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第四章 십오년(十五年) 후(後) (2)
두두두! 두두!
말을 타고 달린다.
여인은 말을 타고 달릴수록 흑마의 진가를 온몸으로 느꼈다.
말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지 않는다. 그저 산책하듯 가볍게 달린다. 그런데도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쉭쉭 들린다. 매우 빠르게 질주하는데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런 말이 있었다니!’
여인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도 잊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쫓기는 처지만 아니라면 참 좋을 텐데. 아주 좋은 말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텐데.
그때, 그녀는 아주 좋지 않은 예기(銳氣)를 감지했다.
느낌이 싸하다. 독단(毒丹)을 입에 넣고 깨물었을 때처럼 소름이 쫙 끼친다.
“하앗!”
그녀는 즉시 말고삐를 낚아챘다.
히히힝!
흑마가 앞발을 번쩍 들어 올리면서 멈춰 섰다.
달리는 것도 빠르지만, 멈춰 서는 것도 무척 빠르다.
달리는 속도를 감안하면 달리다가 정지할 때까지의 거리가 말도 안 되게 짧다.
‘매복!’
여인은 앞으로 노려보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다각!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가 어둠을 일깨운다.
쭉 뻗은 관도에는 시커먼 어둠이 담겨 있다. 사방도 어둡다. 나무도 검은색으로 보이고, 바위도 짙은 회색이다.
여인은 그 속에서 살기를 읽어냈다.
“치잇!”
저절로 이 악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활검문은 무척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가 마방에 잠입해서 말을 가지고 나온 시간은 일순(一瞬)에 불과하다. 잠에서 깬 사람이 옷 입을 시간 정도? 그런데 활검문은 벌써 몫을 차지하고 문도를 매복시켰다.
살검이 기다리고 있다.
저들은 검문이지만, 검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활이나 암기 같이 날리는 무기, 비병(飛兵)을 사용할 것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자를 잡으려면 아무리 검문이라도 비병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관도에 함정을 파 놓을 수도 있다.
시간상 노방(路傍)을 설치하진 못했겠지만, 땅에 쇠못 같은 암기를 깔아 놓았을 수는 있을 것이었다.
“죽이지만 말라고 했는데 어쩌면 너를 죽게 할지도 모르겠다. 미안,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네.”
말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에, 여인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말 목을 쓰다듬었다.
말은 자신이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도 모르고 태연히 걷는다.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가 매우 맑게 울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어. 널 믿는다. 네가 날 살려 줘야 해.”
여인은 다시 말 목을 톡톡 두들겼다.
따각! 따각! 따각! 따각! 따각!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걷다가…… 약간 빨리 걷다가…… 천천히,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매복이 느껴지는 곳은 산굽이다.
관도가 굽어지는 곳, 오른쪽 산등성이에는 무인들이 깔려 있다. 반대쪽 논밭에는…… 매복을 산등성이에만 깔아도 충분하겠지만, 완벽히 한다면 논밭에도 배치했을 것이다.
산에서는 화살을 날리기 좋다. 논밭에서는 비황석(飛蝗石) 같은 것을 던지면 좋겠다.
이쪽에서 생각하는 것은 저쪽도 생각한다.
틀림없이 매복이 있다.
만약 이곳에 매복이 깔려 있지 않다면, 혹여 그런 행운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활검문 손에서 벗어났다고 자신해도 좋을 것이다.
“이럇!”
두두두두두!
흑마가 앞으로 치달렸다.
누가 보면 매복을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이 무방비 상태로 달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말아! 너만 믿어!’
드디어 매복이 예견된 장소에 도착했다. 순간,
쒜에에엑! 쒜에에에엑!
밤하늘에 가느다란 흑선이 빼곡하게 그려졌다.
화살! 화살이다!
하늘을 새카맣게 채운 흑선들이 그녀를 향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파파파파팟! 파파팟!
논에서도 콩 볶는 소리가 울렸다.
연노(連弩)다. 비황석 정도를 사용할 줄 알았는데, 아예 뿌리를 뽑고자 한다.
“이럇!”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힘차게 말 배를 걷어찼다.
순간, 흑마가 쏜살같이 치달렸다.
시간차!
이것만이 매복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저들은 말이 달려오는 속도를 계산해서 비병을 쏘아낼 것이다. 말이 달려 나오는 앞쪽에, 뒤에, 그리고 가운데에…… 연노 같은 병기는 바로 직격(直擊)할 것이고.
그 시간차를 뺏는다.
저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달려 나가야 한다. 조금 빠른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생각할 수 없는 속도로, 달려드는 것을 뿌리치듯이 쏘아져 나가야 한다.
흑마가 할 수 있을까?
지금 달리는 것이 최대한 빨리 달리는 것이라면 그녀는 고슴도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할 일은 없다. 말만 믿는다.
두두두두두!
말이 힘차게 달린다.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화살 나는 소리처럼 쌩쌩 올린다.
“아!”
그녀는 깜짝 놀랐다.
흑마가 명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빠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늘을 나는 말, 비마(飛馬)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화살들이 등 뒤로 떨어진다. 연노가 등 뒤를 스치면서 지나간다. 땅바닥에 화살 떨어지는 소리가 기름 솥에 물방울을 떨어트렸을 때처럼 타타탁 터진다.
‘됐어! 됐어…!’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힘차게 달렸다.
“하앗!”
하지만, 그녀는 흑마를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관도에…… 말 열 필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다.
말 위에는 무인이 앉아 있다. 장검을 손에 들고 있기도 하고, 어깨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흐음!”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활검문 무인들은 모든 무공에 능하다. 검공만 강한 것이 아니다. 십팔반 무예에 모두 능통하다.
마상무예(馬上武藝)도 탁월하다.
마상무예 중에 특히 열 명이 한 조를 이뤄서 싸우는 진법이 있는데, 이를 타첩진(打疊陣)이라고 한다.
열 명이 차례로 공격해 오는 연환진이다.
열 명이 한꺼번에 검을 쳐 오는 것이 아니다. 한 명이 공격하고, 다음 자가 공격해 오고, 또 다음 공격이 이어지고…… 열 명이 계속해서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쳐 온다.
공격 열 번을 다 막아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결국, 싸움에서 벗어나려면 열 명을 모두 죽이거나 아니면 죽는 수밖에 없다.
활검문의 타첩진은 불패(不敗)로 유명하다.
불패라는 명성에 맞게 말을 타고 있는 무인들 모두 활검문이 자랑하는 최고수일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마상검예에 능통하지 않다. 말 위에서 검법을 펼쳐 본 적이 거의 없다.
‘말도 안 되는 싸움이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스릉!
검을 뽑았다.
매복은 흑마가 벗어나게 해 주었지만, 타첩진은 자신이 뚫어야 한다. 말이 뚫지 못한다.
다각다각다각!
말 열 필이 일제히 돌진해 왔다.
열 필이 달려오는데, 한 필이 달려오는 것 같다. 말과 말의 간격이 일정하다.
숨이 턱 막혔다.
쒜에에엑!
첫 번째 말을 탄 무인이 장검을 휘둘러 왔다.
‘쌍검……!’
벽력휘부세(霹靂揮斧勢)!
도끼가 벼락에 빛나는 형세라는 뜻이다. 오른쪽 검이 번쩍! 왼쪽 검이 번쩍! 빛을 뿜어낸다.
깡! 깡!
그녀는 정신없이 쌍검을 막아냈다.
손아귀가 찢어질 듯이 아파져 왔다. 쌍검이 안긴 충격 때문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상당한 중검(重劍)이다. 검에 깃든 내력이 거대한 바위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무겁다.
두두두두두!
첫 번째 무인이 스쳐 지나가고, 두 번째 무인이 들이닥쳤다.
쒜에에엑!
우검좌휘(右劍左揮)!
오른손에 든 검을 왼쪽으로 내리친다.
마상 검무는 땅에서 펼치는 초식과는 전혀 다르다. 번뜩! 빛이 뿜어지면 끝난다. 찰나의 무공만 존재한다.
까앙!
그녀는 두 번째 검공도 막아냈다.
‘큭!’
옅은 신음이 쏟아질 뻔했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서 참아냈지만…… 검에서 울린 통증이 손목과 팔꿈치, 어깨까지 전달된다. 오른팔 전체가 마비라도 된 듯 짜르르 울린다.
‘또 중검!’
저들은 우선 그녀의 진기를 떨굴 목적인 듯 무지막지한 패력으로 부딪쳐 왔다.
“후웁!”
그녀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순간, 진기가 일주천하면서 양손에 면잠공(綿蠶功)이 운집되었다.
활검문이 중검을 사용한다면 그녀는 연공(軟功)을 사용할 생각이다. 강공을 맞받지 않고 부드럽게 흘려보낸다. 보자기로 날카로운 검을 감싼다.
두두두두!
세 번째 기마무인이 들이닥쳤다. 순간,
“훅!”
그녀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세 번째 무인의 검이 보이지 않는다. 신형도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는 서둘러 상대의 자취를 찾으려 했다.
흑마는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간다. 상대방의 말도 치달려 온다. 하지만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완벽하게 모습을 감췄다.
그녀는 말이 스쳐 지날 때까지 감히 방심하지 못했다.
어디서 공격이 불쑥 튀어나와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슈각!
살검은 말이 빠져나갈 때 튀어나왔다.
말과 말이 완전히 비켜 지나갈 때, 네 번째 무인을 쳐다봐야 할 즈음에.
찌이익!
옆구리 옷이 길게 찢어지면서 붉은 선혈을 뿜어냈다.
세 번째 무인이 사용한 검은 쾌검이다. 중검만 사용하더니 무척 빠른 쾌검이 튀어나왔다.
두두두두두! 빠아아악!
네 번째 충돌이 일어났다.
다시 중검이다. 삼척장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팔십 근 철퇴와 부딪친 충격이 전해져온다.
열 명 중 겨우 네 번째…… 하지만 이번 충돌에서 그녀는 손가락뼈가 부러졌다. 더는 검을 잡고 있을 힘이 없었다. 간신히 검을 붙잡고 있지만, 검을 떨쳐낼 여력이 없었다.
두두두두! 쒜에에엑! 퍼억!
다섯 번째 검에는 벽력검(霹靂劍)이 담겼다. 빠르고, 강하고, 눈부시다.
까앙!
그녀는 간신히 검을 들어서 막아냈다. 하지만 벽력검의 내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검이 손을 떠나 훌훌 날아간다.
타첩진이 불패라더니…… 이제 겨우 절반을 막아냈을 뿐인데, 검을 잃었다. 이들 열 명을 다 막아낸다고 해도 똑같은 싸움을 계속, 계속해야 한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그녀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삼촌교망(三寸翹望)!
목숨을 걸어 보자. 삼촌교망을 사용하자. 고도의 정신 집중…… 삼촌교망을 사용한 후에는 전신 기력이 일시에 빠져나가서 혼절하겠지만, 그래도 해 볼 수 있는 것은 해 봐야지.
그 후로는 죽는지 사는지 모른다.
이들을 상대할 수 없다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강 무공을 펼친 후, 기다린다.
그녀는 즉시 허리띠 한쪽을 풀어서 말안장에 묶었다.
혼절하더라도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죽으면 죽었지 생포되지는 않는다.
두두두두!
여섯 번째 무인이 들이닥쳤다.
그도 쌍검이다. 왼손에 든 검으로는 머리를 베어 오고, 오른손에 든 검으로는 허리를 갈라 온다. 쌍검을 두 손으로 사용하는데, 각기 다른 초식을 전개한다.
그녀는 검을 쳐다봤다. 마음을 죽여 버린 눈동자가 검을 끝까지 주시했다. 검이 그리는 궤적을 쫓았다. 인간의 눈은 검의 궤적을 쫓지 못하지만, 생명이 죽어버린 눈은 쫓을 수 있다.
쒜에에엑!
검이 목을 치려고 한다. 순간,
쒝!
상대의 검이 삼촌에 이르렀을 때, 검이 살에 닿기 직전, 그때까지 기다렸던 손이 퍼뜩 움직였다. 상대방의 가슴을 격타했다.
- 목숨에 연연하지 마라. 죽을 작정을 해야 한다. 상대의 병기가 살에 닿을 때까지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고 지켜볼 줄 알아야 한다. 그 후에는 찰나만 남는다. 찰나에 피하지 못하면 죽는다. 찰나에 피하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 삼촌교망이다.
목숨을 버린 눈은 상대방의 빈틈을 찾아냈다. 검이 흐르는 궤적과 가슴 사이의 텅 빈 곳을 찾아냈다. 그리고 손을 뻗어낼 기회까지도 계산해냈다.
퍼억!
상대방이 말 위에서 나가떨어졌다.
그녀는 일곱 번째 무인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미 정신이 흐릿해졌다. 눈앞이 가물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말 등에 머리를 푹 박으며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