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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19화 (19/600)

#19화. 第四章 십오년(十五年) 후(後) (4)

여인은 눈을 떴다.

“크윽!”

눈을 뜨자마자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나마 괜찮고, 조금이라도 꿈쩍거리면 지독한 통증이 여지없이 밀려온다.

재빨리 눈을 돌려서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살폈다.

거친 나무 창살 사이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지독한 말똥 냄새…….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즉시 깨달았다.

마구간이다.

‘내가 마구간으로 되돌아온 거야? 그럼 흑마가……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두면 마구간으로 돌아온다고 하더니, 정말 돌아왔네. 그런데 타첩진은 어떻게 벗어난 거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마구간을 살폈다.

밤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뚜렷하게 보인다.

말들이 깨끗하게 정리된 마사에서 한가롭게 서성인다. 각 마사마다 나무문이 닫혀 있지만, 문 높이가 어른 허리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안이 환히 보인다.

그 속에 흑마도 섞여 있다.

흑마…… 굉장한 명마였는데, 여전히 볼품없다.

갈기는 씻기지 않아서 마구 헝클어져 있다. 윤기도 흐르지 않는다. 어제는 그토록 반짝이던 눈동자도 오늘은 어쩐지 퇴색한 노인의 눈처럼 희뿌옇다.

몸에는 구더기가 잔뜩 붙어 있다.

가만…… 구더기는 아니고 저게 뭐지?

오물오물, 꼬물꼬물……. 마구 꼼지락거리는 벌레들이 잔뜩 꼬여 있다.

흑마는 벌레들이 간지러운지 가끔 몸을 대고 부빈다.

저 말이 그렇게 명마였나?

‘어제는 고마웠어.’

그녀는 흑마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흑마는 그녀의 눈길을 외면했다.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가롭게 여물을 먹고 있다.

눈길을 돌려 보자 가지런히 정리된 마구들이 보인다.

마구들은 전혀 틀어짐이 없다 한쪽에는 말 먹일 집단을 쌓아 놨는데, 그 역시 흐트러짐이 없다.

마구간에서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어떤 풍파도 스쳐 지나간 적이 없다.

‘어떻게 된 거야?’

그제야 그녀는 긴장을 풀고 지난밤에 있었던 기억을 되살려봤다.

옆구리를 찢으면서 지나간 일격을 기억한다.

삼촌교망으로 한 사람을 떨어냈고…… 전신 기력을 모두 쏟아부은 탓에 탈진해서 쓰러졌다.

기억은 그것이 전부다.

지금 몸이 만신창이인데…… 아마도 혼절한 이후에 심한 타격을 받은 것 같다.

어떻게 타첩진을 벗어났을까?

마상 무인의 공격이 네 차례나 더 남았는데, 앞뒤로 포위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는데. 타첩진을 벗어난 것만 해도 기적인데, 그들을 따돌리기까지 했다는 거잖나.

마구간까지 온 것이 기적이다.

천운이 뒤따라 주었다.

‘요행히 살았군. 그런데 몸이 어떻게 된 거지? 어디를 다쳤는지 알아야…….’

그녀는 몸을 살펴보려다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숨이 탁 막힌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지독한 통증에 비명을 쏟아냈다.

“끄으으윽……!”

몸을 움직이자 거센 통증이 밀려들었다.

새빨갛게 달궈진 인두 수십 개가 일시에 살에 닿는 고통? 사지가 갈가리 찢기는 거마형을 당하는 느낌?

그녀는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한참 동안을 쩔쩔맸다.

시간이 흐르자 아픔이 가셨다. 몸을 꼼짝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있으니 통증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토해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상처를 살피면서 잠시 본 것인데, 아니…… 지금도 몸으로 느끼고 있는데…… 옷이 다 벗겨져 있다. 알몸이다. 가슴을 감싸 주었던 가리개마저 사라졌다.

그녀의 알몸을 가려 주고 있는 것은 얇은 담요 한 장뿐이다.

‘도대체 누가…!’

그녀는 누가 자신을 치료해 주었을지 생각했다. 퍼뜩 두 사람을 떠올랐다.

노인, 아니면 마동!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자신을 치료했다.

마동은 말밖에 모르는 풋내기일 것 같고…… 노인이 치료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갑자기 창피하다는 생각이 와락 밀려왔다.

상처의 아픔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진정시킬 수 있다. 하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창피함은 막을 길이 없다. 끊임없이 밀려와 눈꺼풀을 파르르 떨게 만든다.

삐이걱!

마구간 나무문이 열렸다.

다행스럽게도 목동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노인이라고 해도 알몸을 보인 사람과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목동은 여인에게는 볼일이 없다는 듯 작두로 짚단을 썰어서 여물통에 놓았다.

마사마다 일일이 여물을 놓아 주어야 한다. 그리고 물통에 물도 따라 준다.

참 손이 많이 간다.

목동은 한참 동안 일을 하더니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여인은 묻고 싶던 말을 꾹 참고 있다가 그가 가까이 다가온 후에야 입을 열었다. 한데,

홱!

목동이 느닷없이 담요를 걷어냈다.

“앗!”

여인은 깜짝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곧 아까 느꼈던 그 고통……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이 전신을 후벼 팠다.

“끄으으윽!”

그녀는 일어서지 못하고 등을 활처럼 구부렸다.

“일어서지 마. 상처가…….”

쫘악!

여인은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전력으로 목동의 뺨을 후려쳤다.

얼굴이 옆으로 홱 젖혀질 정도로 강력한 따귀다. 뺨 맞는 소리가 마구간을 쩌렁 울린다.

목동은 여인의 손길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아아악!”

여인은 비명을 쏟아냈다.

따귀 한 대를 후려친 대가는 엄청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경이란 신경은 모두 가닥가닥 끊어졌다. 신경 한 올, 한 올에 칼날이 닿았다.

“으읏!”

여인은 신음을 쏟아내며 축 늘어졌다.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입술이 시커멓게 죽었다. 두 눈은 퀭하니 파였다.

사실, 그녀는 상처에서 일어나는 고통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니다.

몸이 말이 아니다. 당장 열이 펄펄 끓는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열이 난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고 눈앞이 빙빙 돌고…… 눈을 뜨고 사물을 지켜보는 것도 힘들다.

저리 아픈 몸으로 따귀를 갈길 힘은 어디서 난 것인지, 목동이 손을 들어서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말했다.

“그만둬.”

뭘 그만두라는 것일까?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왜 때렸는지 모르겠는데…… 치료부터 하자.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죽으니까.”

목동이 다시 담요를 거둬냈다.

‘맙소사!’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노인이 치료한 게 아니다. 목동이 치료했다.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살수 수련을 하면서 온갖 고통을 경험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고통을 경험했다. 육체로 받을 수 있는 고통이라면 거의 다 겪었다.

물론 고문도 받았다. 수련 과정에 고문이 포함되어 있다.

고문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극복할 수 있다. 극복할 수 없겠거든 목숨을 끊으면 된다. 사로잡히면 곤란하다. 고통을 알면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끊기 쉽다.

정말 지독한 고통을 다 당했다. 하지만 지금 받는 고통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다.

그만큼 몸이 안 좋은 것이다.

“방금…… 미안.”

여인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담요가 걷히자 찬바람이 몸을 휘감아왔다.

나신을 환히 드러내고 있다. 낯선 사내에게 알몸을 구석구석 보여 주고 있다.

“이제 치료를 시작할게. 냄새가 역하겠지만 참아야 해. 몸을 움직일 때는 아플 테지만, 그 후에는 시원해질 거야.”

목동이 차분하게 말해 왔다.

그녀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나…… 어디를 어떻게 당한 거야?”

“왼쪽 날갯죽지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베였는데, 뼈는 이상 없어. 사로잡을 생각에 검을 끝까지 쓰지 않았지. 다른 곳도 있지만, 등이 제일 심해.”

“내 가슴은…… 가슴은 괜찮지?”

그녀가 힘들게 말했다.

“괜찮아.”

“그럼 좀 가려 줄래?”

“……이상한 여자군. 살수라면서…… 창피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창피한 게 느껴져?”

“…….”

여인은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이자, 죽이고 싶다.

목동의 도움이 전혀 고맙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려 줘. 천 하나만 덮어 주면 되잖아.”

“다 봤는데 뭘 내외야. 그것보다 치료 때문에 안 돼.”

마동이 그녀의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아주 살짝!

그런데 팔을 움직이자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서 뼈를 박살 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아악!”

그녀는 비명을 쏟아냈다.

“등 다음에 이곳이 가장 깊어. 그다음은 옆구리. 허벅지에도 한 대 맞았는데, 그건 별거 아니고.”

목동은 겨드랑이 밑에 물을 발랐다.

손으로 바르는 것이 아니다. 붓으로 조심스럽게, 아주 세심하게 물을 발랐다.

“뭐야?”

그녀가 즉시 물었다.

물을 바르자마자 그토록 지독하던 통증이 일시에 가셨다.

상처가 마취되는 듯…… 그러면서도 매우 시원해진다. 약간 서늘한 기운까지 스민다.

지독한 고통을 당한 끝이라서 상쾌하기까지 하다.

“모르는 게 좋아.”

목동이 무심하게 말했다.

여인은 눈을 감은 채 온몸을 목동에게 맡겼다.

목동은 겨드랑이 밑을 시작으로, 등과 옆구리에도 꼼꼼하게 물을 발랐다.

녹색 즙, 약초즙인 것 같다.

그리고 손이 아래로 내려간다. 허벅지를 만진다.

‘허벅지?’

그녀는 그제야 허벅지에도 한 대 맞았다고 말해 준 것을 기억해냈다.

낯선 사내에게 알몸을 전부 보인 건가?

여인은 이를 꽉 깨물었다.

목동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알몸을 보인 것이 대수냐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죽는 것보다 알몸을 보인 것이 더 큰 일이다.

그녀에게는 정혼자가 있다.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도 알 수 없다. 너무 어렸을 적에 헤어져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부모님이 정해 준 정혼자다.

다른 기억은 나지 않는데, 오빠와 정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뻐했던 것만은 분명하게 생각난다. 정혼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어린애가.

질끈 눈을 감고 씨근덕거리는 그녀를 두고 목동은 계속해서 손을 놀렸다. 곧 허벅지에 녹색 즙을 모두 발랐는지 마른 헝겊으로 둘둘 감았다.

“나, 너 죽여야 할 것 같아.”

여인이 불쑥 말했다.

“상처를 치료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내 몸을 보고 만진 건 용서하지 못해.”

목동은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녀를 본 것, 만진 것…… 전부 치료였다. 방금 치료를 받으면서 느낀 것인데…… 목동은 어떠한 욕념도 떠올리지 않았다. 치료하는 손길이 매우 무심했다.

그녀를 여자로 보고 있지 않다.

그래서 상대에게 선택권을 준다.

지금 치료를 포기하고 물러서라고, 도망가라고.

목동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뭐래. 그건 다 낫고 난 다음에 얘기해. 조금 있으면 활검문 사람들이 들이닥칠 거야. 당신을 이 침상 밑에 떨궈놓을 건데, 무슨 일이 있어도 기척을 감춰. 정신 잃지 말고.”

순간, 여인은 눈빛을 싸늘하게 굳히며 목동을 쳐다봤다.

목동이 하는 말이 평범하지 않다.

활검문 코앞에서 활검문도를 속이겠다는 말이다. 지금쯤 누가 죽었는지 알았을 텐데…… 아무 은원도 없는 살수를 활검문 추격에서 빼내겠다는 소리다.

이건 말이나 키우는 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무인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츠읏!

그녀는 살수의 눈으로 목동을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밀하게 살폈다.

아무 느낌도 없다. 목동은 목동일 뿐이다. 어느 구석에서도 무인다운 기운이 엿보이지 않는다. 아주 평범한 자, 너무 평범해서 주시할 필요도 없는 자다.

“……날 왜 살려 주는 거지? 내가 누군지 알잖아. 내가 누굴 죽였는지도 알 거고.”

“하하! 살려 준다는데도 눈을 부릅뜨는 건 뭐야? 살수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이렇게 하나?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 살고 보자.”

목동이 나무 침상 한 귀퉁이를 꾹 눌렀다. 그러자 그녀가 누워 있던 짚단 깔린 침상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스읏! 쿵!

머리 위로 판자가 덮였다.

‘이 사람 뭐야?’

여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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