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第三章 낙성(落星) (5)
죽봉은 대나무처럼 생겼다. 올라가는 길이 거의 직각에 이를 정도로 가파르다. 하지만 정상에는 마음껏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평지가 있다.
딱 대나무 가운데를 반듯하게 잘라놓은 형상이다.
일홀문도는 이곳에서 결전을 즐긴다.
이름난 무인들을 유인한다. 지나가는 과객을 자극해서 병기를 뽑게 만든다.
이런 부분에 문주는 간여하지 않는다.
일홀문도는 철저하게 방임 상태에서 수련한다. 어떤 수련을 하건 자유다. 실전 비무를 해도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만류하지 않는다.
일홀문도는 항상 죽봉에서 싸운다.
죽봉은 올라서기 힘들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장소라서 자신의 절기가 노출될 우려도 없다.
살인도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그러나 죽봉은 처형장인 셈이다.
죽봉에 오르는 사람은 죽기 위해서 힘들게 땀을 흘리며 산에 올라온 것이다.
적어도 일홀문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죽봉이 주변에서 최고로 높은 산은 아니다. 죽봉보다 더 높은 산이 세 개가 더 있다.
천봉(天峯)도 그중에 하나다.
천봉에서 보면 죽봉이 환히 보인다. 죽봉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면면을 모두 지켜볼 수 있다.
물론 예전부터 잘 보였던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천봉에서 죽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굴을 파고, 나무를 베어내고…… 천봉을 몇 군데 다듬자 죽봉이 보이기 시작했다.
“잘 봐라. 네놈 사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는 죽음의 교훈이다.”
중년인이 말했다.
“보고 있어요.”
“네놈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텐데?”
“잘 보여요.”
중년인은 어린아이를 곁눈질로 흘겨봤다.
죽봉에서의 움직임은 중년인의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다. 움직임은 보이지만 세세한 숨결까지 느낄 수는 없다. 그저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는구나 하는 정도다.
그런데 아이는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지켜본다.
호흡을, 숨결을, 칼에서 일어나는 기운을 읽는 것처럼 무섭게 집중한다.
일홀문주가 아이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보통 놈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홀문주의 제자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어지간한 근골로는 말도 꺼내지 못한다. 천재 소리를 들은 자들도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 눈에는 천재로 보여도 문주의 눈에는 보통 사람으로 보이나 보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제자로 받았다?
보통 놈이 아니다. 문주가 거둔 세 제자만큼이나 살심이 깊고, 무공에 대한 집착이 강할 것이다.
중년인은 어린아이에게서 그런 점까지 읽지는 못한다. 그가 본 어린아이는 그저 천진난만할 뿐이다. 아직, 어머니의 젖을 빨면서 어리광을 부릴 나이다.
그런데 싸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보통 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홀문주에게는 비선(秘線)이 있다.
일홀문주가 정말 위급할 때, 사태가 워낙 절망적이어서 헤치고 나갈 수 없을 때, 딱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해서 마련한 비밀 인간이다.
지금까지 많은 문주가 비선을 활용했다.
일홀문주치고 제명에 죽은 사람이 거의 없다. 전혀 없지는 않지만 몇 명 되지 않는다. 거의 길에서 칼 맞아 객사하거나, 이름 모를 곳에서 쓸쓸하게 숨진다.
그때 나타나서 마지막 유언 한 가닥을 들어주는 사람이 비선이다.
당연히 비선은 문주를 그림자처럼 수행한다. 출타를 할 때마다 늘 먼발치에서 지켜본다.
비선의 존재는 오직 문주만 안다.
문주에게 세 제자가 있지만, 그들조차도 비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평상시, 그는 산자락 밑에서 농사를 지었다.
혼인도 하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홀아비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외롭게 살았다.
문주가 가끔 산에서 내려와 술벗을 해 준다.
문주 부인이 산짐승 고기나 가죽을 놓고 가기도 한다. 홀아비가 혼자 살고 있지 않은가.
비선은 비밀리에 감춰져 있어야 하는데, 두 사람은 신분이 노출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오히려 도움을 받는 그가 불안할 지경이었다.
그는 은혜를 갚을 날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선이 제 역할을 한다는 것,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문주가 비명횡사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런 일이 지금 일어났다.
문주는 제자에게서 얻은 두 시진을 그와 만나는 데 사용했다.
문주가 산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철도 들지 않은 꼬맹이를 부탁했다.
“이름은 허흔. 하지만 아걸로 부르도록 해.”
노인은 아이 이름이 아걸이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되풀이해서 들었다.
성검문 눈에 띄면 절대로 안 된다.
일홀문도의 눈에 띄어서도 안 된다.
“지금 즉시 떠나라. 아이를 데리고 떠나. 절대 돌아보지 말고 가라. 나중에 아이가 일홀도를 얻는다면 모를까, 그전에는 어떤 판단이나 복수도 못 하게 해라. 일홀도를 얻기 전에는 누구도 만나서는 안 돼.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숨어 살아.”
그는 문주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문주의 부탁대로 아이를 찾기는 했지만, 하산하는 대신에 천봉으로 올라왔다.
비선으로 평생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비선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은 아무도 모른다. 외로움과 늘 같이 살아야 한다. 무료함에 지칠 때도 있다. 살기 위해서 뭐든 해야 하지만, 동시에 언제든 떠날 준비도 해야 한다.
비선은 괴로운 일이다.
그는 거의 이십 년 동안 문주와 함께 지냈다. 그러니 인근 산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안다.
그러다가 일홀문도가 죽봉에서 결전을 벌인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이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산을 헤매다가 찾아낸 거다.
그 후, 당장 천봉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작업했고.
이런 장소가 있으니 아이를 데리고 왔다. 아이는 사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비선도 문주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의무가 있다.
“그렇게 숨죽이면서 지켜볼 건 없다. 웬만한 소리쯤은 들리지도 않아.”
“네.”
꼬마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이는 여전히 죽봉에 눈을 두고 있다.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다. 솜털의 움직임까지 관찰할 생각인가보다.
“잘 봐라.”
“잘 보고 있다니까요.”
“모든 움직임을 모두 기억해라.”
“기억하고 있어요.”
아이는 신묘할 정도로 집중력이 강하다.
역시 문주가 선택한 제목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하기는 성검문 문주의 후인이라면 근골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지켜볼 것은 의지, 관심, 취미 등등인데 아이는 무공 쪽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 보인다.
‘네놈이 누군지 모르겠다만…… 우리 둘, 앞으로 긴긴 세월 동안 서로를 알아가야 할 것 같구나.’
그도 아이를 쫓아서 죽봉 움직임에 집중했다.
* * *
허도기가 발검 자세를 취했다.
자세를 낮게 수그리고, 눈은 남소를 보고, 손끝은 검에 댔다.
“선배, 마지막 인사는 하시지요.”
“고마워.”
남소는 사양하지 않았다.
“여보, 나 먼저 가도 되죠?”
남소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등 뒤에 일홀문주가 있다. 평생을 같이 살아왔던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다.
“후후! 어차피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데 뭘. 신발 끈만 고쳐 매고 있어. 곧 따라갈게.”
“행복했고, 고마웠어요.”
“괜히 마음만 졸이며 살았지. 이젠 푹 쉬자고.”
“당신 참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이럴 때는 나도 행복했다 이 정도 말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행복했지.”
“풋! 엎드려 절 받기네. 됐어요, 이제. 손님 오래 기다리게 하면 실례예요.”
스읏!
남소가 검을 들어 허도기를 겨눴다.
일홀문주는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오늘 변하지 않을 사실이 한 가지 있다. 하나는 문주와 부인이 죽는다는 것이다. 싸움에서 죽든, 삼인독에 죽든 미시(未時)를 넘기지 못하고 절명한다.
그래서 만류하지 않는다.
남소를 먼저 보내면서 허도기의 검을 본다. 어떤 검인지 파악한 후에 최선을 다한다.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다. 삼인독에 중독된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현재 상태에서는 허도기를 감당하지 못한다.
같이 죽으나 따로따로 죽으나 숨 한 모금 들이쉴 시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남소가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검신을 몸 정중앙에 곧추세웠다. 심안(心眼)을 열고 검에 자유를 준다. 검신이 마음대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풀어준다.
일홀문주와 함께 산 세월이 얼마인가. 비록 무공 수련이라고 특별히 시간을 내서 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무공을 이해하는 안목은 훨씬 깊어졌다. 한데!
츳!
허도기가 움직였다. 거침없이!
이게 뭐야? 거추장스럽게 왜 앞을 가로막아? 검을 왜 싱겁게 들고 있어?
허도기의 움직임에는 상대에 대한 무시마저 깔려 있었다.
팟! 풀썩!
허도기가 남소 곁을 지나쳤다. 그사이에 검을 뽑았고, 가슴을 갈랐고, 다시 착검했다.
남소는 순간적으로 목숨을 잃었다.
고통은 없었다. 너무 빠른 죽음이라서 아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슷!
남소를 벤 허도기가 즉시 노인을 향해 돌아섰다.
남소는 거침없이 베었지만, 일홀문주는 충분히 경계를 해야 할 사람이다.
두 사람은 빠르게 움직였다.
츳! 츠읏! 츳! 츠읏!
공격하려는 듯 반보를 내디뎠다가 즉시 물러섰다. 다시 공격하려고 옆으로 휘돌다가 뒤로 쭉 빠졌다.
공격할 틈을 엿보는데 양쪽 모두 쉽게 기회를 잡지 못했다.
허도기가 자세를 다시 잡으려는 듯 허리를 쭉 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으로 검자루를 살며시 잡았다. 검을 잡아가는 손길이 매우 느리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검을 잡아간다.
‘공격이다!’
누구나 예측이 된다. 허도기가 검을 잡는 그 순간, 공격이 이루어진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문주는 그저 칼을 들고 서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굳건하다. 두 발이 땅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발목 깊이까지 땅속으로 파고든 듯한 착각까지 일으킨다.
노인의 두 발은 어떤 경우에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움직인다. 움직여야 허도기의 검을 받아낼 수 있다. 역공도 움직여야만 펼칠 수 있다. 다만 허도기의 검이 살상거리 안에 들어설 때까지 흔들림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쿨룩!”
노인이 기침을 쏟아냈다.
삼인독이 오장육부를 녹이고 있다. 창자가 찢어지는 듯 격렬한 통증이 치민다. 순간,
페엑!
허도기가 검을 잡았다. 어느새 신형을 쏘아냈고, 노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 * *
“봤냐?”
“네.”
“뭘 봤는데?”
“싸우는 거요.”
“본 게 그것뿐이냐?”
“한 가지 확실하게 결정한 건 있어요.”
“뭔데?”
“무공이라는 거, 배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래 살고 싶으면 절대 배우지 말아야 해요.”
“오래 살고 싶으냐?”
“아뇨.”
“뭐라고?”
중년인은 이놈이 놀리나 하는 눈으로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중년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중에 제가 크면 사부님께서 말씀해 주실 줄 알았는데, 아무 말씀도 없이 저렇게 돌아가셨네요.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 주실 수 있어요?”
“뭐가?”
“제 부모님 누구예요?”
“……!”
중년인은 아이를 쳐다보며 눈만 끔뻑거렸다.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요물을 보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 아이가 정말 일곱 살 맞나? 배 속에 능구렁이가 들어 있는 건 아닌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 부모를 어떻게 알아?
아이는 중년인의 표정을 읽고 어떤 마음인지 이해한다는 듯 다시 말했다.
“집에서 떠나오기 전에, 사부님과 부모님이 마당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었어요. 사실 그때 저 깨어 있었거든요. 사부님이 마당에 들어설 때 아주 무서운 짐승이 들어서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깨어났는데…… 부모님이 제게 ‘도련님’이라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여기 와서 한참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저 의부모에게 키워진 것 같아요. 제 진짜 부모는 누구예요?”
“……너 몇 살이냐?”
“일곱 살요. 겨울 지나면 여덟 살요.”
중년인은 뜨악한 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봤다.
‘이놈, 완전히 애늙은이네. 머릿속에 뭐가 든 거야?’
“……나중에 말해 주마. 나중에. 우선 가자. 잠시였지만 네 사부, 사모님이었는데 저렇게 새 밥이 되게 놔둘 수는 없지. 가서 네 손으로 묻어 드려야지?”
중년인이 허흔, 아니, 아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