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第五章 대류(大溜) [빠른 물살] (2)
“……음!”
죽은 문도를 살펴보던 청수검(淸秀劍) 왕유(王維)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무서운 칼이다!’
마구간에서 죽은 두 무인.
청수검 왕유는 두 무인이 어떤 무공에 당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의 강호 경륜은 짧지 않다.
활검문 오검법(五劍法) 중 초상검법(礁像劍法)을 극성으로 깨우쳐서 활검문의 십검(十劍)에 올랐다.
십일 마다 열리는 공개 비무에서 두 번째 교두(敎頭)로 나서고 있으며, 삼 년이 넘게 타 문파 고수들을 상대로 무예를 겨루면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그런 그인데…… 문도들이 어떤 칼에, 어떤 수법으로 죽었는지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문도들은 단숨에 심장이 갈렸다.
피 묻은 작두가 떨어져 있으니, 흉기는 작두다.
그게 더 혼란스럽다. 어떻게 날이 뭉툭한 작두로 이런 상처를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인가?
심장 부위가 면도날로 베어 놓은 듯 매끄럽게 잘렸다.
“이대로, 이 상태 그대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운구해라. 문주님이 직접 살펴보셔야겠다.”
“넷!”
제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전 문도에게 전해라. 놈을 만나면 절대로 달려들지 말라고. 발견 즉시 연통(煙筒)을 쏘라고 해. 너희들은 감당하지 못할 초고수다.”
“알겠습니다.”
제자가 단단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 * *
‘가는군.’
노인은 시신 두 구가 마방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청수검은 시신에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활검문주는 확신은 못해도 막연하게 짐작은 할 수 있으리라.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럼 이제 내 일을 해 볼까?’
그는 휘적휘적 걸었다.
준비도 안 된 어린아이를 강호에 내보냈다.
이제 젖도 떼지 않은 꼬맹이를 피비린내 나는 늑대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살기를 바랄 수 없다.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싸움은 시작됐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아걸이 혈투를 뚫고 나와 살아남길 바란다.
아걸을 도와줄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절대 살인귀와 싸워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강한 무공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한데 그 무공조차 살인귀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무슨 방도가 있겠나. 아무 방도도 없다. 피할 곳이 없는, 사방이 창살로 가로막힌 전장임에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 아주 약간, 아주 작은 도움을 줄 수는 있다.
그래서 남았다.
아걸에게는 너만의 싸움이니 너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곁에 같이 있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된다고 말했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
아걸에게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다.
‘이쯤에서 시작하면 되겠군.’
동승 외곽, 한적한 길에서 활검문 검사들을 봤다.
아는 자들이다.
활검문 검사는 육백여 명을 넘어서지만 그는 그들 대부분을 안다.
그들은 마방과 연관이 없다.
활검문에서도 자체적으로 말을 기르기 때문에 마방에서 말을 빌릴 이유가 없다.
반대로 동승 사람들은 활검문 검사들을 거의 안다.
이쪽은 알고 저쪽은 모른다.
노인은 검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 검 말이네. 검은 그렇게 차는 게 아냐.”
“뭐야!”
활검문 검사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차면 발검이 제대로 안 돼. 아! 자네 같은 하수는 간발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지도…….”
“뭐야! 이 늙은이가 어디서!”
“쯧! 가르쳐 줘도 난리야.”
노인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검사의 목을 찔렀다.
“앗!”
검사가 기습을 깨닫고 몸을 뒤로 홱 제쳤다.
하지만 지팡이는 목을 노리지 않았다. 이미 변초를 일으켰고, 이번에는 물러설 틈도 주지 않고 가슴을 꿰뚫었다.
퍽!
“악!”
가슴을 뚫는 소리가 울렸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검사는 짧은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검사의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거 봐. 검을 그렇게 차면 발검에서 늦는다니까. 가슴이 뚫릴 동안 검도 뽑지 못했잖아.”
노인이 검사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때,
쒜에엑!
노인을 노리고 우측 뒤에서 검이 날아왔다.
다른 활검문도가 대뜸 검을 날려 온 것이다. 노인이 인정사정없이 살수를 퍼붓자, 그도 암습을 취해 왔다.
휘익! 쒜엑!
노인은 몸을 홱 돌려세웠다. 그리고 기습 공격을 유유히 피하면서 지팡이로 목을 후려쳤다.
빠악!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노인의 지팡이는 정확하게 검사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단숨에 목뼈를 부러뜨렸다.
“쯧! 너무 약하니까 싸울 맛도 안 나.”
쉬이이잇!
노인이 신형을 쏘아냈다.
순간, 노인은 벌써 십여 장 밖을 벗어났다.
무섭도록 빠르다. 신형이 물 흐르듯 부드럽게 흘러간다. 그리고 매우 가볍다.
“쫓아!”
활검문 검사들이 메뚜기처럼 뛰어올랐다.
“마방 노복입니다. 그를 알아본 자가 다수입니다.”
활검문 검사를 공격한 노인이 누군지 신분이 밝혀졌다.
굳이 신분을 알아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싸움을 지켜본 사람 중에는 노복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
하찮은 일꾼.
무식한 비렁뱅이.
노복을 아는 사람은 그가 활검문 검사를 죽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마동에 이어 노복까지? 하……! 마방이 숨은 고수들 은거지였나?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으음!”
노룡검(怒龍劍) 구지유(具指諭)는 침음을 흘렸다.
어제, 오늘…… 조용하던 동승에 파란이 일어나고 있다.
강조가 죽었다. 살수는 도주했다. 살수를 찾으러 나선 무인들이 되레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길목을 막고 있던 무인들이 벌건 대낮에 피습당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청수검 왕유의 전갈을 받았다. 활검문 십검이 아니면 상대하지 못할 초고수가 문도들을 베었다고 한다. 그러니 십검은 어디서 연락이 오든 항시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그러던 차인데 이번 일이 벌어졌다.
“이게……?”
구지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목뼈를 부러트린 검초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슴을 꿰뚫은 검초는 알겠다.
노호조파검(老虎抓破劍)이라는 검초다.
아주 사납고 맹렬한 초식이다. 빠른 속도로 강하게 타격하는데, 마치 호랑이 발톱에 살점이 뭉텅 뜯겨나간 듯한 흔적이 남는다.
그가 노호조파검을 알아본 것은 검흔(劍痕) 때문이다.
지팡이가 가슴을 뚫고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매우 깨끗한 검초를 구사했다. 무척 빠른 쾌검으로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죽였다. 하지만 지팡이를 뺄 때는 다르다. 아주 강한 힘으로 거칠게 뽑아냈다. 그래서 상처가 매우 난잡하다.
얼핏 보면 구분하기 힘들다.
요행히도 노복은 찌른 곳과 빼낸 곳이 약간 다르다. 지팡이를 빼낼 때, 약간 위로 쳐들었다. 덕분에 밑구멍은 매우 깨끗하고, 위는 쥐가 파먹은 듯 거칠다.
손톱으로 할퀸 듯 확 뜯긴 상처!
실전된 사검(死劍), 살수들의 검, 노호조파검이 틀림없다. 멸문된 살수문파 적랑대(赤狼隊)의 무공이 확실하다.
‘강조를 죽인 살수는 여자라고 했다. 취화원이 아닐까 했는데……. 적랑대인가? 아냐, 적랑대는 멸문한 지 이십 년이 지났다. 도대체……!’
노룡검은 마음이 답답해 왔다.
노호조파검을 쓴 자는 상당한 고수다. 그렇다고 잡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당장 잡아야 한다.
그가 말했다.
“제오당(第五堂)에 연락해라. 살수 불명, 문파 불명, 살수가 사용한 무공은 노호조파검이다.”
“넷!”
그의 직제자가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쾌속하게 질주해 갔다.
꾸루루룩! 꾸루루루룩!
비둘기 수백 마리가 일시에 하늘을 뒤덮었다. 땅에서 비둘기 떼가 확 일어나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활검문 제오당은 문규 집행을 담당한다.
다른 문파에 견주면 집법당(執法堂) 혹은 형당(刑堂)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제오당을 관장하는 자는 십검 중 한 명이다.
검을 사도인(邪道人)처럼 악랄하게 쓴다고 해서 귀찰검(鬼刹劍)이라고 불리는 자다. 손속에 사정을 담은 적이 없어서 검을 뽑으면 반드시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오당이 드디어 추격을 시작했다.
* * *
쉬잇! 깍!
하늘을 날아가던 전서구나 괴성을 내지르며 뚝 떨어졌다.
노인은 전서구가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회색 비둘기가 날갯짓하려고 꿈틀거린다. 비침(飛針)이 몸 깊숙이 틀어박혀서 살 수가 없는데……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 보려고 발버둥 친다.
모든 동물이 이렇다. 숨을 놓는 순간까지 목숨을 포기하지 않는다. 숨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미리 삶을 포기하는 동물은 오직 인간밖에 없다.
물끄러미 비둘기를 바라보던 노인은 비둘기 발목에 채워진 전통을 풀어냈다.
전통 속에는 작은 밀지가 들어 있었다.
“훗! 제법 잘 그렸네.”
밀지를 펼치자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세필(細筆)로 아주 작게 그려놨는데, 얼굴 특징을 잘 살렸기 때문에 누구든 쉽게 알아볼 수 있겠다 싶었다.
이제 동승뿐만이 아니라 치우현(蚩尤縣) 전체에서 노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잘 가거라.”
노인은 아직도 살아서 퍼득거리는 비둘기를 죽였다. 어차피 비침이 내장을 뚫어서 살지 못한다.
* * *
오가는 사람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쫓긴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모두 자신만 쳐다보는 것 같다.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쳐다보는데도 ‘네가 바로 그놈이지?’하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풋! 오랜만에 쫓겨 보네.’
노인은 피식 웃으면서 걸어갔다.
사람들은 당장 그를 알아봤다.
일단 용모파기로 알아봤다. 깡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불룩 튀어나오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딱 봐도 성질께나 있어 보이니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또 노인은 피 묻은 지팡이를 들고 있다.
지팡이에 묻은 피는 시간이 흐르자 진한 갈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피다. 어린애도 지팡이에 묻은 게 피라는 사실은 알아보겠다.
그는 당장 주시 대상이 되었다.
“저…… 혹시 활검문도를 사삭! 하신 분, 맞죠?”
건장한 장한이 말을 붙여 왔다.
그는 말을 하면서 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크크큿!”
노인은 일부러 괴소를 흘렸다.
“아니, 아니. 제가 고발한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고요.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활검문 검사를 왜 죽이신 건지 이유가…… 아뇨. 아닙니다. 궁금하지 않습니다.”
장한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노인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난다. 장한을 쳐다보는 눈길에 잔인한 살심이 담긴다.
장한은 목숨의 위기를 느꼈다.
그가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곧 뒤돌아서서 냅다 도주하기 시작했다. 괜히 말을 걸었다는 듯이.
‘후후!’
노인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장한은 가까이 다가오다가 급히 도주했다. 단지 그것뿐이다. 옷자락이 닿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몸에서 향내가 풍기기 시작했다.
살문(殺門)에 몸담은 자가 아니라면 결단코 감지하지 못했을 미세한 향내다.
‘역시 제오당.’
노인은 감탄했다.
그는 솔직히 장한이 언제 손을 썼는지 알지 못했다. 손을 썼다기보다는 얕은 속임수를 썼을 텐데…… 눈앞에서 감쪽같이 향을 뿌리고 도주했다.
제오당이 자랑하는 초향(醋香)이다.
인간은 맡기 어렵고, 동물들만이 맡을 수 있다는 추격 향이다.
이제 곧 사냥개가 달려들 것이다. 하늘에는 초향을 쫓아온 새들도 있을 것이다.
새와 사냥개는 제오당의 또 다른 식솔이다.
‘이제 곧 바빠지겠군.’
노인은 길가에 앉아서 건포를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몸에 초향을 묻혔으니…… 곧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다. 그때는 아마도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거다. 잠자는 시간, 뒷간 가는 시간까지도 사라져 버린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두는 것이 좋다.
으적! 으적!
건포가 아주 달콤하게 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