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보여 주고 싶어요.
(167/170)
외전 7화. 보여 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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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화. 보여 주고 싶어요.
2023.01.08.
난 조심스럽게 알테어의 눈을 살폈다.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지금 그의 혼란을 그대로 말해 주는 듯했다.
“임신⋯⋯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을 중얼거림과 함께 알테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어떤 반응이 나올까.
두렵기까지 한 마음에 어깨가 움츠러드는데 순간 쿵- 하고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알테어가 침대 헤드에 제 머리를 갖다 박은 것이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왜 갑자기 자해를!
난 놀라서 알테어의 머리를 살폈다.
다행히 상처가 난 흔적은 없었지만 놀란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으니 알테어가 슬쩍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았다.
“내가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
“네?”
“절대 안 된다고, 아이 같은 것보다 당신이 안전한 게 더 중요하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해 놓고⋯⋯ 그랬던 주제에 물색없이 기뻐.”
기뻐.
그 짧은 말에 긴장이 탁 풀리며 안도감이 밀려왔다.
난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조심스럽게 알테어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정말 기뻐요?”
“그게 거짓말이었으면, 머리를 저기 갖다 박지도 않았지.”
한숨을 푹 내쉰 알테어가 침대에 걸터앉아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당신이 그때처럼 힘들까 봐 걱정돼. 그런데도 기뻐. 상반되는 감정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니. 이게 미쳤다는 증거가 아니면 뭐겠어?”
“알테어. 사람들은 원래 다 그래요. 딱 한 가지 감정만 가지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난 대체로 그랬어. 모든 게 명확한 사람이었는데, 당신과 연관된 일에는 항상⋯⋯.”
말끝을 흐린 알테어가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당신이 내 삶에 들어온 후로 계속 미쳐 있었던 것 같군.”
태연하게 제가 미친놈이라고 주장하는 알테어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알테어가 ‘도대체 그게 뭐가 웃기지?’라는 듯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내 배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글로리아를 가졌을 땐 내가 많이 신경 쓰지 못했지. 이번에는 제대로 보필하겠어.”
“그 보필이라는 게⋯⋯ 설마 날 방에만 꽁꽁 묶어 둘 생각은 아니겠죠?”
“⋯⋯안 되는 건가?”
“당연하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게다가 적당한 운동도 중요하다고요.”
“어렵군. 당신에게 ‘적당한’이라는 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 늘 감이 안 잡히거든.”
확실히 알테어의 ‘적당히’와 나의 ‘적당히’는 기준이 많이 다르다.
알테어는 에일스포드의 커다란 연무장을 10번 뛰는 게 적당한 운동이 되겠지만, 내 경우는 그 연무장을 반 바퀴 뛰는 것도 힘든 수준이었다.
“우선 출산할 때까지 수도에 머무르는 건 어때? 거긴 마리가 있으니까. 당신이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시녀니까 편하게 쉴 수 있을 거야.”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마리를 에일스포드로 불러오는 방법도 있지만, 그녀가 수도에서 바인 후작저의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어서 장기간 곁에 두긴 힘들었다.
그러니 내가 가는 게 가장 확실했다.
“당신은 에일스포드에 있으면 뭐든 일하려고 하니까, 마리를 옆에 두고 요양하는 게 좋겠어. 날씨도 그쪽이 더 좋고. 먹거리도 다양하니까.”
“응. 그렇게 할게요.”
“그럼 당장 수도로⋯⋯.”
“당장이요?”
난 놀라서 펄쩍 뛰었다.
“이제 막 제틀런드에 도착했는데 무슨 말이에요? 정해진 일정대로 해요. 정기 시찰은 다 하고 떠나야죠. 어차피 곧 수도로 갈 텐데 뭐 하러 서둘러요?”
“정해진 일정 대로라니. 그 시찰 일정을 당신이 어떻게 다 소화해?”
“글로리아를 가졌을 때도 웬만한 건 다 평소처럼 했어요.”
“내 부인께서는 글로리아를 순탄하게 낳은 게 아니라는 걸 벌써 잊었나?”
“그야⋯⋯ 그건 갑자기 숙부가 달려들어서 그런 거였고⋯⋯.”
“이번에도 이상한 놈을 마주치지 말란 법이 없어. 당신이 예전에 걱정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글로리아 외의 후계자가 없길 바라는 사람도 꽤 있으니까. 임신 소식도 대외적으로 안 알리는 게 좋겠군.”
“응. 내 생각도 그래요.”
어차피 배가 불러 오면 사방에 소문이 퍼지겠지만, 굳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알테어는 고개를 끄덕이는 날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매만졌다.
“첫 번째에 많은 걸 못 해 줬으니, 이번에는 뭐든 다 해 줄게, 나디아.”
“뭐든이라니. 내가 하늘에 뜬 달이라도 따 달라면 어쩌려고 그래요.”
유치한 소원을 들먹이며 웃자 알테어가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로 원한다면 방법을⋯⋯.”
절대 거짓말하는 눈이 아니었다.
내가 그걸 원한다고 하면 정말로 진지하게 방법을 찾아 나설 것 같은 눈빛이라 난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농담! 완전히 농담이었어요! 그러니까 진지해지지 말아요.”
정말이지.
이 진지한 남편 앞에서는 농담도 쉽지 않았다.
***
최대한 임신 사실을 티 내지 말자던 알테어의 계획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의사가 입단속을 제대로 못 했다거나, 시녀들이 내 변화를 보고 임신 사실을 알아차려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원인은⋯⋯.
“괜찮은 건가? 먹을 만한가? 혹시 입맛이 없으면 말해. 먹고 싶은 것도 다 구해 올 테니까.”
“⋯⋯알테어.”
내 사소한 행동에 과하게 반응하며 극성을 떨어 대는 알테어 때문이었다.
걷다가 이마에 조금이라도 땀이 맺히면 날 번쩍 안아 들고, 식사 도중에 잠깐 식기를 내려놓으면 입맛이 없는 거냐고 지금처럼 질문 세례를 쏟아 냈다.
식사 시중을 들던 시녀들은 심각한 얼굴로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알테어가 웃긴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평소에는 위엄이 넘치던 공작께서 부인의 작은 행동에 전전긍긍하니 당연히 재밌을 거다.
“비밀로 하자면서요⋯⋯ 그래 놓고 이렇게 티를 내면 어떡해요?”
내 질책에도 알테어는 잘못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이 되는 걸 어쩌겠어. 내일이면 수도로 떠나는데, 더 든든하게 식사해야 한다고.”
“맞습니다, 마님. 수도로 떠나시는 길은 체력적으로 힘드실 텐데, 오늘 너무 적게 드셨어요.”
뒤쪽에 서서 열심히 내가 먹은 음식의 종류와 양을 기록하고 있던 의사가 얼른 알테어의 말에 긍정했다.
이렇게 의사를 24시간 곁에 붙여 둔 것도 알테어의 명령이었다.
난 잔뜩 질려서 잔소리꾼 두 명을 쳐다보다가, 내 옆에 앉아 열심히 닭고기를 우물거리고 있는 글로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른 이들은 모두 내 편이 아니지만, 글로리아만은 내 편이 되어 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글로리아. 저 귀찮은 잔소리꾼들을 어찌 떼어 낼 수 있을까?”
그런데 ‘제가 전부 물리칠게요!’라며 당장 알테어의 다리를 걷어차 줄 거라고 생각했던 글로리아가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여 줬다.
“우웅⋯⋯ 동생을 위해서는 많이 먹어야 해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단호하게 말하는 글로리아를 보니 누가 사전에 이 애를 포섭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치사해요!”
휙 고개를 돌려 알테어를 쳐다보자 그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씩 웃었다.
“당신도 글로리아를 포섭했었잖아. 나만 치사한 게 아니라고.”
둘째를 가지는 게 어떠냐고 알테어를 꼬드길 때 글로리아를 내 편으로 끌어들였던 걸 언급하니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생이 갖고 싶다는 글로리아의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고, 나와 알테어가 각자의 처지에 맞게 그 애의 마음을 이용했을 뿐이니까.
“⋯⋯이럴 때까지 마음 잘 맞는 부부일 필요는 없는데.”
난 한숨을 푹 내쉬며 접시 위에 반 이상 남은 닭고기를 썰었다.
***
“세상에! 둘째 아기님이 찾아오셨다니 이게 무슨 경사인가요!”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마리가 크게 기뻐하며 날 맞이했다.
“아직 수도에는 소식을 안 전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네? 이미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쫙 퍼졌는데요. 에일스포드의 사용인들도 이미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저흰 당연히 공식적으로 공표하신 줄로만⋯⋯.”
마리가 당황해서 눈을 껌뻑였다.
알테어가 하도 공공연하게 날 챙겨서 다들 임신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당연한 오해인지라 사용인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글로리아 아가씨 이후에 둘째 소식이 없어서 사실 많이 걱정했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마리가 내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첫째 아이를 힘들게 낳으면 그 이후에는 아이가 잘 찾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불길한 이야기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마리도 내내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맞아. 다행이야. 난 대가족을 원하거든.”
알테어와 나, 모두 외롭게 자랐으니 새로 꾸려 나갈 우리 가족은 복작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임신할 때마다 알테어가 계속 극성일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지만 말이야.’
첫째 때는 이렇게까지 알테어가 극성인 줄 몰랐는데.
‘혹시라도 다음에 또 임신하게 되면 알테어가 안 보이는 곳에 있어야겠어.’
아직 둘째를 낳지도 않았는데, 난 벌써 셋째와 넷째를 상상하며 키득댔다.
“아이를 낳으실 때까지 수도에 머무르신다기에 의사 선생님께도 연락을 드려 놨어요. 며칠 안으로 오실 겁니다.”
“어? 리온을 불렀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셔요. 공작님께서도요.”
“그리고 마리도?”
“그럼요.”
마리가 빙긋 웃으며 날 부축해 소파에 편히 앉혔다.
“공작님께선 국왕 폐하를 알현하러 가셨어요. 요즘 건강이 썩 안 좋으셔서⋯⋯ 황태자께 양위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양위?”
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아 곧 오르카 황태자가 황위에 오를 거라는 이야기는 많이 떠돌았지만, 그것도 황제 사후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양위라니.’
하지만 늘 고고하던 황제의 성품을 떠올려 보면, 완전히 꺾이기 전에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당당하던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랄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알테어를 굳이 부르신 이유가⋯⋯.’
양위를 논의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이제 정말로 한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미묘한 기분에 생각에 잠겨 있으니 마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그리고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어찌 들으셨는지 황태자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뭐든 다 알아. 이상한 일도 아니지.”
난 마리가 건네는 서신을 고민 없이 열었다. 내용은 뻔했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으니 만나자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뭘 보여 주고 싶어서 계속 이 난리지⋯⋯?’
심지어 알테어가 아니라 날 지정해서 서신을 보낸 게 아주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곧 황제가 될 사람이니까.’
척을 져서 좋을 건 없다.
“초대해 주신 날짜에 찾아뵙겠다고 답장을 보내야겠어.”
이젠 나도 예전의 소심한 나디아가 아니라 이거야!
당당하게 대답하자 마리가 빙긋 웃었다.
“예. 편지지를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