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보석과 돌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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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0화. 보석과 돌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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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0화. 보석과 돌멩이.
2023.01.18.
글로리아는 뚱한 얼굴로 책상에 쌓인 편지를 뒤적였다.
올해 16살이 된 글로리아는 제국 사교계에서 누구보다 주목받는 레이디라, 그녀에겐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가 날아들었다.
내용이란 뻔했다.
달콤한 말이 가득 담긴 구애의 편지다.
어린 시절에는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말이 단순히 친구로서의 희망인 줄 알았다.
에일스포드 영지에서 주로 지내며 또래 친구를 만날 일이 별로 없었던 글로리아는 그런 요청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또래의 소년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열심히 우정을 쌓아 왔는데, 점점 나이가 차면서 상대가 바라는 게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그것도 물려받을 것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뻔한 속셈을 갖고 가까워지려 했다는 걸 알고 어찌나 큰 배신감에 휩싸였는지!
글로리아는 편지 봉투에 찍힌 인장으로 대충 보낸 사람을 파악하고는 망설임 없이 편지를 휙휙 던져 버렸다.
이건 안 읽어도 되는 거.
저것도 안 읽어도 되는 거.
으. 이건 진짜 싫은 놈한테서 온 거.
그런 식으로 편지를 하나둘 던져 버리니 결국 책상에 남은 봉투는 하나뿐이었다.
황제의 장남 리안 황자가 보낸 편지였다.
가장 아래에 숨겨져 있던 리안의 편지에 비로소 뚱했던 글로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리안은 글로리아보다 신분이 높은 유일한 또래의 소년이었다.
글로리아에게 그건 꽤 특별한 지점이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다는 건 제게 붙은 수많은 칭호나 권리를 바라고 들러붙지 않는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글로리아는 얼른 봉투를 열어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전부였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글로리아는 펜을 들어 리안에게 보낼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리안이 보낸 것과 마찬가지로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렇게 한참 편지를 쓰고 있으니 조용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온 건지 올해 11살인 남동생 아셔가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제 방으로 들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야?”
“도주 중이야, 누나.”
“도주 중?”
“응.”
혹시라도 문 닫는 소리가 날까 봐 걱정스러웠는지 아셔가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문을 꼭 닫고는 후다닥 글로리아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이런 걸 발견했거든?”
아셔가 글로리아의 책상 위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투박하면서도 튼튼해 보이는 것이 딱 아버지 취향이라, 글로리아는 이게 누구 것인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 물건을 왜 함부로 가져와?”
“그러니까, 잘 들어 봐, 누나.”
아셔는 글로리아의 질책에도 굴하지 않고 차분하게 제가 어째서 아버지의 상자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아버지 집무실에서 늘어져 있는데 갑자기 책상 서랍이 눈에 띄는 거야. 늘 잠겨 있던 그 마지막 서랍, 누나도 알지?”
“알지.”
글로리아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테어는 좀처럼 비밀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라 글로리아와 아셔에게 모든 것을 공유해 줬다.
나중에 두 사람이 자신의 뒤를 이어 모든 영지 업무를 나눠 하게 될 테니까 미리 봐 둬서 나쁠 것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책상의 가장 아래 칸 서랍만은 예외였다.
모든 것을 남매에게 공유하는 알테어도 그 서랍만은 꼭 걸어 잠근 채 남매가 어떤 애교를 부려도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서랍이 열려 있는 거야!”
“뭐?”
“누나라면 그걸 안 들여다보겠어?”
“그야⋯⋯ 당연히 보지.”
“그러니까!”
글로리아가 동의하자 아셔의 목소리도 좀 더 당당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궁금해했었잖아. 도대체 거기에 뭐가 들어 있는지.”
굳게 닫힌 아버지의 책상 서랍은 아이들에게 수많은 것을 상상하게 하는 미지의 세계였다.
값비싸고 귀중한 물건이 들어 있는 걸까?
하지만 아버지는 우리에게 그런 걸 안 내어줄 분이 아니신데?
도대체 뭐가 들었기에 저렇게 철저히 숨기시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의문은 두 사람이 제법 자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그런데 그 서랍이 열려 있었다니!
아셔가 가져온 상자가 그 안에 있던 거라니!
리안에게 쓰던 편지에 대한 생각은 이미 글로리아의 머릿속에서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남매는 작은 상자 앞에서 머리를 맞대고 눈을 반짝였다.
“열어 봤어?”
“잠겨 있어.”
“그래?”
글로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묻더니 책상에서 굴러다니던 페이퍼 나이프로 가볍게 상자의 잠금을 해제했다.
놀란 아셔가 입을 떡 벌리자 글로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카인 아저씨한테 배웠어.”
“카인 아저씨는 기사면서 왜 그런걸⋯⋯.”
어려서부터 기사들과 어울리며 검술 훈련에 매진하던 글로리아와 달리 아셔는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었다.
늘 도서관에 틀어박혀 활자와 씨름하는 편이라 나디아와도 성향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기사’에 대한 지식도 몸으로 체험하기보다는 책에서 습득한 것이다 보니 글로리아와 달리 기사 아저씨들에 대한 환상이 제법 있어 카인과 잡기술을 연결하지 못한 거다.
하지만 누구보다 기사 아저씨들의 실체를 잘 아는 글로리아는 쓸데없는 소리를 그만하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젓고 얼른 상자를 열었다.
“잉?”
하지만 남매가 두근대며 열어 본 상자 안에는 조금 낡은 것으로 보이는 종이가 몇 장 들어 있을 뿐이었다.
“겨우 낡은 종이⋯⋯?”
“아버지께서 이걸 그렇게 숨기셨다고⋯⋯?”
어리둥절한 남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뭔가 대단한 보물이 나올 줄로만 알았던 남매는 다소 실망해서 어깨가 축 늘어졌다.
“도대체 무슨 종이지.”
글로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뻗어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쳤다가 제일 위에 적힌 글귀를 보자마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반응에 아셔도 얼른 글로리아가 펼친 종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헙!”
글로리아처럼 아셔도 글귀를 확인하자마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시 남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처음에는 실망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면, 이번에는 흥미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건⋯⋯.”
“어머니와 아버지의⋯⋯.”
서로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던 남매가 동시에 외쳤다.
“연애편지야!”
“연애편지잖아!”
두 사람의 시선이 재빨리 낡은 종이, 아니, 부모님의 연애편지로 향했다.
***
사랑하는 나디아.
사랑하는. 사랑하는.
이제는 당신 이름 앞에 몇 번이고 ‘사랑하는’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어색하지 않게 되었군.
참으로 새삼스럽지만 말이야.
처음 결혼했을 때만 해도 내가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당당히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예전에는 카인이 날 부추기는 바람에 편지를 쓰다가, 결국 제대로 마무리도 못 하고 주머니에 구겨 넣었었지.
그랬던 내가 이제 당신에게 서슴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보면 카인 녀석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상상도 안 되는군.
아마 나와 결혼하던 순간의 당신에게 이 사실을 전한다면, 그때의 당신 역시 상상조차 못 할 거야.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날 보고는 기절까지 했으니까 말이야.
그땐 과연 이 결혼이 제대로 잘 이어질 수나 있을지 고민했겠지.
기절한 신부를 앞에 두고 사람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쓰러지는 게 말이 되냐는 소리 따위나 하던 그 순간의 나도, 분명 이런 순간이 오게 될 줄은 몰랐을 테지만.
아무튼, 제틀런드는 모든 게 좋아.
몇 가지 사소한 문제는 있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유일하게 어려운 문제라면 당신이 늘 돌보던 정원의 꽃에 대한 문제야.
뭐, 이것 역시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그저 꽃들이 생기가 없는 것 같아서 물을 잔뜩 줬을 뿐인데, 갑자기 정원사가 기겁하면서 달려오더군.
이 녀석들은 물을 많이 주면 안 되는 녀석들이라나?
그 이야기를 들으니 꽃에 물을 주는 것이 사람에게 애정을 쏟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군.
내가 주고 싶은 만큼의 애정을 일방적으로 주는 것보다는 상대가 필요한 만큼의 애정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둘째를 가진 당신 곁을 계속 지키고 싶지만⋯⋯.
그건 당신이 바라지 않을 테니까, 난 그걸 따르면서 내 할 일을 할 뿐이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난 늘 외로웠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마음 깊은 곳은 항상 외로웠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된 후로는, 이렇게 홀로 어두운 곳에 앉아 있어도 외롭지가 않아.
도대체 외로운 게 뭐였을까?
그게 뭐였던 건지 너무도 희미해서 그런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라면 믿겠어?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아주 좋을 텐데.
당신이 내 등불이 되어 준 것처럼, 나도 당신의 등불이 되었을까?
글로리아에게도, 곧 태어날 우리 둘째에게도?
나이가 들더니 의문만 많아지는 것 같군.
난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고, 그 확신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당신과 결혼한 후로는 자주 날 의심하게 돼.
물론 그건 아주 좋은 의미야.
***
종이에 적힌 편지를 모두 읽은 남매가 입을 떡 벌렸다.
“아버지가 쓰신 편지라고? 이게?”
“그 무뚝뚝한 아버지께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건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안다.
하지만 행동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달콤한 것은 절대 아니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껴안는 모습이나 가볍게 입 맞추는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지금 이 편지가 더욱 두 사람의 애정을 잘 보여 주는 느낌이라 절로 발을 동동 구르게 됐다.
“어⋯⋯ 그런데 이거 아버지가 어머니께 쓴 편지 아냐? 왜 아버지가 가지고 있어?”
이상한 점을 깨달은 글로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편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녀의 말처럼 알테어가 나디아에게 쓴 편지임이 분명한데, 수신인인 나디아가 아니라 발신인인 알테어가 이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는 게 영 이상했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편지의 뒷면에 짧게 적힌 나디아의 글씨를 발견한 탓이었다.
아마도 나디아가 알테어에게 받은 편지지를 그대로 써서 그에게 다시 답장을 보낸 듯했다.
<빛은 모든 걸 달라지게 해요.
길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도 빛을 받으면 보석처럼 반짝이죠.
난 외롭게 바닥에 내던져진 돌멩이였어요.
그런데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에 차여 이리저리 구르던 그 돌멩이 같던 시절이 이젠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요.
당신 덕분에요.
내게 당신이 등불이 되어 주었느냐고요?
이미 그랬고, 앞으로도요.>
어머니가 보낸 답장까지 모두 읽은 남매는 잠시 말을 잃고 한참이나 종이를 쳐다보았다.
부모님이 서로를 향해 깊은 애정과 굳건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했다.
“나도 우리 부모님처럼 살고 싶다.”
“나도.”
혼잣말에 가까운 글로리아의 이야기에 아셔가 얼른 동의했다.
남매가 서로를 쳐다보며 씩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결혼을 잘못한 것 같다>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