기 딴에는 엄청나게 힘을 준 주먹질이었지만, 알테어 정도의 검사에게는 간지러운 수준도 되지 못했다.


“아야!”

오히려 잔뜩 힘을 줘 주먹을 휘두른 글로리아가 손목을 감싸 쥐며 울상을 지었다.

알테어는 물론이고 곁에서 그의 업무를 돕던 블란도 놀라서 얼른 글로리아의 손목을 살폈다.


“아가씨. 영주님의 다리는 무식하게 단단해서 그렇게 때리면 손이 상합니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아픔에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알테어의 다리를 찰싹 때렸다.

손목이 아팠는지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찰싹 종아리를 두드리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글로리아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걸 알아챈 알테어가 곤란한 얼굴로 살짝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나다아는 두 팔로 겨우 글로리아를 안아 올리는 수준이었는데, 알테어는 한 팔로 단번에 글로리아를 들었다.

달랑 들려 올라간 글로리아가 알테어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휙 돌리자 블란이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알테어는 그런 블란을 슬쩍 노려본 뒤 글로리아와 눈을 맞추려고 애썼다.

그럴 때마다 글로리아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알테어의 눈을 피하기 바빴다.


“왜 화가 났지?”

“⋯⋯.”

“화난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고칠 수가 없는데.”

알테어의 회유에 글로리아가 고개 돌려 제 아버지와 시선을 맞췄다.


“왜 아가 싫어요?”

“응?”

“아버지 아가 싫어해요. 그래서 글로리아 동생 없어요.”

부루퉁한 글로리아의 말투에 알테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블란은 멍청한 알테어의 얼굴을 보며 풉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마님께서 든든한 지원군을 만드신 것 같은데요.”

“하아⋯⋯.”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한 알테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로 나디아는 아이가 갖고 싶은 걸까.

그 죽을 고비를 넘기고 또다시?

아버지의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걸 보며 잔뜩 심통을 내던 글로리아도 뭔가 이상한 걸 느끼곤 알테어의 눈치를 살폈다.

머뭇대다가 자신의 품에 폭 안기는 글로리아의 온기에 알테어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

세 가족이 나란히 마차에 올랐지만, 에일스포드 부부의 분위기는 매우 삭막했다.

알테어는 생각에 잠겨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나도 근래에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아서 몸이 무거웠다.

든든한 아군을 투입한 게 좋은 작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히려 알테어의 마음만 더 무겁게 한 모양이었다.

그런 부부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처음으로 장거리 여행에 나서는 글로리아는 잔뜩 신이 났다.

창가에 바짝 붙어 지나가는 풍경을 쳐다보며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여정은 간단했다.

먼저 제틀런드에 들러 영지를 시찰하고 그다음 수도에 방문해 사교 시즌을 보낸 뒤 다시 에일스포드로 귀환한다.

어린 글로리아가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장거리 이동이었지만, 아직 그런 걸 모르는 글로리아는 그저 신이 난 모양이었다.

지금 우리가 타고 가는 마차는 자동차와 마차의 중간 정도 형태의 이동수단이었다.

외관은 마차와 비슷했지만, 마차를 끄는 말이 없었다.

마부가 앉아야 할 자리에는 운전수가 앉았다.

동력은 마석에서 얻는다.

장거리 이동이 유독 많은 에일스포드에서 개발해 고위 귀족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상용화가 되고 있는 탈것인데, 난 여기에 전생의 기억을 살려 자동차란 이름을 붙였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자동차와 모양은 많이 달랐지만 기능이 비슷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이 자동차도 불티나게 팔려 주문이 3년 치는 밀려 있었다.

워낙 민감한 물건이다 보니 한 해에 생산할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어 발생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멀미가 나는 것까지 자동차를 닮을 필요는 없었는데.’

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의자에 축 몸을 늘어뜨렸다.

전생에서도 멀미에 약했던 난 나디아가 된 후에도 멀미에 시달리고 있었다.

멀미에 시달릴 때 대처법은 따로 없다.

그냥 잠들어 버리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아서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속까지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으읍.”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기분에 헛구역질까지 시작하자 생각에 잠겨 있던 알테어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


“요즘 컨디션이 계속 안 좋아 보이더니.”

알테어가 익숙하게 손을 주무르며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켜 주려고 애썼지만 좀처럼 속이 진정되지 않았다.

난 알테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온몸을 그에게 지탱했다.


 
잔뜩 신이 나서 창밖을 바라보던 글로리아도 어느새 내 앞으로 조르르 다가와 엄마를 걱정하고 있었다.

어린 글로리아까지 멀미에서 자유로운데 왜 나만!

연약함이 서러워 속으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안 되겠군. 잠시 쉬어 가야겠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핏기가 싹 가신 내 얼굴을 보며 알테어가 운전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흔들리던 자동차가 멈추고, 창문까지 활짝 열어젖혔지만 내 상태는 영 나아지지 않았다.


“멀미가 아니라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알테어가 조심스럽게 내 이마에 손을 얹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미열이 있어, 나디아.”

“몸이 좀 무겁긴 했는데⋯⋯.”

“리온은 아무 말 없었는데.”

“리온이 아무 말 안 할 정도로 사소한 문제였으니까 그렇죠. 멀미가 아닌 것 같으니까 계속 가요. 차라리 제틀런드에 빨리 도착해서 편하게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에일스포드를 떠난 지 오래되어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계속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알테어도 아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출발 신호를 보냈다.


“어머니. 자장가 필요해요?”

가만히 내 상태를 지켜보던 글로리아가 조심스럽게 속삭이더니, 내가 자기를 재울 때 불러 주곤 했던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살짝 어설펐지만, 애정이 담긴 자장가를 들은 탓인지 울렁대던 속이 조금 편해지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잠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글로리아의 노래 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정신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었다.

***

괴로워하던 나디아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는 걸 확인한 알테어가 슬쩍 마차 문을 열었다.

부부를 수행하던 블란이 재빨리 말을 몰아 옆으로 다가오자, 알테어가 짧게 명령했다.


“말을 제일 잘 모는 게 누구지?”

“터너입니다. 먼저 제틀런드로 보낼까요?”

“그래. 서둘러 가서 의사를 준비해 놔. 나디아의 상태가 좋지 않다.”

“알겠습니다.”

블란이 창문 너머로 축 늘어진 나디아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귓가에 한참 자장가를 속삭이던 글로리아도 어느새 지쳐서 알테어의 다리를 베개 삼아 잠들어 있었다.

참으로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아닌가.

나디아의 상태가 걱정스러운 와중에도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블란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블란은 서둘러 기사 하나를 불러 먼저 알테어의 명령을 전했다.

무리에서 벗어나 빠르게 달려 나가는 기사의 꽁무니를 쳐다보며 블란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아프신 건 아니셔야 할 텐데.’

사람들은 이 단란한 가족의 중심을 알테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보다 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블란은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이 가족의 중심은 언제나 나디아였다.

단단하게만 보이는 알테어도 나디아가 무너지면 함께 무너지고 만다.


‘그러니 이상한 고집을 부리시는 거지.’

알테어와 나디아가 둘째 문제로 다툼 아닌 다툼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벌써 에일스포드에 쫙 퍼져 있었다.


‘영주님의 생각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극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일에든 무던한 이 남자를 극성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나디아뿐이겠지.

역시 단란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블란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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