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第一章 용골(龍骨) (2)
저벅! 저벅! 저벅!
노인과 소년이 밤길을 걸었다.
밤하늘에 달과 별이 총총하다. 캄캄한 어둠을 수많은 빛무리가 환하게 비춰준다.
“여기가 어디예요?”
소년이 물었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묻는 말은 아니다. 걸음을 걷기가 무료해서 툭 던진 말이었다.
“길이다.”
“그걸 누가 몰라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냐는 거죠.”
“절대 넘보지 못할 성으로 들어간다.”
“킥킥!”
소년이 키득대며 웃었다.
“……왜 웃냐?”
노인이 눈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우리에게 넘보지 못할 곳이 어디 있어요.”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인고?”
“우리 칼은 천하제일, 절대 무적이라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그럼 못 갈 곳도 없는 거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노? 천하제일, 절대 무적이라니. 허허!”
노인이 실소를 흘렸다.
“안 하셨다고요?”
“허허! 그놈 참! 글쎄 내가 그런 말을 언제 했냐니까?”
“우리 칼은 백만 명 중 한 명만 사용할 수 있는 칼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천하제일인 거죠.”
“천만 명 중 한 명만 사용할 수 있는 칼도 있느니.”
“피잇! 그런 칼이 어디 있어요?”
“허허허!”
노인은 다시 실소를 흘렸다.
노인은 매우 인자해 보인다. 넓은 얼굴에 수염을 거칠게 길렀지만, 두 눈에서는 인자함이 뚝뚝 흘러넘친다. 둥그스름한 몸도 인자함에 한몫했다.
소년은 매우 키가 작았다. 몸매도 가늘다. 하지만 마냥 어리게만 보이지는 않는 것이, 얼굴에 주름이 기형적으로 무척 많았다. 그래서 소년인데도 매우 조숙해 보였다.
노인이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놈아. 귓구멍 파고 똑바로 들어. 우리 칼은 일품(一品)이다. 가장 좋은 칼이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칼이야. 하지만 세상에는 특상(特上)이 있다. 흔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있어. 그러니…… 천하제일이니 절대 무적이니 하는 망언은 입에 담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마라.”
“피잇! 일품도 찾기 힘든데 특상을 어떻게 찾아요?”
“허! 그놈 참. 그러니 네가 아직 서리(徐離) 성(性)을 받지 못한 거야!”
“사부님.”
“왜?”
“말 나온 김에 서리 성 주시면 안 돼요? 그냥 동박(動剝)이라고 부르니 밋밋하잖아요. 서리 성을 붙이면 서리동박이 되나? 서리동박, 서리동박. 히! 듣기 좋은데.”
“칼만 만들어라. 칼이 중요하지, 그까짓 성씨가 뭐가 중요하다고 집착이냐.”
“그러니까 지금 달라고요. 칼은 거진 만들었잖아요.”
“아직 멀었다.”
노인과 소년이 티격태격 말을 나누며 밤길을 걸었다.
* * *
두 사람 앞에 오두막이 나타났다.
농사꾼이 더위를 피하거나 새참을 먹으려고 지어놓은 듯한 허름한 오두막이다.
“넌 여기서 기다려라.”
“킥킥! 네.”
소년은 냉큼 오두막으로 올라갔다.
어두운 밤이고, 인적이 끊긴 곳이다. 노인은 소년에게 혼자 있으라고 했지만, 소년은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다. 아주 태연하게 오두막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절대 움직이지 마라. 꼼짝도 하지 마.”
“네. 알았어요.”
“누가 와도 말 섞지 말고.”
“네.”
“……차라리 누가 온다 싶으면 여기 있지 말고 차라리 숨어 버려라. 숨는 건 잘하지? 절대로 부딪치지 마.”
“네네네. 알았습니다. 알았다고요.”
동박은 듣기 싫은 듯 귀를 후볐다.
동박을 뒤로한 채, 노인은 작은 산을 옆에 끼고 길을 걸었다.
길옆으로는 넓은 논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에는 야트막한 산이 정겹게 이어진다.
숲에서 소나무 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노인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찌륵! 찌륵!
풀벌레 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온다.
“쯧! 이놈의 풀벌레는 오늘따라 왜 이리 기승인가. 쯧!”
노인이 쓸쓸한 느낌을 숨기지 못하고 혀를 찼다.
얼마 후, 소로 끝자락에 작은 집 한 채가 나타났다.
집에 기와를 얹기는 했는데, 집이라기보다는 산속 깊은 곳에 틀어박힌 산신각 느낌이었다.
다만 산신각처럼 작지는 않은 것이, 십여 명 정도는 거주할 수 있을 크기는 되었다. 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안이 보일 정도로 담장이 낮았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저택은 작은 편이다. 고작해야 방이 두 개 내지는 세 개 정도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의 발걸음은 저택 앞에서 멈췄다.
끼이이익!
대문이 열렸다.
낮은 담장 때문에 대문을 열어 주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노인이 오기 전부터 대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어 주기 위해서.
노인이 오기 전에 문을 열어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노인이 도착한 다음에야 문을 열었다. 저택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문 여는 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후!”
노인은 깊은 한숨만 토해냈다.
방 안은 깨끗했다. 침상 외에 집기라고는 전혀 없으니 깨끗할 수밖에 없다.
침상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제 쉰 정도 되는 중년인이 초췌한 몰골로 눈을 반쯤 뜬 채 천정을 올려다봤다.
“쯧! 진작 연락을 주시기 그랬습니까?”
노인이 침상 곁에 앉으며 병자의 손을 움켜잡았다.
“연락한다고 달라질 것이 있습니까? 괜히 마음고생만 깊어질 뿐……. 지금이 딱 좋습니다. 멀쩡한 정신으로 말할 수 있고, 몸이 말을 안 들으니 뭘 부탁하기에도 스스럼없고.”
노인과 중년인은 서로에게 존대했다.
“약은 없는 겁니까?”
“약이 있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하하, 그런 얼굴로 보지 마세요. 전 정말 괜찮습니다.”
중년인이 활짝 웃었다.
그는 이미 삶과 죽음에 대한 갈등이 끝난 것 같다. 얼굴이 매우 편해 보인다. 죽음에 대해서 저항을 하는 얼굴이 아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상태다.
한 사람이 이런 상태가 될 때까지 세상은 전혀 몰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검문주가 병마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침상에 누운 채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태라는 걸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그렇다.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은 성검문주다.
문주가 되기 전, 무림을 활보할 때 얻은 별호(別號)는 이초결검(二招決劍)이다. 첫수는 양보하고, 두 번째 초수에서 승부를 결정짓곤 해서다.
호(號)는 벽수(璧水), 당년 오십육 세다.
무림 초절정고수가 싸움에서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고 한낱 병마에 쓰러져 누워있는 것이다.
“이렇게 있는 건 문주답지 않습니다. 무인에게 침상은 잠시 쉬는 곳일 뿐, 의지할 곳이 못 됩니다.”
“후후! 제 모습을 보시고도 아직 잔소립니까?”
문주의 모습은 처참했다.
그렇게 단단하던 근육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뼈만 남았다. 살갗은 푸석하고, 눈은 휑하니 들어갔고, 거멓게 타 버린 입술은 바짝 말라 있다.
내공으로 고통을 억누르고 있지만,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아파 보인다.
반위(反胃: 위암).
이미 죽음의 손길이 위장뿐만이 아니라 전신으로 쫙 퍼진 후다.
“문주님.”
노인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어서 문주를 부르기만 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년인이 노인의 손을 꽉 잡았다.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사이에 나눌 대화가 없다. 아픈 것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해 주지 못한다.
“오늘…… 첫째가 비무를 했다는데, 보셨습니까?”
성검문주가 공허한 눈으로 천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봤습니다. 그 결전…… 제게 보여 주려고 일부러 만드신 겁니까?”
“제가 만든 게 아니죠. 그런 싸움을 어떻게 일부러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낭야에게 투지가 없었다면 그런 싸움은 애초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 저는 투지를 살짝 부추겼을 뿐입니다. 결전을 보니…… 어떻던가요?”
“잘 컸더군요.”
“솔직히 말해 보세요.”
“잘 컸습니다.”
“듣고 싶은 답은 아니군요. 후후!”
문주가 웃었다.
성검문은 장자 계승이다. 허도강의 사후에는 장자인 허문승이 문주를 이어받아야 한다.
문주는 지금 허문승이 성검문을 이을 수 있는 재목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노인은 ‘잘 컸다’라는 말만 했다. 무공이 강하기는 하지만 성검문주 재목은 아니라는 말이다.
노인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성검문에는 호랑이가 있다. 허도기라는 아주 큰 대호가 숨 쉬고 있다. 그를 넘어서야 문주가 될 수 있는데…… 허문승은 허도기를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다.
두 사람은 차기 문주를 논하고 있었다.
“한 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살 수는 없는 법. 그러게 진작 정리하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성검문주가 가늘게 웃었다.
무림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먹힌다.
성검문주가 굳이 허문승의 무공을 보여준 것도 무림의 생리를 잘 알아서다.
자신이 죽은 후…… 성검문은 누가 이어받을까?
성검문은 장자 계승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최강자 허도기가 존재한다. 강자가 약자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괜찮을까?
괜찮지 않다.
허도기가 평범한 숙부라면 허문승에게 아주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다. 하지만 허도기는 발톱을 숨긴 늑대다. 야욕을 숨기고 긴 세월 동안 인내한 야망가다.
허도강이 문주에 오를 때……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허도강과 노인은 그때의 일을 잊지 않는다.
격렬했던 저항, 음모, 술책, 기만들을 기억한다. 모함은 어린애 장난이었고, 암살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모습을 기억한다. 또한, 그 많은 사단이 일어나는 중에도 자신은 철저하게 숨겼던 용의주도함도 잊을 수 없다.
허도강은 죽을 고비를 서너 번쯤 넘긴 후에야 문주에 올랐다.
이제 그가 죽으면 똑같은 일이 허문승에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럼 노인 말대로 허도기를 미리 정리할 수는 없었나?
문주는 동생을 정리할 정도로 매정한 사람이 아니다. 동생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눈감아 주었을 것이다. 설혹 자식이 힘들어진다고 해도 혈육을 정리하지는 않는다.
또한, 허도기는 허도강이 문주에 있는 동안 흠 잡힐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성검문 대소사에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티끌만 한 트집이라도 잡힐 것 같으면 어떤 일이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결과, 지금은 거의 무림에서 잊힌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무림 최고 강자다.
허도강이 노인의 손을 꽉 쥐며 단호하게,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문주, 피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피를 흘려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죽어서는 안 돼요.”
“힘이 될지 모르겠으나, 지켜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그러니 마음 편안히 가지시지요.”
노인이 마주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허도강의 눈가에 안도의 빛이 어렸다.
“과찬, 과찬의 말씀입니다. 제가 지켜본다고 무슨 도움이 될지는…… 문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창숙(創夙)은 이미 제 경지를 넘어선 고수이지 않습니까? 정작 그가 검을 잡는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일홀문주(一忽門主)께서 지켜봐 주신다니 마음이 턱 놓입니다. 하하!”
성검문주 허도강이 웃었다. 하지만 마음은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없었다. 그 역시 창숙 허도기의 무공이 일홀문주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인, 일홀문주의 손에 은밀히 밀지 한 장과 비급 한 권이 건네졌다.
‘이건…….’
순간, 노인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허도강은 밀지만 건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밀지가 무엇인지, 어떤 말을 남긴 것인지.
낮에는 새가 듣고, 밤에는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절대로 누가 알아서는 안 되는 밀언(密言)이다.
자식과 동생의 싸움까지 거론한 마당인데, 그보다 더 중요한 밀언이 무엇일까?
궁금증이 치민다. 하지만 노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밀지를 은밀히 품속에 찔러 넣었다.
문주가 말했다.
“제자를 데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동박이라는 아이입니다.”
“누굴 데리고 오신 적이 없었는데…… 후후! 제 염려를 알고 계셨군요. 그 제자가 창숙을 보는 눈입니까?”
“그럴 요량으로 데려오긴 했습니다.”
성검문주와 노인은 다시 침묵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천근 납덩이가 들어있는 듯 답답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