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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12화 (12/600)

#12화. 第三章 낙성(落星) (2)

남소(南蘇)!

여인을 부르는 이름이다.

지금은 잊힌 이름, 거의 오십 년 넘게 불리지 않았던 이름이다. 당연히 남소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혹여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할아버지, 할머니뿐이다.

남소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남쪽에 있는 차조기라는 뜻이다.

차조기.

상당히 예쁜 갈색 풀이다.

남소라는 이름도 예쁘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의미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살벌하다.

진갈색? 보라색? 차조기는 깻잎이 붉게 물든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남소의 의복이 차조기 색깔이었다.

그녀의 옷은 늘 진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핏물이 밴 까닭이다. 갓 피가 튄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핏물이 스며들어서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 남소는 참 많은 사람을 죽였다.

지금은 잊혔지만, 오십 년 전에는 남소라는 이름만 들어도 자던 아이가 경기했다.

무림을 활보한 지 십 년, 남소는 한 남자를 만났다.

사내는 무림에 적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별호도 없고, 무명도 없었다. 하지만 칼은 정말 잘 썼다. 남소가 단 일 초에 패배할 만큼 고절한 고수다.

남소는 자칭 일홀문주라고 말한 사내와 가정을 꾸렸다.

참 행복하게 살았는데…… 불행히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임신에 좋다는 온갖 비방을 다 써봤지만, 어떤 것도 효험이 없었다.

두 사람이 아이를 포기했다.

그런데…… 폐경도 다 지난 늙은 나이, 할머니라고 불릴 나이에 덜컥 아이를 가졌다.

오비아(吳飛娥)다.

일홀문주는 서리 성을 쓴다. 하지만 서리 성은 일홀도를 얻은 사람에게 부여하는 작위 같은 것이다. 본래 일홀문주의 성씨는 오 씨고, 딸은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았다.

할머니가 아이를?

일홀문주와 남소는 늙은 나이에 아이가 생겼지만,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견약반공(堅若磐功)이라는 주안공(駐顔功) 때문에 임신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남소는 견약반공을 수련했다.

남소는 일홀문주와 겨우 세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사십 대 중년 부인으로 보인다. 주안공을 충실히 수련한 영향이다.

견약반공이 단지 젊음을 유지하는 공부였다면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살수에게 미모는 개가 먹다 버린 뼈다귀만도 못한 것이다.

견약반공을 살을 고무처럼 질기게 만들어준다. 바위처럼 단단하게 만든다.

살수는 늘 검 앞에 선다. 흉기에 베이고 찢기기를 밥 먹듯이 한다. 그래서 빠르게 낫는 방법, 상처를 입고도 움직일 방법을 연구하는데, 견약반공이 그 일환이다.

오십 년 전, 살수행을 하면서 견약반공을 수련했는데…… 한 번 배운 무공이 어디 가나. 늘 몸에 붙어 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하게 된다.

아마도 견약반공 때문에 오비아를 낳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오비아는 늙은 부부에게 찾아온 축복이다. 그러니 얼마나 예쁘겠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그저 울먹이기만 해도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게 된다.

남소는 오비아를 쳐다봤다.

금년에 다섯 살이 된 여아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엄마를 쳐다본다.

“비아야, 엄마하고 산 밑에 좀 다녀오자.”

“우리 둘만?”

“우리 둘만.”

“아빠는?”

“아빠는 여기 있으라고 하지 뭐. 아빠는 놀아주지도 않잖아. 우리끼리만 가서 놀다 오자.”

“오늘 갔다가 오늘 와?”

“산을 내려가는 김에 며칠 있다가 오지 뭐. 맛난 것도 사 먹고, 예쁜 옷도 사 입고.”

“와아!”

오비아가 기쁜 듯 팔짝 뛰었다.

“오빠는? 오빠도 데려가면 안 돼? 오빠도 데려가자, 응?”

오비아가 칭얼거렸다.

허흔을 말하는 것이다. 또래의 아이를 만나서인지, 오비아는 허흔을 무척 따랐다. 허흔을 동굴로 떼어놓을 때까지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오빠는 무공 수련해야지. 지금 바빠.”

“치잇!”

오비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호호호!”

남소는 웃으면서 일홀문주를 쳐다봤다.

노인은 두 사람의 대화를 애써 못 들은 척, 칼만 간다.

스읏! 슥! 스읏! 슥!

칼 가는 소리가 단조롭게 들린다.

“옷 입어. 내려갔다가 오자.”

“네.”

오비아가 두툼한 털옷을 입기 시작했다.

“다녀올게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휴우!”

노인은 한숨만 내쉬었다.

“잠시 다녀오는 거예요. 저 아이에게 세상 구경 좀 시켜주는 거니까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끄덕! 끄덕!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일종의 보호 대책이다. 노인이 허도기를 제압한다면 딸을 다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허도기 손에 무너진다면 딸과는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다.

“다 입었어!”

노인 속도 모르는 오비아가 털옷을 빨리도 입고 나왔다.

“아빠에게 인사해.”

“다녀올게요!”

아이가 신나서 소리쳤다.

“엄마 말 잘 듣고.”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별이다. 남소가 아이를 데리고 간다.

일홀문주는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 * *

“아이를 부탁해.”

“언니, 여기서 키우면 살수가 될 거야.”

“괜찮아. 여기가 제일 안전해서 데려온 거야.”

“사십 년 만인가? 언니가 옛날 그대로인 것에 놀랐고, 이런 아이가 있다는 것도 놀랍고, 평생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던 이곳에 아이를 맡기는 것도 놀랍고. 오늘 놀람투성이네?”

“미안. 내가 너무 무심했지?”

“우리와는 인연 끊었으니까. 이해해.”

사매가 차분하게 말했다.

남소와 사매는 나이가 거의 십 년 차이가 난다. 남소가 가정을 꾸리면서 은거할 때, 사매는 첫 살행에 성공해서 흥분을 가누지 못했었다.

지금은 사매가 훨씬 경륜 깊어 보인다.

사매는 중원 한 자락을 거머쥐고 있는 여두(女頭)이고, 남소는 곱게 늙어가는 중년 부인일 뿐이다.

“한 달 안에 비아를 데리러 오지 않으면…… 본격적으로 키워줘. 부탁해.”

남소는 비급 두 권을 내밀었다.

“내 무공은 전부 여기서 나왔어. 그러니 따로 남길 것은 없고, 이건 견약반공. 강호에서 얻은 건데, 이게 이 나이에 비아를 낳게 해 준 것 같아.”

사매는 비급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혈검경(血劍經) 중권(中卷).”

“혈검경……!”

견약반공에는 담담하던 사매가 혈검경이라는 말에는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혈검경은 혈해검성의 무공이다. 성검문 문주 부인, 현정 부인의 무공이다.

상권은 오래전에 유실되었다. 지금은 중권과 하권만 남았다. 하지만 이 중하권만으로도 평범했던 일개 무인이 혈해검성이라는 무명을 얻었다.

“비아, 정혼했어.”

“성검문과?”

남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문 누구와? 세 아들은 모두 죽었는데? 아직 소식 못 들었어? 성검문 난리 났는데.”

“누구와 혼인을 했는지는 나도 몰라. 그 사람이 말을 해주지 않아서. 하지만 정혼자라면 혈검경 하권을 가지고 있을 거야. 성검문주의 아들 중에 하권을 주는 사람이 정혼자인 거지.”

“세 아들 모두 죽었다니까!”

“휴우!”

남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흔에 관한 일은 철저한 비밀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천비(天秘)다. 그래서 말해주지 않았다. 오비아는 오빠가 정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먼 훗날에도 기억할까? 취화원에서 살다 보면 아마도 잊어버릴 것이다.

어쩌면 잊고 사는 게 좋을 수도 있다.

허흔은 혈검경 하권을 가지고 있다. 일홀문주가 삼십육도를 전수하면서 건네주었다. 네 정혼녀, 내 딸 오비아에게 네 손으로 직접 건네주라고 하면서.

혈검경은 혼인 예물이다.

성검문 안주인이 넷째 아들 혼인선물로 노인에게 내준 것이다. 비록 문주를 통해서 건네졌지만, 이미 성검문주 부부는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끝냈다.

그런데 이게 복이 아니다.

성검문이 멀쩡할 때는 복이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화근덩어리가 되었다.

중하권을 한꺼번에 건네주지 않고 분리한 것은 혹여 혈검경이 잘못된 사람에게 건네질까 우려해서다. 그렇다면 현정 부인에 대한 도리가 아니지 않나.

“후유! 이 혈검경……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네. 하필이면 멸문한 사람들의 무공이라니. 일 년 전만 해도 이건 굉장한 축복이었을 텐데. 그리고 이거 중권만 가지고는…… 머리, 꼬리 떼고 몸통만 배우는 건데.”

사매가 고개를 내둘렀다.

“내가 오지 않으면…… 잘 키워 줘.”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아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손톱만큼도 걱정하지 마세요.”

사매, 취화원주(醉花園主)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매를 믿는다. 사매는 자신이 한 말을 철저하게 지킨다. 그녀의 말이 곧 마음이요, 행동이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한다는 의지,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 의지가 너무 굳세서 살수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잘 성장했다. 취화원을 이끄는 수장까지 되었다. 살수 삼백 명 대집단을 움직인다. 당연히 무림에 미치는 영향력도 막강하다.

사매가 비아를 안심하고 맡기란다.

마음이 턱 놓인다.

“언니, 계속 있었으면 이 자리는 언니 거였을 텐데.”

“여길 떠난 건 후회하지 않아. 아무 미련 없어. 풋! 말하고 보니 미안하네. 미련 없다면서 아이는 맡기고.”

“언니.”

“…….”

“마지막일지 몰라서 말해.”

“무슨 말인데? 말해 봐.”

“살아.”

“……!”

“어떻게든 살아.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나은 법이니까. 몸만 피해. 뒤는 내게 맡기고.”

“풋! 불행히도…… 나는 곧장 나갈 줄만 아는 사람과 살고 있어서. 한 달. 한 달만 기다렸다가…… 키워 줘.”

남소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오비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 * *

오비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준비를 해야 한다.

“인근에 아이가 죽은 집 있어요?”

남소는 마을을 수소문했다. 참 많은 마을을 돌아다녔다.

죽은 여아가 필요하다.

체격은 딸과 비슷해야 한다. 누가 봐도 오비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흡사하면 더 좋다.

딸을 죽은 것으로 위장시킨다.

누가 자기 자식을, 그것도 커보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은 애틋한 자식을 남에게 넘겨줄까 생각하겠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은 다르다.

산 자식도 동전 몇 푼에 팔아넘기는 세상이다.

죽은 자식을 사겠다고 하면 기꺼이 넘겨줄 사람이 열에 아홉이다. 그만큼 세상 살기가 힘들다.

간신히 어제 딸이 죽었다는 집을 찾아냈다.

“열 냥만 더 주시면…….”

죽은 아이를 내주는 부모 손이 덜덜 떨렸다.

아이를 내주면서 돈 한 푼 더 받기를 원한다. 그렇다고 부모의 애통함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존재한다. 죽은 아이들 쳐다보는 눈길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남소는 기꺼이 열 냥을 더 내주었다.

죽은 아이에게 딸의 옷을 입혔다. 그리고 늑대가 잘 다니는 길에 시신을 놓아두었다.

아이는 물려 뜯긴 흔적만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이 작업으로 오비아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철부지가 눈을 즐기다가 늑대를 만난 것이다. 옷조각 몇 개와 핏덩이, 살점 몇 개만 남겨 놓고 증발해 버린다.

일홀문주가 허도기를 누른다면 모든 일이 없었던 것이 된다. 늑대에게 물려 죽은 일도 우연히 일어난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패배한다면 진실이 된다.

‘됐어. 아이야, 용서하렴.’

남소는 죽은 아이를 곱게 눕혔다.

그릉! 그르릉!

벌써 시신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삼십 년 전, 성검문주가 동생을 살려주었을 때…… 남소는 대번에 실수라고 말했다. 성검문주가 아주 큰 실수를 하는 것이라고, 언젠가는 후회할 것이라고.

맹수는 맹수를 알아본다.

살수는 살인에 젖은 검을 알아본다.

허도기의 검은 단순한 검이 아니다. 살인에 적합한 검이다. 허도강과 허도기는 같은 조명천검을 수련했지만, 성질이 전혀 다른 검을 선택했다.

한 번 피 맛을 본 맹수는 반드시 이빨을 드러낸다. 살인 충동을 이기지 못한다. 권력을 탐하는 자는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권력에 집착한다.

허도기가 그런 맹수다.

죽은 아이를 먹겠다고 달려드는 늑대나 허도기나 똑같은 맹수다.

‘성검문주의 판단이 아무리 정확하다고 해도 역시 사람, 일홀도는 지지 않아. 이길 거야. 이게 다 헛된 짓이지. 괜히 늑대에게 사람 맛만 알게 해주는 게 아닌지 몰라.’

남소는 죽은 아이를 향해 두 손 모아 합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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