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9화 (9/600)

#9화. 第二章 역천(逆天) (4)

“이럴 때가 제일 무서워.”

“사실 나도 무섭네.”

“차라리 자진해 버릴까? 자진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되지. 우리가 자진해 버리면 꼭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

“어차피 이곳을 찾아온다면 대충 알고 오는 거잖아.”

“그러니 우리가 더 잘해야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태연하게 있다가 무인들이 오면 무지렁이처럼 벌벌 떨어주고, 애원도 하고, 그런 후에 칼 맞아 죽어야 해.”

“죽일 거면 빨리나 오지. 기다리는 게 더 무섭다니까. 잡아가서 고문하지는 않겠지?”

“모르지.”

“만약 잡혀갈 것 같으면 나 좀 죽여주면 안 돼.”

“하하!”

“실수한 척하고 죽여주라. 어차피 고통받다가 결국은 죽는 거 오래 버티기 싫거든.”

“실수로 부인을 죽이는 농부가 어디 있나? 살려 달라고 싹싹 빌다가, 잡아가면 잡혀가고 죽이면 죽어야지.”

농부 부부는 눈 속에 묻힌 배추를 뽑으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손은 배추를 뽑고 있지만, 눈은 사방을 주시한다. 말을 주고받지만, 두 사람만 들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흔(昕)이 물건은 다 치웠지?”

농부가 혹시나 하는 눈길로 물었다.

아이의 이름은 흔이다. 외자다. 원래 항렬을 따라서 이름을 지으면 허문흔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성검문과 연관된 흔적은 모두 지워야 하기 때문에 외자로 지었다.

문주 허도강이 직접 지어서 보낸 이름이다.

허흔(許昕).

이름에 아침 흔 자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문주가 지어서 보낸 이름이라 그대로 불렀다.

“확인했잖아.”

“확인하긴 했는데 혹시나 해서. 뭐 빠트리고 안 치운 게 있나 싶어서 물은 거지.”

“방에 거미줄까지 만들어 놨으니까 의심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자꾸 흔이 얼굴이 어른거리네.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줬나 봐.”

“어르신 아이를 이놈 저놈 하며 키운 것만 해도 고맙게 여겨.”

“어쨌든 즐거웠지?”

“재밌게 살았어. 행복하게. 피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산 세월이니까 후회는 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문주님이 고맙지. 흔이와 인연도 맺어주시고.”

“쉿!”

농부가 급히 주의를 시키었다. 하지만 주의를 시킬 필요가 없었다. 아낙은 이미 말문을 닫아버린 후다.

사박! 사박!

한 사람이 눈을 밟으며 걸어온다.

산책이라도 하듯이 뒷짐을 지고 유유히 소로길을 걸어온다.

대로에서 농가로 오려면 구불구불 이어진 소로를 따라와야 한다. 일직선으로 걸어오는 것보다 두 배 내지는 세 배 정도 시간이 더 걸린다.

무엇보다도 소로를 걸어오면 감시를 벗어나지 못한다.

농가에서 보면 소로로 걸어오는 사람이 낱낱이 보인다. 무공 여부까지 살필 수 있다.

소로를 걷지 않으려면 논밭을 가로질러야 한다.

하지만 논밭 곳곳에는 도랑이 파여 있기 때문에 소로로 오는 것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일부러 길을 그렇게 만들어 놨다.

농가로 다가오는 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멀리서 봤을 때부터 급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 구경을 하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유유히 걸어온다.

농부가 눈밭에서 일어섰다.

아낙도 바구니에 꽁꽁 얼어붙은 배추를 담고 일어섰다.

두 사람이 다가오는 사람을 본다. 아주 강한 무인, 자신들이 넘볼 수 없는 초고수를 본다.

중년 무인이 부부 앞으로 다가와 씩 웃었다.

“여기서 흑방(黑幫) 흔적을 볼 줄은 몰랐군. 너희, 흑방 살수들이냐?”

농부는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중년 무인의 말이 맞다. 주변에 만들어 놓은 지형지물들은 흑방 매복술에 기초한다.

논밭에는 기관으로 작동하는 암기가 무수히 깔려 있다. 무턱대고 논밭으로 들어서면 발목이 뎅겅 잘려나갈 수도 있다. 삭도(削刀)가 발목을 후려치기 때문이다.

- 흑방 살수는 야지에서 노숙해도 함부로 공격하지 마라. 정 공격하고 싶으면 험산 준령에 꼭꼭 숨은 맹수를 잡는다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하라.

흑방은 무공보다는 매복술이 유명했다.

그만큼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데 능숙하다. 일 푼의 힘으로 오 푼의 무공을 막아낼 수 있다.

중년 무인은 흑방 매복술을 단숨에 읽었다.

소로를 걸어오면서 산책하듯 흘겨본 눈길로 기관뿐만이 아니고 흑방까지 읽어냈다.

절망이다. 완벽하게 위장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이제 농부로 계속 위장하기는 틀렸다. 어차피 흑방 살수임을 들켰으니 어느 정도는 드러내는 것이 좋다.

“은거한 지 오래된 살수입니다. 흑방이라는 말도 잊어버렸습니다. 살펴서 이해해 주십시오.”

농부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은거한 지 몇 년이나 됐나?”

“칠 년입니다.”

“거의 십 년이군. 가만…… 칠 년 전이면 흑방이 멸문당할 때 아닌가? 그때 용케 몸을 피했군.”

“몸을 피했다기보다…… 흑방이 멸문당하기 전에 저희가 먼저 은거했습니다. 은거한 후, 얼마 안 있어서 흑방이 멸문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 살수는 조직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데, 용케 빠져나왔군.”

“사실, 당시에 이 사람이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멸문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검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게 벌써 칠 년 전, 이제는 모두 잊어버린 옛날 일입니다.”

농부는 자신이 먼저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칠 년이나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 흑방을 기억하고 있다. 흑방을 아는 사람이야 많겠지만, 흑방 살수를 한눈에 지목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역시 성검문은 흑방 잔당을 예의 주시했다.

흑방 멸문에서 살아남은 살수들을 일일이 감시했다. 다시 검을 잡으면 가차 없이 죽였을 것이다. 농부 부부처럼 개과천선하면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고.

그렇다면 성검문은 농가 부부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안다.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막 태어난 태아를 거둬서 기르기 시작했으니 의심할 수가 없다.

중년 무인은 농가를 쓱 훑어봤다.

“아이가 안 보이네?”

“얼마 전에 역병에 걸려서…….”

농부가 눈 덮인 밭을 쳐다봤다.

밭 한 귀퉁이에 약간 볼록하게 솟은 봉분이 보인다.

원래 아이는 묘를 쓰지 않는 법이라서, 약간 도톰한 정도로 흙을 쌓아 올렸다.

“쯧……!”

중년 무인이 혀를 찼다.

봉분을 파 보면 아이 시신이 나온다. 한 달 전이면 상당 부분 부패하였을 것이다.

“저희는 은거해서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제발 넓은 아량으로 지나쳐 주십시오.”

농부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럴 수는 없지. 여긴…… 뒤가 켕겨. 우리 애들은 자네들을 데려다가 입을 열게 할 생각인 것 같은데, 그건 흑방 살수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고.”

중년 무인이 등을 돌렸다.

“이곳은 오늘로 정리하지.”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농부가 두 손 모아 빌었다.

“아니, 지금 죽는 게 자네들에게도 편할 거야.”

“살려 주십시오. 제발!”

“아이도 죽은 마당에 사는 낙도 없잖아. 사실 이곳에 오면서도 뭐 건질 게 있나 싶긴 했지. 하지만 뒤가 켕겨서 말이야. 내가 직접 와 보지 않을 수 없었거든.”

무인이 주위를 휘휘 돌아봤다.

“만약에 남은 것이 있다면 운명이겠지. 후후후!”

중년 무인이 검을 잡았다.

* * *

칠 년 전, 성검문 안주인 현정(賢定) 부인이 천일사(千日寺) 무문관(無門關)에 들었다.

현정 부인이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는 하지만 무문관에서 몇 달씩 깨달음을 추구할 정도는 아니다. 무문관은 장소만 빌린 것이고, 사실은 폐관 수련을 하는 게 아닐까?

현정 부인은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백 일 만에 출관했다. 딱 일곱 달이다.

그 사건과 두 농부가 은거해서 자식을 키운 사건을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일이지만, 현정 부인과 흑방 사이에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중년 무인이 무심히 돌아간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성검문은 농부 아이를 유심히 살폈다. 자라는 모습을 내내 지켜봤다.

농부 부부는 아이에게 어떠한 공부도 가르치지 않았다. 체력을 양성하는 기본 공부조차 수련시키지 않았다. 아예 무공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아이가 특별한 재목이 아닌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다행이야. 천만…… 다행…….’

아낙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흔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겨야 하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다.

중년 무인이 의심하지 않고 돌아갔다.

농부는 얼굴을 눈 속에 처박은 채 엎드려 있다. 일 검에 절명한 것이다.

아낙은 검을 맞지 않았다.

무인은 아낙을 쳐다봤고, 아낙은 품에서 비수를 꺼내 가슴을 찔렀다. 스스로 자진할 기회를 주었고, 아낙은 기꺼이 그 기회를 붙잡았다.

스스로 죽는 것은 괜찮다.

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싫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목숨을 더 부지한다. 죽은 남편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정도까지는…….

‘다행이야. 다행…….’

아낙은 눈을 사르르 감았다.

* * *

현정 부인은 은옥에서 남편을 지켰다.

이제 곧 장의사가 올 것이다. 문주의 장례답게 옥관(玉棺)이 준비될 터이고, 문주의 야윈 몸은 깨끗한 정화수로 씻긴 후에 이승에서 걸치는 마지막 옷을 입을 것이다.

현정 부인은 관뚜껑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문주 곁을 지킬 셈이다.

“이공(二公)께서 오셨습니다.”

방문 밖에서 하인이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현정 부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공!’

문주의 동생, 허도기를 말한다. 허도기는 성검문에서 직책이 없다. 직위도 없다. 무림 활동을 완전히 접었기 때문에 별호도 함께 던져버렸다.

그래서 이공이라고 부른다.

문주 허도강을 대공(大公), 그를 이공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런 호칭은 두 사람간에만 통용된다. 성검문 사람들이 허도기를 부를 때, 소축 사람이 문주를 부를 때에만 사용되는 한정된 호칭이다.

이공은 은옥에 올 자격이 없다.

은옥은 성검문 사람 중에서도 극히 소수의 사람만 올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아무리 친동생일지라도 성검문에서 장장(葬場)을 마련하면 그곳으로 와야 한다.

그런데 거침없이 은옥으로 왔다.

‘도련님. 기어이!’

현정 부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공이 성검문 규율을 무시하고 은옥을 거침없이 찾아왔다면 이미 검을 뽑은 것이다.

허도기가 검을 뽑으면 아들 셋은 죽는다.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책을 연구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떤 대책도 무용지물이었다.

허도기는 완벽하게 준비했다.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허점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문주가 성검문을 다스릴 때와 반위로 쓰러진 후의 성검문은 완전히 다르다.

육 개월 전에는 모두가 충성스러운 수하들이었다. 하지만 지난 육 개월간 상황이 변했다. 칠 할 이상이 이공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으로 보인다.

너무 늦었다. 아니, 허도기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권력투쟁에서 실패해본 자와 싸움이라는 것을 전혀 해보지 않은 자의 상황 판단은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나온 해답이 문주직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문주를 주고 목숨을 구한다. 아니면 모두 죽는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자를 택하자고 결정을 내렸다.

물론 병중인 문주와는 상의하지 않았다.

문주는 어떠한 힘도 되어주지 못한다. 검을 들어주지도 못하고, 명령을 내리지도 못한다. 반위로 침상에 드러눕는 순간, 성검문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아들들은 죽었다.

“휴우!”

깊은숨이 터져 나왔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는 듯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부인은 이미 온기를 잃어가기 시작한 문주의 손을 꼭 잡았다.

“어쩐지 꼭 오늘 따라가게 될 것 같더라니. 여보, 우린 어쩔 수 없이 같이 있어야 할 운명인가 봐요.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요. 훗!”

덜컹!

방문이 열리고 허도기가 들어섰다.

잠자듯이 누워 있는 형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아주 포근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현정 부인이 보인다.

‘독!’

허도기는 현정 부인의 미간에서 붉은 실선을 찾아냈다.

해약이 존재하지 않는 극독 혈미독(血眉毒)이다.

형수도 오늘 같은 상황을 예측했나. 그래서 혈미독 같은 극독을 준비한 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 옴치고 뛸 수조차 없는 처지.

지금 형수의 처지가 그렇다.

“잘 모셔라. 형수님은 혈미독에 암살당하셨다. 성검문 전 무인에게 명한다. 출타하라. 인근 이백 리 안에 있는 모든 사마(邪魔)를 척결하라. 두 번 다시 마인들이 성검문에 침입하여 사람을 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느니!”

허도기가 쩌렁 일갈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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