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第四章 십오년(十五年) 후(後) (3)
히힝!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흑구 왔다.”
노인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 울음소리는 멀리서 들려왔다. 마구간까지 오려면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흑구가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청각으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땅 울림…… 오체진감(五體震撼)으로만 느낄 수 있다.
마동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달빛만 쳐다봤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이제 겨우 축시(丑時)를 넘어섰다. 그러니 날이 밝으려면 두 시진은 더 있어야 한다. 오늘 밤은 그 어느 날보다도 길다.
유난히 바람도 차다. 달빛도 시리다.
“흑구 저놈, 대단하네. 활검문 타첩진(打疊陣)은 말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을 텐데. 하하.”
노인, 노복이 흥겹게 말했다.
노인은 흑마를 ‘검은 개’라고 불렀다.
말도 잘 알아듣고, 재롱을 부리는 강아지처럼 귀엽기 때문이었다.
“내 눈이 맞지? 이놈 단단히 한몫한다니까.”
“…….”
마동은 창밖만 쳐다본다. 아무 말도 없이 달빛을 가리는 구름을 본다.
히히힝! 두두두두두!
흑마가 놀라운 속도로 치달려 오고 있다.
이제는 말 울음소리도,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도 두 귀로 전해진다.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 노인이 손바닥으로 마구간 바닥을 후려쳤다.
쿵!
땅이 울렸다.
그러자 흑구가 울음소리를 뚝 멈췄다. 달리지도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말발굽 소리를 죽이고 다각다각 천천히 걸어온다. 밤을 깨우지 않는다.
흑구가 마구간으로 왔다는 건 여자가 당했다는 소리다. 당하지 않았다면 다른 곳으로 갔을 테니까.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노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말해 봐. 저 여자, 누구야?”
“죽었는지 살았는지부터 살펴보고. 말할 기회는 많으니까, 우선 준비하자. 흑구는 내가 돌볼 테니까, 넌 여자를 살펴.”
“정말 누군지 말 안 할 거야!”
“나중에. 나중에. 지금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 없어.”
노인이 마동의 어깨를 다독거린 후, 마구간 구석진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말 먹이 볏짚을 들춰내고 그 속에 감춰진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
다각!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가 마구간 밖에서 울렸다.
마구간 문은 열려 있다. 마당이 대낮처럼 환히 보인다. 하지만 흑구는 보이지 않는다.
흑구는 마당을 가로지르지 않고 담벼락을 따라서 걸어왔다.
“저놈 가르친 보람이 있군. 이럴 때 보면 사람보다 더 똑똑하다니까. 네놈보다 훨씬 나아.”
마동이 낄낄거리는 노인을 뒤로하고, 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마침 흑구가 막 마구간 안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흑마는 등에 축 늘어진 여인을 태우고 있다. 허리띠 하나로 간신히 붙들어 놓은 몸이다. 심하게 달리면 뚝 끊어져 버릴 것 같은데…… 용케 태우고 왔다.
“이 여자도 보통은 아니지? 말이 좋다는 걸 알아봤잖아. 그러니 그 와중에도 몸을 묶었지.”
어느새 흑구 옆으로 다가온 노인이 말했다.
“아이고! 이놈, 많이 다쳤네. 네가 이 정도면 활검문 타첩진도 무시할 게 아니구나.”
흑구는 상처투성이다.
검에 베인 자국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살이 갈라지고 피가 흘러내린다.
흑구가 노인을 쳐다봤다. 노인이 품에 끼고 있는 항아리를 봤다.
히히힝!
흑구는 항아리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아는지 길게 울음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가만히 있어, 이놈아. 원래 입에 쓴 것이 몸에 좋은 법이여. 칼 맞은 데는 이것보다 좋은 게 없어.”
히히힝!
“가만히 있으래도 이놈이!”
노인은 항아리를 열었다.
안에는 거머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노인은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쑥 넣어서 거머리 한 무더기를 집어 들었다.
거머리가 노인의 손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당장 피를 쭉쭉 빨아대기 시작했다.
노인은 거머리를 말의 상처에 붙였다.
그러자 거머리가 당장 말에게로 이동했다. 피가 흘러내리는 상처 부위에 찰싹 달라붙었다.
히히힝!
말이 괴로운지 요동쳤다.
“고생했다. 고생했어. 잠시만 참아. 곧 괜찮아질 거야.”
노인이 흑구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흑마가 혀를 내밀어 노인의 얼굴을 핥았다.
마동은 계속해서 여인을 살폈다.
왼쪽 어깨뼈부터 허리 어림까지 길게 베였다. 척추가 상했는지는 살펴봐야 안다. 뼈가 상했다면 차라리 치료하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옆구리 상처도 깊다.
얕게 베인 것 하나, 깊게 찔린 것 하나. 두 대 먹었다.
두 대 먹은 것 중 깊게 찔린 것이 문제인데…… 검상을 보면 검이 아래쪽으로 향했던 것 같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은 검이다. 그렇다면 신장이 망가졌을 수도 있다.
마동은 여인을 반듯하게 눕혀 놓고 눈으로만 살핀다. 상처가 심할 때는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다.
‘허벅지에 한 대. 이건 무시해도 좋고……. 겨드랑이? 겨드랑이 밑으로 찔러 넣었다면 허파…….’
마동이 일어섰다.
등, 옆구리, 겨드랑이 밑…… 치명적인 상처만 세 군데다.
손대지 않는 것이 좋겠다. 치료한다고 해도 평생 불구로 지내기 십상이다. 거동도 하지 못하고 약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식물인간으로 전락한다.
여자는 살수다.
살수가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당했으니 죽는 게 나을 것이다.
미동이 일어섰다.
“왜? 치료하지 않으려고?”
“죽는 게 낫겠어.”
“그래도 치료하는 게 좋을 텐데? 어떻게든 살려 봐.”
노인의 말투가 묘했다. 그냥 평소처럼 말하는데…… 묘하게 사람 마음을 긁는다.
“이 여자가 누군지 아직도 말해 주지 않을 거야?”
“취화원(醉花園) 살수.”
“돈도 많네. 취화원에 청부를 넣은 거야? 하지만 아쉽게도 실패야. 이 여자는 곧 죽을 거니까 내가 활검문과 부딪치는 일은 없을 거고……. 이런 일을 벌일 때는 상의 좀 해. 정작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사람은 나잖아.”
“이놈아, 너만 목숨 거냐? 난 아예 죽는다. 내가 빨리 죽겠다는데 네가 뭔 상관이야? 그리고 그 여자…… 비아(飛娥)다.”
“뭣!”
마동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렸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인을 매섭게 쏘아봤다.
“그 여자…… 비아라고. 비아. 네 여자, 오비아(吳飛娥).”
“미쳤어!”
마동이 소리를 빽 질렀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몸을 돌려서 여인의 피 묻은 옷을 벗겨내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치료하는 게 좋을 거라고.”
노인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마동은 노인이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마동의 온 정신은 여인에게 집중되었다.
마동은 여인의 상의를 벗겼다.
피에 절은 나신이 달빛에 드러났다.
등이 베이면서 가슴을 가린 천도 잘려 나갔다. 상의를 벗기자 검은 천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마동은 여인의 나신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상처를 두 손으로 쩍 벌려서 안을 들여다봤다.
“일단 등뼈는 무사하고…….”
무사할 수가 없는데, 무사하다. 저들이 손에 사정을 남겼다. 죽이지 않고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었던 듯하다.
활검문은 흑구를 간과했다.
놈이 얼마나 영특한지, 웬만한 암기는 피할 줄 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다리를 구부리고, 펴고…… 검초를 피하는 동작까지 훈련받은 사실은 알 리가 없다.
그런 걸 알았다면 단박에 살초를 전개했을 거다.
겨드랑이 밑으로 쑥 들어간 상처도 마찬가지다. 검을 찌르다가 말았다.
그렇다고 해도 여인은 여전히 중상이다.
심혈을 기울여서 치료해도 목숨만 부지시킬 수 있을 뿐, 거동은 생각하지 못한다.
검기가 경맥을 끊어 놓았기 때문에 진기 운행이 되지 않는다. 일어서지를 못한다.
마동은 검은 항아리에서 거머리를 꺼내 상처에 붙였다.
거머리는 피도 빨아먹지만, 감염을 막아 준다. 피를 빨면서 녹색 즙액을 흘려 넣어 살을 봉해 준다.
녹선마황(綠腺螞蟥)!
오직 일홀문(一忽門) 사람만 아는, 금창약 대신에 가지고 다니는 천하제일의 구급약이다.
흑구는 살이 많은 곳에 검을 맞아서 녹선마황만 붙여놔도 충분했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마동은 여인의 등 뒤 명문혈(命門穴)에 장심(掌心)을 붙였다.
츠으으으읏!
그의 진기가 물밀 듯이 밀려들어 갔다. 여인의 경맥을 쫓아 들어가면서 끊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천라심요대법(天羅心要大法)!
죽기 직전인 사람도 숨 한 가닥만 붙어 있으면 살려낸다는 일홀문 내상 치료법이다. 하지만 펼치는 사람은 본신 진기의 절반 이상이 손실된다.
“어휴! 아까운 저 진기……. 어떻게 수련한 건데.”
노인이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비아가 취화원 살수가 됐다니. 어떻게 찾았어?”
“말해도 되냐? 진기 손실이 엄청날 텐데, 운기조식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아?”
“어떻게 찾았냐고.”
“킥킥! 그런 건 내가 잘하잖냐. 목숨 걸고 찾는 사람에게는 그 어디에 숨겨 놓아도 보이는 법이다.”
“그렇게 찾더니…… 찾았네.”
“고생깨나 하긴 했지. 살수로 숨겨 놓고 있을 줄 누가 알았냐?”
“사부님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같은 생각이다. 아마 사모님이 하셨지 않나 싶다.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있으니 다행인 거지. 그건 그렇고…… 넌 어떻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냐? 네 여자를 찾아줬는데?”
“찾았으면 곱게 돌려줘야지. 이게 뭐야?”
“앞으로 혈로(血路)를 걸어야 하는데 이 정도 고생쯤은 입가심으로 해야지. 안 그러냐?”
노인이 씩 웃으며 마동을 쳐다봤다.
“활검문 청부라면…… 혹시 강조(姜照)?”
“킥킥! 활검문 문도 중에 청부 넣을 놈이 그놈밖에 더 있냐? 죽을 놈 죽은 거지.”
“풋!”
마동이 웃었다.
강조는 소문난 망나니다.
술버릇이 좋지 않아서 취했다 하면 주변 사람들을 두들겨 팬다. 여인이건, 아이건 가리지 않고 주먹질을 한다. 팔다리를 부러트리는 건 예사다.
또 그는 호색한이다.
얼굴이 반반한 여자를 보면 반드시 품에 품어야 직성이 풀린다. 가정을 가진 여자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불문에 몸담은 비구니를 겁탈한 적도 있다.
결국, 비구니는 목을 매 자진했다. 아니, 사람들은 비구니를 죽인 게 강조라고 확신한다. 비구니를 자진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겁탈한 후에 죽이기까지 했다고 본다. 아니면 강조가 비구니를 겁탈하자, 수행하던 자들이 뒤처리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쁜 자, 악인, 벌을 받아 마땅한 자다. 하지만 그는 아직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는 자다. 악행은 무수히 저질렀지만, 밖으로 드러난 적이 없다.
강조는 활검문의 귀빈이다.
활검문 일 년 예산 중 절반을 감당한다는 여천(餘喘) 강 씨의 외아들이 무공 수련 차 입문해 있다. 백만석지기의 외아들이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곳은 몰라도 최소한 동승에서만큼은 모든 비리가 감춰진다.
동승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취화원에 청부를 넣었다. 청부금을 내면서 강조를 죽여 달라고 했다. 그리고 죽였다. 망나니 강조를 죽인 살수가 마구간 한구석에 누워있다.
“할배. 속 시원해? 어찌 되었든 시작됐잖아.”
“꼭 속 시원하다기보다는…… 할 때가 됐지 싶었다. 이런 식이 아니면 영영 눌러앉아 버릴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살면 어떠냐 싶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서.”
“내 무공 형편없다는 거 알잖아.”
“알지.”
“지금 시작하면 개죽음이지?”
“큿큿큿! 언제 시작하든 그런 마음은 생길 것 같지 않냐? 앞으로 십 년 후에 시작해도 겁나지. 아니, 그때는 더 못할 것 같은데? 아예 눈 질끈 감고 미친놈처럼 시작하지 않으면 못 해.”
“할배는 살 만큼 살았으니까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이놈이…… 인마! 누가 살 만큼 살아! 천 년을 살아봐라! 그래도 죽는 게 싫지. 나도 인마 목숨 내놨다니까!”
“알아. 알아. 알아.”
두 사람은 달빛을 쳐다봤다.
달빛은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무심히 흐른다.
“그자들, 언제 나타날까?”
“그놈들 걱정은 나중에 하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 곧 활검문 놈들이 들이닥칠 거다. 준비해.”
노인이 달빛 깔린 마당을 휘적휘적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