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손잡고 싶습니다.
(168/170)
외전 8화. 손잡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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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8화. 손잡고 싶습니다.
2023.01.11.
나와 알테어는 나란히 황궁으로 향했다.
알테어는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였고, 난 오르카 황태자의 초청을 받은 거였다.
“정말 혼자서 괜찮을지⋯⋯.”
가는 길이 달라져 헤어져야 하는 시점이 오자 알테어가 영 걱정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황궁에서는 무기를 소지한 호위를 대동할 수 없었다.
그것이 황실을 온전히 믿지 못한다는 불충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알테어야 호위나 무기가 없어도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겠지만, 홑몸도 아닌 날 혼자 보내려니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뭐가 걱정이에요. 황태자가 바보도 아니고, 날 대놓고 해쳐서 얻을 게 없잖아요.”
오르카 황자가 언제 눈이 휙 돌아 악당이 될지 모른다며 늘 경계 태세인 나지만, 그래도 이렇게 공식적으로 초청해 놓고 일을 치를 거란 걱정은 안 하는데.
‘역시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오르카 황자는 뒤에서 작당을 벌이는 타입이지, 앞에서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공식적으로 날 초청한 건 아주 안전하다는 신호였다.
“알아. 알지만⋯⋯.”
“알면 이만 가시죠, 공작님? 폐하를 언제까지 기다리시게 할 거예요.”
힘껏 알테어의 등을 떠밀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바위를 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난 작전을 바꿔 ‘아이고, 내 손목!’ 전법으로 알테어를 회유했다.
“이렇게 알테어를 계속 밀면 내 손목이 너무 아픈데요. 이만 폐하께 가는 게⋯⋯.”
“많이 아픈가? 인대가 늘어난 건 아니겠지?”
알테어가 가라는 말은 듣지도 않고 후다닥 내 손목을 살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궁 근위병들의 입에서 풉-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 제틀런드 공작의 팔불출 기질이 수도에 쫙 소문나겠군.’
난 진지하게 내 손목을 살피는 알테어의 팔뚝을 찰싹 때리며 손목을 빼냈다.
“아잇! 손목이 아니라, 갈 길을 가라는 뜻이었다고요! 얼른 가요!”
“예에. 정말로 더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황제의 시종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내 말을 거들자 그제야 알테어가 체념했다.
“알겠다. 가도록 하지. 그리고 나디아.”
“네.”
“그 무례한 자가 또 무례한 짓을 하면 탁자를 엎고 나와.”
“아니⋯⋯ 아무리 그래도⋯⋯.”
황궁에서 황태자를 두고 무례한 자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알테어뿐일 거다.
알테어의 성격이 원래 그렇기도 했지만, 그만큼 그의 권력이 공고하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지난 5년 동안 알테어는 황제의 아래에서 누구보다 깊은 신임을 받으며 그의 충신 역할을 자처했다.
‘건강이 악화된 후 양위를 고민하시며 알테어부터 찾으신 것도 큰 신뢰의 증거지.’
황제는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알테어에게 견고한 권력을 선물했다.
황제는 든든한 신하를 얻고, 알테어와 나는 안락한 삶을 보장받았으니 서로에게 ‘윈-윈’인 거래였다.
그런데 이제 그런 황제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황제의 시대가, 오르카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잘 해결하고 올 테니까 걱정 말아요.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으니까, 그것만 보고 돌아올 거예요.”
그렇게 알테어를 겨우 보내고 난 오르카 황태자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황궁 구석에 있는 처소를 사용했는데, 황태자가 된 후에는 중앙의 황태자 전용 공간이 그의 처소가 됐다.
새삼 그의 처지가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은 날 정원으로 안내했다.
내부 응접실이 아니라 정원으로 초대했다는 건 그만큼 날 가깝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곧 황제가 될 남자에게 그런 대우를 받는다면 누구나 기뻐할 것이다.
‘물론 난 아니지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친근한 척을 하나 싶어 잔뜩 경계하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부! 아부우!”
‘어? 아기 소리?’
놀라서 정원 안쪽을 살피니 여전히 번쩍이는 외모의 오르카 황태자가 아기를 안은 채 웃고 있었다.
전투 태세를 잔뜩 갖추고 정원에 들어섰던 터라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바스락대는 소리에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아챈 오르카 황태자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
“오셨나요, 후작.”
사교계 사람들은 대체로 날 ‘공작 부인’이라고 불렀다. 어쨌든 작위 상으로는 그쪽이 높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르카 황태자는 항상 날 ‘후작’이라고 부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비오스케스 공작도 날 후작이라고 꼬박꼬박 부르시지.’
내가 직접 하사받은 작위는 후작이니 그게 더 알맞은 호칭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전하.”
얼른 정신을 차리고 예를 갖춰 인사하자 그가 느긋하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예의씩이나. 괜찮습니다.”
‘아니⋯⋯ 우리 사이니까 예의를 꼭 갖추고 싶은데⋯⋯.’
속으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경계심을 잔뜩 세우고 있는데, 오르카 황태자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반갑게 손을 휘저었다.
“바아! 아부아!”
오르카 황태자는 잔뜩 경계할 수 있었지만, 옹알이하는 아기에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울 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경계가 스르르 무너져 난 조심스럽게 아이 곁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살피니 아이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오르카 황태자를 쏙 빼닮아 있었다.
난 그제야 아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오르카의 아들이구나.’
난 다시 한번 예를 갖춰 오르카 황태자에게 인사했다.
“몇 개월 전에 득남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축하드려요.”
“예. 벌써 7개월이 됐습니다.”
오르카 황태자가 인사를 받으며 싱긋 웃었다.
오르카 황태자는 2년 전 한 귀족 가문의 여인과 혼인했다.
평소 존재감이 전혀 없던 한미한 가문의 딸이었던 터라 한바탕 사교계가 시끄러웠던 기억이 있었다.
결혼식에는 나와 알테어도 참석했었는데 신부의 얼굴이 다소 매서워서 조금 놀랐었다.
소위 말하는 악녀 얼굴이라고나 할까.
그 옆에 서서 내내 싱글벙글대던 오르카 황태자의 얼굴과 비교되어 딱딱한 여인의 얼굴이 더욱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났다.
‘소설 속 오르카는 결혼을 안 했었는데.’
결혼은커녕 여기저기 적을 죽이러 다니기 바빴다.
그랬던 사람이 결혼하고 이렇게 아기까지 얻다니 새삼 소설과는 다른 세상이구나 싶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황손을 보여 주셔도 되나요? 아직 공식 석상에 내보이신 적이 없으신 것으로 아는데⋯⋯.”
내가 보자마자 아이가 오르카의 아들이라는 걸 못 알아본 것도 그래서였다.
황가의 아이들은 안전 등의 여러 이유를 고려해서 만 1살이 되기 전까지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1살 생일이 되면 그때 대대적인 탄신 연회와 함께 처음으로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오르카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직 황가 사람들만 이 아이를 보았답니다. 하지만 후작에게는 탄신 연회 전에 꼭 보여 주고 싶었어요.”
“오늘 꼭 보여 주고 싶다고 하신 게 그럼⋯⋯.”
“네. 이 녀석이랍니다. 이름은 리안이에요. 이미 공표된 것처럼.”
악당인 것을 제외하고 생각하면 오르카 황태자는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고, 아이는 그런 아빠를 꼭 닮은 것처럼 보였다.
장래가 촉망되는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떠나 왜 나한테 먼저 애를 보여 주고 싶었단 거지?
의문으로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오르카 황태자가 내 등 뒤를 힐끗댔다.
“그런데 공녀는 함께 안 왔습니까? 황궁 구경이 제법 재미났을 텐데요.”
“아. 글로리아는 긴 여정으로 지쳐 있어서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아쉽네요. 공녀에게 리안을 소개시켜 주고 싶었는데.”
“네⋯⋯?”
글로리아 이야기를 꺼내자 머릿속에서 점점 오르카 황태자의 속셈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설마⋯⋯.”
“음. 아마 후작의 ‘설마’가 맞을 겁니다.”
오르카 황태자도 내가 제 속셈을 알아차렸다는 걸 깨달았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글로리아 공녀의 짝으로 연하남은 어떻습니까? 아직 어린 아기이긴 해도 제법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다닌답니다.”
“전하. 아직 황손께서는 1살도 안 되셨는데⋯⋯.”
“나이가 뭐가 중요합니까. 벌써 공녀의 약혼자 자리를 노리는 놈들이 많다는 소리가 들리니 내가 기다릴 수가 없었지 뭡니까.”
확실히 오르카 황태자의 말처럼 벌써 글로리아를 두고 약혼 이야기를 꺼내는 집안이 많았다.
글로리아가 가지게 될 것이 워낙 많으니 어린애를 두고 군침을 흘리는 거다.
개중에는 얼토당토않게 글로리아보다 10살이나 많은 소년을 들이대는 집안도 있었다.
다행히 나와 알테어는 그런 황당한 집안과 글로리아를 엮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저희 글로리아를 좋게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하지만, 그 애의 혼사는 직접 결정하게 두려고 합니다.”
“공녀가 직접?”
귀족 사회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라 오르카 황태자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겠습니까? 공녀를 두고 욕심을 부리는 놈들이 아주 많을 텐데요.”
“저희 부부가 글로리아가 제대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도록 가르칠 테고, 또 강제로 글로리아를 굴복시키려는 사람이 있다면⋯⋯.”
“공작이 지켜 준다?”
“아뇨. 그 애 스스로가 지키죠. 글로리아가 얼마나 대단한 기사 유망주인지 모르실 거예요.”
“공녀가요?”
거짓 하나 없다는 듯 두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자 오르카 황태자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뭐, 그렇군요. 공작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오히려 그게 당연할지도.”
“네. 벌써 저는 감당이 안 된답니다.”
글로리아의 에너지를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자 오르카 황태자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공녀가 직접 선택한 남자와 이어 줄 생각이라면 오히려 잘됐습니다. 이 아비에 대한 평가는 빼고 내 아들만 제대로 봐 준다면 더 승산이 있겠죠.”
나와 알테어가 오르카 황태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으니 하는 소리였다.
“리안의 탄신 연회에는 공녀도 참석하는 겁니까?”
“공식 초청장이 온다면 참석하는 것이 신하의 예의겠지요.”
“그렇다면 공녀도 보게 되겠군요. 리안의 탄신 연회가 다가왔을 때는⋯⋯ 제가 황제일 테니.”
생각지 못한 황제 선언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오르카 황태자가 다소 어두운 낯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폐하께서 이미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이달 안으로 물러나실 거예요. 그래서 공작도 따로 부르신 거고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오르카 황태자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더욱 실감이 났다.
숨을 홉 들이켜자 오르카 황태자가 빙긋 웃었다.
“내가 젊었을 적에, 물론 지금도 젊지만, 그 시절에 상당히 수상쩍게 행동했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공작과 후작이 날 쉽게 신뢰할 수 없는 거겠죠. 하지만 이제 모든 걸 청산하고 제대로 손을 잡았으면 합니다.”
“⋯⋯.”
“오래전에 했던 거래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후작의 사촌을 예쁘게 치워 드렸잖아요.”
대단한 이야기를 가볍게 흘려 말하던 오르카 황태자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후작의 사촌은 요즘 어찌 지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