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第五章 대류(大溜) [빠른 물살] (1)
따각! 따각! 따각!
흑마가 수레를 끌고 넓은 마당으로 나왔다.
한낮이다. 태양이 중천에 떠 있다. 그런데도 마방 마당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다.
따각! 따각!
흑마가 마당을 가로질러 마방 문을 넘어섰다.
마방 사람들은 누구도 나와 보지 않았다. 나오지 않은 것인지, 나올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누군가에게 제압되어 있을 것이다.
마동 아걸의 옆에는 노인이 있다.
노인과 아걸은 같은 패다. 살수의 직감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노인이 나와 보지 않는다. 암중으로 중요한 일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아걸은 마방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흑마를 몰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아무도 아걸을 주시하지 않는다.
수레에는 그녀가 누워 있다. 그녀의 몸 위에 마른 짚단이 수북이 쌓여 있다.
아걸은 짚단을 운반하는 중이다.
매우 평범한 일상이다.
검을 찬 활검문 검사가 지나간다.
“어디 가냐?”
아걸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그는 말을 하지 않는다. 무뚝뚝하게 손으로 대답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말해 왔다는 것이다.
따각! 따각!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동승을 빠져나갔다.
“어디 가?”
활검문 검사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동승에서 다른 현(縣)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검문 중이다.
눈에 띄는 자가 다섯, 움막 안에서 쉬는 자가 다섯……. 적어도 열 명이 있다. 특히 그중 한 명은 손에 화탄(火彈)을 쥐고 있다. 언제든 본문과 연락을 취할 수 있게끔.
아걸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어디 가는지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인마!”
활검문 검사가 인상을 찡그리며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길을 막지는 않았다.
활검문 검사가 길을 비켜 줬다.
모두가, 상당히 많은 사람이 아걸을 알고 있다.
‘휴우!’
그녀는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때문에…… 미안하게 됐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는 말은 바꿔서 말하면 곧 수많은 사람이 아걸을 추격해 온다는 뜻이 된다.
심지어는 이제 곧 용모파기가 가는 곳마다 붙어 있을 것이다. 현상금도 걸릴 거다.
아걸은 활검문뿐만 아니라 정도 무인의 표적이 된다. 현상금 사냥꾼들의 표적이 될 것이고,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늘어설 것이다.
아걸이 도주할 곳은 없다.
지금쯤 마방에서 죽은 두 무인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화탄이 쏘아졌을 것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이미 포위망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
반면에 활검문은 정작 강조를 죽인 살수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주객이 바뀌었다.
따각! 따각! 따각!
아걸은 태연히 말을 몰고 있다.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인데……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 * *
아걸이 짚단을 치웠다.
한쪽으로 곱게 쌓아 놓는 것이 아니다. 두 번 다시 쓰지 않을 것처럼 마구 던진다.
위장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주변을 살폈다.
강이다. 강이 보인다.
활검문 인근에 있는 강이라면 금강(錦江)이다.
‘강을 건널 생각인가? 아니면 강을 따라서…….’
어떤 생각이든 다 좋지 않다.
활검문 영역은 본문이 있는 동승에서부터 사방 이백여 리에 달한다. 그 넓은 땅에 제자들이 쫙 깔려 있다. 제자의 제자, 또 그 제자까지 헤아리면 이백 리 전부가 활검문 영토다.
어디로 가든 아걸을 쫓는 사람이 득실거린다.
지금쯤 아걸을 잡으라는 체포령이나 죽여도 좋다는 살인 명령이 떨어져 있을 것이다.
강을 건너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강을 따라서 내려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강가에는 나루터가 있다. 금강은 나루터 간격이 특히 좁아서 거의 십 리마다 하나씩 위치한다. 그리고 나루터에는 활검문 검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배를 타고 가면서 그들의 시야를 벗어난다는 것은 참 어렵다.
낯선 사람이 배를 타고 가는데 정선 명령을 내리지 않을 리 없고, 수색을 당하면 발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 반드시 싸우게 되어 있다.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걸은 굉장한 고수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초극강의 무공을 한 점 망설임 없이 펼치는 살인마다. 사람을 죽이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다는 뜻이다.
당분간 아걸은 활검문도를 거침없이 베어낼 것이다.
하지만 곧 그의 무공은 분석된다. 그를 상대할 수 있는 무인이 나타난다.
강조를 암살하기에 앞서서 탈출로를 자세히 살펴봤다.
그 결과, 강을 따라서 탈출하는 길은 엿보이지 않았다. 강을 건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강조를 죽인 후, 바로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리는 것이 최상책이었다. 복면을 벗어 던지고, 검을 숨기고 동승 주민들 속에 섞여 들어가는 것이다.
차선책은 활검문이 미처 경계망을 펼치기 전에 이백 리를 돌파하는 것이다.
그녀는 첫 번째 방법에 실패했다. 강조를 죽이자마자 즉시 활검문도가 따라붙었다. 미처 동승 주민들 속에 숨어들 틈이 없었다. 쫓기기 바빴으니까.
차선책도 실패했다.
마구간 노복 덕분에 명마를 손에 넣었지만, 돌파에는 실패했다. 활검문 경계망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치밀했다. 빠르고 정교했다.
살행은 성공, 탈출은 실패다.
그녀의 목숨은 죽은 것이나 진배없다. 만약 흑마가 그녀를 탈출시키지 못하고, 저들 손에 잡혔다면…… 눈을 뜨는 즉시 심혈(心血)을 터트려서 자결했을 것이다.
지금은 아걸이 그녀가 당면했던 문제에 부딪혔다.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강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뒤로 돌아설 수도 없다.
아걸은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을 보며 앉았다.
그녀는 말을 건네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가 그만두었다.
마땅히 할 말이 없다. 아걸에게 해 줄 말이 없다. 활검문 손아귀를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지?’
“아이고! 힘들어 죽겠다. 무슨 놈의 언덕이 이렇게 높아? 좀 편한 데 있을 것이지.”
바로 그때,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인 노복이 나타났다.
“난리 났지?”
아걸이 말했다.
“당연히 난리 났지. 마방 사람들 다 잡혀가고……. 별일은 없겠지만 고생은 할 거야.”
노인이 아걸 옆에 와서 앉았다.
“넌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게…… 이거 가져가라고 했더니 왜 빼놓고 간 거야?”
노인이 항아리를 내밀었다.
“귀찮아. 쓸 데도 없고.”
“이게 왜 쓸데가 없어?”
“그걸 쓸 정도로 다쳤다면 끝난 거야.”
“큭큭! 하긴…… 네 말이 맞다. 이걸 쓸 정도로 사정을 봐줄 놈들이 아니지. 아니, 아니야. 넌 쓸데없어도 저 아가씨는 써야 하지 않냐? 어떻게 넌 너만 생각해!”
노인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항아리를 아걸의 품에 안겼다.
아걸이 항아리를 받아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강을 쳐다봤다. 말없이, 묵묵히…… 흐르는 강물을 지켜봤다.
“……만족해?”
아걸이 엉뚱한 말을 했다.
“흐흐흐!”
노인이 징그럽게 웃었다. 하지만 노인의 웃음 속에는 만족한 기색이 역력하게 담겨 있었다.
노인이 웃음 뒤에 말을 이었다.
“이제 시작은 했으니까…… 끝까지 가라.”
“가지 못할 거 알면서.”
“가든 못 가든 그건 네 문제고.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으니, 난 이걸로 만족하련다.”
“좋겠네. 할 것 다 해서.”
“끝까지 가거라.”
“할배.”
“왜?”
“할배.”
“왜! 인마!”
“살아. 살아서 내 술 한잔 받아.”
“나 술 끊은 거 모르냐?”
“그러니까. 내가 주는 술 받으라고. 다시 마시라고.”
“큭큭큭! 그래, 나중에. 끝까지 가거든 그때 술 한잔 받지. 못 받을 건 뭐야.”
아걸과 노인이 다시 강을 쳐다봤다.
“가야지?”
“가야지. 시작했으니까.”
의심은 없다. 불안도 없다. 억지로 등 떠밀려서 시작했지만, 가야 할 길이라면 기꺼이 간다. 가다가 죽을 것도 안다. 하지만 끝까지, 한 발짝이라도 더 멀리 간다.
“이거.”
노인이 헝겊에 둘둘 만 것을 내놨다.
“뭐야?”
“반철도(半鐵刀)다. 이거 만드느라고 삼 년이나 고생했다. 이게 그래도 네 목숨 한두 번은 구해 주겠지. 그런 생각 하면서 만드니까 피곤한 줄도 모르겠더라.”
“필요 없어.”
“가져가, 인마!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아걸은 노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할아버지, 살아있어.”
“할아버지는…… 징그럽다, 이놈아. 내 걱정하지 마라. 이 목숨은 천하디 천해서 저승사자도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아. 딴 놈 다 죽어도 나는 산다.”
두 사람이 침상 곁으로 와서 네 귀퉁이를 잡았다.
아걸이 앞쪽 두 귀퉁이를 잡고, 노인이 뒤쪽으로 가서 다른 두 귀퉁이를 잡았다.
침상…… 이제는 널빤지에 불과한 침상이 들것으로 변했다.
아걸이 먼저 움직인다. 노인이 바로 따라서 움직였다.
그녀와 노인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노인이 빙긋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저놈 저리 무뚝뚝해도 잔정이 꽤 있어. 소저 목숨 어떻게든 살려 줄 놈이니까 너무 걱정 마셔.”
“……네.”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걸과 노인은……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분명히 어제 처음 만난 사람들이고, 별다른 인연도 없다. 그런데도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친근하다.
‘아! 혹시 퇴빙(退氷)?’
그녀는 눈을 끔뻑이며 노인과 아걸을 쳐다봤다.
맞는 것 같다. 퇴빙 같다.
퇴빙은 살수 용어다. 일반인은 모르고 오직 살수들만 아는 은어(隱語)다.
살수의 최고봉은 단연 퇴빙이다.
퇴빙의 원래 뜻은 얼음이 매우 천천히 녹는 것, 녹아서 없어져 버리는 것을 말한다.
살수는 그와 같은 경지를 동경한다.
세상은 전혀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경계하지 않는다. 뛰어남이나 비범함을 보이지 않는 사람도 경계하지 않는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경계하는 사람은 없다.
아걸과 노인은 퇴빙을 구사한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사람을 단숨에 갈라 버리는 지독한 살기를 품었으면서도 전혀 표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진짜 고수다.
노인이 그녀를 보면서 이상한 말을 했다.
“앞으로…… 피를 밟지 않고는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지옥 속에서 살겠지만, 그래도 내 팔자려니 하고 이겨내시게. 하루에 한 번쯤은 억지로라도 즐거워지려고 노력하고.”
“무슨 말이에요?”
“활검문을 건드렸으니까 편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지.”
“아! 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이름이나 알지.”
“몽설(夢雪). 몽설이라고 해요.”
그녀는 취화원에서 부르는 호명(號名)을 말해 주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호명으로 불려 와서 호명이 익숙하다.
살수가 호명을 발설한다는 것은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이미 제 목숨을 구해 준 이들에게 말 못 할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드는 불안감을 무시했다.
“몽설…… 꿈속의 눈인가, 꿈에 내리는 눈인가. 꿈같은 눈인가. 아주 예쁜 이름이야. 후후! 그러고 보니 눈을 본 지도 꽤 오래됐군. 옛날…… 눈 덮인 날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노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배에 실렸다.
나무판자나 다름없는 침상이 뱃전에 놓였다.
“……할배.”
“걱정하지 마라. 난 산다니까.”
그 말에 아걸이 홱 돌아섰다. 그리고 거세게 노를 저었다.
배가 빠르게 강을 따라서 흘러간다.
아걸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하지만 노인은 끝없이 배를 쳐다보고 있다.
아걸을 눈에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