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6화. 당신이 제일 문제야. (166/170)


외전 6화. 당신이 제일 문제야.
2023.01.04.



 


“우와아!”

제틀런드의 광활한 풍경에 글로리아가 감탄하며 알테어의 다리를 꼭 껴안았다.


“다다!”

하늘에는 에일스포드로 놀러 오던 새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다다가 많아요!”

세상에 그렇게 생긴 새는 다다밖에 없는 줄 알았던 터라 글로리아의 두 눈이 크게 동그래졌다.

알테어는 하늘에서 눈을 못 떼는 글로리아를 안아 올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새를 볼 수 있도록 해 줬다.

글로리아는 아버지가 밉다며 주먹을 마구 휘둘렀던 게 언제였냐는 듯 알테어의 목을 끌어안으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 냈다.

평소라면 귀여운 글로리아의 행동에 미소부터 나왔을 테지만, 오늘은 알테어의 마음이 무거웠다.

제틀런드에 도착하자마자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있는 나디아의 컨디션 때문이었다.

기운 없이 축 늘어진 나디아가 ‘난 괜찮으니 글로리아에게 영지를 구경시켜 줘요’라며 내쫓지 않았다면, 아마 알테어는 종일 그녀의 곁을 지켰을 것이다.

사실은 지금도 얼른 나디아 곁으로 가서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 도착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글로리아의 눈빛도 외면하기 어려웠다.


“저기! 저기도 가 볼래요!”

알테어는 작전을 세웠다.

아이에게 먼저 들어가자는 말을 할 수 없다면, 아이가 먼저 들어가자는 말을 하게 하면 된다.


“그래. 글로리아가 직접 둘러봐야지?”

알테어가 안겨 있던 글로리아를 땅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두 발로 이곳저곳을 모두 살펴보는 강행군을 펼친다면 아무리 체력이 대단한 글로리아라도 감당하기 힘들 거다.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금세 저택으로 가자고 말할 게 뻔했다.


“네에!”

아버지의 속셈 따위는 전혀 모르는 순진한 어린이가 신이 나서 손을 번쩍 들었다.

***

알테어가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를 해 뒀는지, 제틀런드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의사며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의사는 진찰을 시작했고, 시녀들은 심신 안정에 좋은 향을 피우고 차를 내오느라 분주했다.


‘아무튼 극성이라니까.’

알테어 에일스포드의 이름 앞에 ‘극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날이 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하지만 난 그 표현보다 알테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건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알테어 에일스포드는 아주 극성맞은 남편이었다.


‘의사까지는 필요 없었는데.’

극성맞은 알테어는 푹 쉬면 괜찮아질 문제를 꼭 이렇게 크게 키우는 습성이 있었다.


“으음⋯⋯.”

그런데 단순한 과로라며 간단하게 진찰 결과를 내놓을 줄 알았던 의사가 한참이나 끙끙대며 이리저리 내 상태를 살폈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 긴장하며 의사를 쳐다보니 그가 아주 곤란한 얼굴로 식은땀을 닦았다.


“저어⋯⋯ 혹시 에일스포드의 주치의께서는 별말씀이 없으셨습니까⋯⋯?”

“특별히 진찰받지 않았어요. 과로가 아닌가요?”

갑작스럽게 몸이 무거워지긴 했지만 피로가 누적되면 종종 있는 일이라 다른 문제가 있다곤 생각 못 했다.

그래서 바쁜 리온을 붙잡고 따로 진찰받진 않았는데.

의아하게 눈을 껌뻑이고 있는 날 보더니 의사가 심각한 게 아니라며 얼른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괜히 입을 놀렸다가 실망하실까 봐⋯⋯ 평소 마님의 상태를 잘 아시는 주치의께서 어떤 의견을 주셨는지가 중요할 것 같아서 여쭌 겁니다.”

“실망이라뇨?”

갈수록 이야기의 맥락이 이해가 안 되고 있었다.

점점 의문에 빠져드는 내 얼굴을 본 의사가 잠시 고민하다가, 주위의 시녀들을 모두 물린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어⋯⋯ 제 의견으로는, 아무래도 임신하신 것이 아닌지⋯⋯.”

“네? 임신이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눈이 동그래진 채 입을 떡 벌리자 의사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아직 초기인지라 정확히 파악이 안 되지만, 보름 정도 후에는 확실히 파악될 것 같습니다. 혹 징후를 못 느끼셨는지요?”

“어어⋯⋯.”

그러고 보니 생리할 때가 되긴 했는데 소식이 없어서 조금 늦어지나 보다 했던 게 떠올랐다.

조금 늦어지거나 이르게 찾아올 때가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그게 임신 때문이었다고?

난 조심스럽게 배를 만져 보았다. 당연히 아직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의사가 허튼소리를 했을 리는 없으니⋯⋯.


‘임신이라니.’

내가 바라던 일이었다. 알테어에게 더 많은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었으니까.

기쁜 마음에 미소부터 걸렸지만, 곧 떠오른 알테어의 얼굴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갑작스러운 내 변화에 의사가 다소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님⋯⋯?”

“아. 아니에요. 고마워요. 달리 조심할 건 없겠죠?”

“한동안 몸과 마음을 편히 하셔야 합니다. 이 시기가 가장 위험합니다.”

“맞아요. 그랬었죠.”

난 글로리아를 가졌을 즈음의 기억들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로리아를 가졌을 때는 여러모로 상황이 나빠서 아이를 지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상황이 안정적이라 걱정할 것이 없는데도 그때보다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땐 알테어와 나, 모두 아이를 원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임신했단 소리를 들으면 알테어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부터 걱정됐다.


“우선 공작님께는 비밀로 해 줘요.”

“공작님께도 말입니까?”

“완전히 확신이 들면 말하고 싶어서요. 시녀들을 물린 것도 아직 확신하기 어려워서 그런 거 아니었나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의사가 의아한 듯 눈을 껌뻑이면서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께서 그리 명하시면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환자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래요. 부탁할게요.”

“예. 초기에 도움이 되는 약을 지어 올릴 테니 꾸준히 드시면 안정기로 접어드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알겠어요. 이만 나가 보세요.”

할 일을 마친 의사가 예를 갖춰 인사하고 방을 떠났다.

잠시 자리를 피했던 시녀들이 다시 들어와서는 다소 어두운 내 얼굴을 보며 눈치를 살폈다.

의사와 나의 대화가 썩 길고 심각했던 탓에 혹시 나쁜 이야길 들은 건 아닌지 궁금한 눈치였다.

난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기다렸던 소식을 들었는데 오히려 마음이 복잡했다.

***

알테어는 넓은 영지 곳곳을 두 발로 걸어 다니다 지쳐 잠든 글로리아를 품에 안아 들고 승리자의 미소를 지은 채 당당히 저택으로 귀환했다.

마구 걷게 해서 글로리아를 지치게 하겠다는 알테어의 전략은 정확히 먹혀들었다.

글로리아가 알테어의 예상을 훌쩍 넘어 한 시간이나 영지를 누빈 것은 놀라웠지만 말이다.

알테어가 개선장군처럼 글로리아를 안고 저택으로 돌아오자 입구를 서성이고 있던 시녀가 황급히 그를 맞았다.

제틀런드에서 나디아를 전담하는 시녀였다.


“의사는?”

알테어는 앞뒤 자르고 다급하게 본론만 물었다.

시녀가 입구까지 나와서 서성이고 있었을 정도라면 뭔가 결과가 안 좋았던 건 아닐까 싶었다.

알테어의 걱정처럼 시녀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저희를 모두 물리고 마님과 독대해서 정확히 진찰 결과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떠난 후 들어갔더니 마님의 표정이 많이 안 좋으셨습니다. 식사도 전부 물리고 계속 침대에만 계셔요.”

“의사에게 물었어야지.”

“그리했는데⋯⋯ 마님께서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셨는지 절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시녀의 설명에 알테어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의사의 입단속까지 시킬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리아를 방으로 데려가서 재워.”

알테어가 품에 안긴 글로리아를 시녀에게 넘겼다.

시녀는 능숙하게 글로리아를 받아 안아 알테어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알테어는 시녀가 올린 인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나디아가 잠들어 있을 침실이었다.

서둘러 침실에 도착해 문을 열자 고요하고 어두운 방에서 나디아가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협탁에는 약을 먹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알테어는 혹시라도 나디아가 잠에서 깰까 싶어 최대한 발걸음 소리에 기척까지 모두 죽이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수를 잡을 때도 기척에 이 정도까지는 신경 쓰지 않으니 기사들이 봤다면 역시 극성이라고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기척을 죽였는데도 나디아는 알테어가 들어서는 걸 알아챘다.

슬며시 눈을 떠 시선을 맞추는 나디아를 보며 알테어가 낭패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알았어?”

“향기요.”

나디아가 슬쩍 웃으며 코끝을 톡톡 두드렸다.


“가까이 다가오면 향기가 나잖아요. 알테어 향기는 바로 알아차려요.”

알테어는 나디아의 대답보다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일에 더 집중했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시녀의 말을 들어서인지 나디아의 얼굴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창백하게 느껴졌다.


“무슨 문제가 있길래 의사 입단속까지 시켰어?”

“음⋯⋯.”

웃고 있던 나디아의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냥 피로 누적이죠, 뭐.”

“그냥 피로 누적인데 의사가 시녀들을 전부 물려? 겨우 그 이야기를 하려고?”

“말만 내 시녀지, 다 알테어 사람이라니까. 그걸 죄 일러바쳤어요?”

나디아가 입술을 비죽이자 알테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문제였으면 내게 말 안 했을 거야. 당신 건강과 관련된 문제니까 그런 거지.”

“정말로 피로 누적이라니까요.”

“나디아. 우린 이제 그런 거짓말에 속을 사이가 아니잖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알테어의 시선에 나디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알테어가 뭐라고 말할지 걱정돼서⋯⋯ 말을 못 하겠어요.”

살짝 떨리기까지 하는 목소리에 알테어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말로 심각한 문제라는 게 현실적으로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그게 뭐든 같이 고민해.”

알테어가 다소 급하게 나디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나디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디아의 눈에 설핏 물기가 어려서 알테어는 더욱 초조해졌다.


“무슨 일이든, 내가 다 문제없도록 할게.”

“다른 문제는 없어요. 이건 그냥⋯⋯ 알테어가 제일 문제인데.”

“내가 문제라고?”

“그렇다니까요!”

나디아가 억울하다는 듯 작게 주먹을 쥐어 알테어의 가슴팍을 툭 쳤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 받아들일 거라고 약속해요.”

“당연히 약속해.”

말이 끝나자마자 알테어가 재빨리 대답하자 나디아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 없이 그렇게 막 대답하지 말고요. 진심으로 고민하고 약속해요.”

“진심이야. 생각 없이 대답한 거 아냐.”

“아니⋯⋯ 이번에도 생각도 안 했으면서⋯⋯.”

억울하다는 듯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알테어의 눈빛에 나디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내가 임신했다고 하면 어떡할 건데요?”

‘만약에’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만약’의 상황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알테어의 눈이 살짝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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