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6화 (6/600)

#6화. 第二章 역천(逆天) (1)

눈이 내린다.

솜처럼 포근한 눈이 펑펑 내린다.

담장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논에도 들에도 하얀 솜이 드넓게 펼쳐졌다. 집 앞에 있는 나무에도 눈이 쌓였다. 하늘은 회색빛이고 세상은 하얀색으로 물들어간다.

“하아!”

가는 숨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진다.

침상에 누워있는 병자는 두 눈을 뜨고 있다. 하지만 빛을 잃은 지 오래다.

문주가 공허한 눈으로 활짝 열린 창을 통해 하얀 눈을 쳐다본다.

“하아!”

오랜만에 또 숨이 토해졌다.

숨을 쉬는 주기가 상당히 길다. 숨이 거의 끊어졌다 싶은데 다시 쏟아진다. 그리고 또 뚝 끊긴다.

침상 옆에는 인자한 풍모의 여인이 앉아있다.

장성한 세 아들, 용골을 물려받은 아들 세 명은 여인 뒤에 서서 문주의 임종을 지켜봤다.

여인은 문주의 손을 꼭 잡았다.

말라비틀어져서 뼈만 남은 손이지만 그래도 꼭 잡았다.

중년 부인이 말했다.

“여보,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참 고마웠어요. 인제 그만 쉬세요. 저희 걱정은 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쉬세요. 당신을 만나서 정말 행복하게 살았어요. 고마워요.”

문주는 부인의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공허한 눈으로 멀거니 창밖을 본다. 펑펑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지켜본다.

“하아아아……!”

이번에는 아주 큰 숨을 쉬었다.

들이쉬는 숨이 아니라 내뱉는 숨이다. 몸에 남은 모든 공기를 한 줌에 모아서 쏟아냈다.

문주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버님!”

“아버님……! 흑!”

중년 부인 뒤에 서 있던 세 아들이 일제히 문주를 불렀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당대를 풍미하던 문주가 죽었다.

은옥에 거주한 지 거의 육 개월 만이다. 병마에 육신을 점령당하고도 꽤 오랜 시간 동안을 버텼다. 하지만 결국은 항복하고 말았다. 숨을 거뒀다.

중년 부인은 문주의 손을 꼭 잡은 채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는 문주를 쳐다봤다. 얼굴만 쳐다봤다.

중년 부인이 한참 만에 말했다.

“문승아!”

장남 허문승을 부르는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구나.”

“네. 네. 돌……아가셨어요.”

“지금부터 딱 반 각만 울어라. 실컷, 펑펑 울어라. 그리고 반 각 후부터는 성검문 문주답게 체통을 지켜라. 위험을 보여라.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라. 천하제일무인에 걸맞게, 한 치의 부족함도 없게 준비해라.”

* * *

“문주께서 돌아가셨습니다.”

“…….”

허도기는 침묵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어서 눈 내리는 풍경, 수묵화(水墨畵)를 그리고 있었다.

붓을 잡은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

“은옥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방금 문주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입니다.”

“방금……?”

“네.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방금. 방금. 운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육 개월을 버티신 건가?”

허도기가 붓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뭐 그리 걱정되는 게 많다고. 세상은 산 사람들의 놀이터,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허도기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성검문 문주는 자신이 가져야 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게 마땅했다. 장자계승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만 없었다면 결코 형에게 넘어가지 않았을 자리였다.

성검문 문주직을 빼앗긴 대가는 혹독했다. 아니, 혹독 그 이상이다. 지옥에서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뒷산 밑자락에 있는 초옥에서 수묵화나 그리며 살아왔다. 이것이 감옥 생활이 아니면 무엇인가. 꼭 철창에 가둬야만 감옥인가.

그 세월이 무려 삼십 년이다.

만약 스스로 칩거하지 않고 활기차게 활동했다면 어떠한 힘도 키우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것은 확실하다. 성검문 무복을 입은 자는 모든 행동이 투명해야 한다.

만약 그랬다면 형이 죽은 이 순간에도 자신은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제자도 없고, 수하도 없고, 조직도 없다. 혼자서 허문승이 문주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을 것이다.

삼십 년을 숨죽여 살아온 덕분에 기지개를 활짝 켤 수 있게 되었다.

형님이 들어가셨다.

운명하실 줄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일 줄은 몰랐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막상 운명의 날이 닥치니 개운하지 않다. 오히려 마음이 무겁다.

감회를 어떻게 말할까?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착잡하다.

허도기는 잠시 눈을 감고 형님의 명복을 빌었다.

“……그놈은 어떻게 됐나?”

허도기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네모판에 갇힌 놈.”

“아! 동박이요. 작업 끝냈습니다.”

허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됐다. 풀어줘라. 단도리 단단히 하고.”

“오늘 당장 풀어줍니까?”

“풀어줘.”

“알겠습니다.”

독안이라고 불린 외눈 무인이 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 * *

네모판은 몽골 감옥이다.

나무로 네모반듯하게 뒤주 같기도 하고 관 같기도 한 판을 짜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

문제는 네모판 크기가 무척 작다는 거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 좁다. 발을 뻗지도 못할 만큼 좁다. 그뿐만 아니라 ‘네모판’이라는 말이 말해 주듯이 세상을 볼 수 있는 구멍이 없다.

완전히 밀폐된 나무 관이다.

나무판 옆에 머리 하나 내밀 수 있는 공간이 있기는 하다.

그곳으로 밥도 받아먹고, 물도 먹는다. 하지만 대부분 고개를 내밀어 바깥세상을 구경한다.

그 구멍 외에는 사방이 막혀 있다.

물론 대소변을 처리할 공간도 없다. 네모판 안에서 앉은 자세 그대로 싸는 수밖에 없다. 당연히 뒤주 안은 악취로 가득하다. 온갖 벌레가 들끓는 것은 덤이다.

네모판이라는 감옥에 갇히는 순간, 사람은 사라지고 짐승만 남게 된다. 양계장 닭처럼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주인이 주는 먹이만 먹어야 한다.

동박은 네모판 안에 갇혀서 육 개월을 보냈다.

처음에는 사부가 구하러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사부는 오지 않았다.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소축십검은 치가 떨릴 정도로 모멸감을 주었다.

네모판 안에다 소변을 갈기기도 하고, 소똥을 아침밥이라도 던져 주기도 했다.

동박은 온갖 모멸감을 감수했다.

밥 한 끼라도 얻어먹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만 했다. 물 한 모금 먹으려고 자존심도 버렸다.

버릴 것 다 버리고 짐승이 되니 마음이 편했다.

이것이 네모판의 위력이다. 네모판 감옥을 모르는 사람은 그 위력을 전혀 알지 못한다. 주인이 원하는 대로 아주 착하게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네모판에서 한 달을 버틴 사람은 없다.

동박이라고 다를 바 없다. 만약 동박이 오기로 버텼다면 벌써 목숨을 잃었다.

동박은 가끔 바깥 공기를 마신다.

사지를 묶인 다음에야 주어지는 자유이지만, 사나흘에 한 번꼴로 네모판을 벗어나서 팔다리를 쭉 폈다. 네모판에 갈겨 놓은 오물을 물청소하고…… 네모판 크기도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을 만큼 큰 것으로 바꿨다.

물론 공짜로 생긴 혜택은 아니다.

바깥공기를 한 번 쐬기 위해서는 짐승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만 했다. 저들이 원하는 말을 하고, 저들의 생각을 미리 읽고 합당한 아부를 한다.

자존심은 없다.

일홀무인이 가진 강기(剛氣)는 죽었다.

사부가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은 순간,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나 혼자, 스스로 살아야 해!’

일홀무인들은 원래 혼자 산다. 혼자 수련하고, 혼자 생존한다. 일홀도 역시 홀로 깨우친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다.

네모판에 갇히고 삼 개월쯤 흘렀을 때다. 소축십검의 주인이라는 허도기를 만났다.

“이 초만 받아내면 풀어주겠다.”

“이 초요?”

“이 초다. 받아내는 것, 반격하는 것 모두 유용하다. 피하는 것도 유용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킥킥킥……!”

동박은 웃었다.

동물적인 감각이 꿈틀거린다. 네모판에 갇혀서 거의 삼 개월쯤 지낸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일홀무인의 피가 꿈틀거린다. 무적도가 숨을 토해낸다.

“당신이 누군데?”

동박은 손에 쥐여진 소도를 혀에 대고 쓱 핥았다.

혀에 느껴지는 쇠붙이 맛이 상큼하다. 피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새 칼이다.

“알아도 쓸모없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다. 이 초를 받아낸 다음에 묻도록.”

“킥킥!”

동박은 기수식을 취했다.

몸은 낮게 숙이고, 칼을 달걀 쥐듯이 부드럽게 감싸 쥔다. 여차하면 비도(飛刀)로 쓸 생각이다.

“해도 될까?”

“와!”

그 순간, 정말 검이 번뜩였다. 눈앞에서 번갯불이 번쩍 빛났다. 검은빛 한 줄기가 쓱 훑고 지나갔다.

“아!”

동박은 기수식을 취한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스읏!

앞가슴이 살짝 베이며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네 사부에 비하면 어떠냐?”

“…….”

동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동박은 사부의 무공을 알지 못한다. 일홀도는 죽음의 칼이기 때문에 생사가 걸린 일이 아니면 뽑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용하지 않는다.

사부에게 무공을 배우기는 했다. 말로.

몸으로 가르쳐준 것도 있다. 초식을 세세히 풀어준 적도 꽤 많으므로 시연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매우 느린 속도였다.

사부의 무공은 보지 못해서 말할 수 없지만…… 상대의 무공은 가히 일절이다. 소축십검이 모조리 달려들어도 단숨에 베어낼 정도로 강력한 검이다.

‘내가 이 사람을 넘을 수 있을까?’

사부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형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그 사람들은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동박 나름대로는 자신 있었다.

동박은 처음으로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산을 봤다. 처음으로 절망감을 느꼈다.

그 후, 동박의 의지는 급격하게 꺾였다.

“간밤에 좋은 꿈이라도 꾸었냐?”

“헤헤헤! 형님이 좋은 꿈 꾸신 모양입니다. 얼굴이 환해요. 전 늘 개꿈만 꾸잖아요.”

“아닌데? 꿈도 꾸지 않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건 돼지 서너 마리 잡아먹는 꿈이라도 꾸었어야 하는데”

“아이고,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세요. 감질나 죽겠습니다. 빨리 말 좀 해 주세요.”

동박은 네모판에 뚫린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고 독안을 올려다봤다.

“네놈, 오늘 풀려난다.”

“네?”

“네놈 오늘 풀려난다고!”

“저, 정말입니까? 제가 정말 풀려나요? 정말요?”

동박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동안 고생했다. 그러게 왜 성검문에서 살인을 해. 다음에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이게 모두 일홀문주의 체면을 봐서 살려주는 거니까 각별히 유념하고.”

“…….”

동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풀려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보지 못했다. 이대로 갇혀 있다가 언젠가는 칼 맞아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네모판에 갇혔던 자들이 모두 죽어 나갔으니까.

‘내가 살아나가는 거야. 이 지옥에서……!’

동박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믿어지지 않는다. 살아나간다고 하니. 풀어준다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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