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第五章 대류(大溜) [빠른 물살] (4)
타닥! 타닥!
모닥불이 거세게 피어난다.
불 위에 올려놓은 닭도 노릇노릇하게 익어 간다. 기름이 쫙 빠져서 아주 구수해 보인다.
아걸은 닭이 타지 않도록 이리저리 뒤집었다. 불빛이 일렁이는 그의 얼굴은 입을 꾹 닫은 채였다.
몽설은 허기를 느꼈다.
배고픔을 잘 느끼지 못하는 체질인데, 오늘따라 배 속에서 연신 꾸르륵 소리가 울린다.
“……성(性)이 뭐야?”
몽설은 아걸의 성씨를 물었다.
아(阿)는 성이 아니다. 가까운 사람을 부를 때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호칭이다. 이름이나 성씨 앞에 붙이는데, 아걸은 이름 앞에 붙인 것 같다.
“몰라.”
아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성을 몰라?”
“어려서부터 아걸이라고 불렸어. 나 같은 놈이 성은 알아서 뭐 해? 그럭저럭 살다가 가면 되는 거지.”
“후후, 거짓말은…….”
“…….”
“난 살수야. 어떤 말이 거짓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어.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 무공은 뭐고? 아! 말해 주지 않으려나? 그렇네. 그러니 성도 알려 주지 않는 거지.”
아걸이 노릇노릇 구워진 닭을 뽑아서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시장했던 참이다. 대뜸 받아서 다리부터 쭉 찢어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고기 향이 확 살아난다.
“맛있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닭고기를 처음 먹어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처음 먹어 보는 맛이다. 고기가 너무 부드럽고, 연하다. 고소하게 익었다. 홀린 듯이 먹게 된다.
“이렇게 많이 구워 먹었나 봐?”
“…….”
아걸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닥불에 고기를 많이 구워 먹었다는 뜻은 바깥 생활을 많이 했다는 말이 된다. 쉽게 말해서 떠돌이 생활을 많이 했다는 거다. 과거를 조금 엿볼 수 있다.
“……혈검경은 세 조각으로 찢어졌어.”
아걸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툭 던졌다.
몽설은 얼어붙었다. 그렇게 맛있던 닭고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놀랐다.
“내 검…… 봤구나?”
몽설이 매우 침착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그녀는 얼음처럼 차분해졌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 둘, 하나, 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다.
소리를 점차 늦춘다. 아주 느리게…… 실제로 심장이 느리게 뛰지는 않는다. 다만 심장이 느려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차분해진다. 냉정해진다.
감정은 죽고 차가운 이성만 남는다.
아걸이 고수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서운 일격을 봤기 때문에, 그녀도 전력을 다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
‘일격에 끝내야 해. 기습이 아니면 승산 없어.’
아걸을 공격할 생각이다.
혈검경 무학을 알아본 자를 살려 둘 수 없다.
죽거나, 죽이거나.
제삼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쪽 아니면 저쪽, 오직 양극단만 남는다.
조금이라도 제삼의 길이 있을 때, 굳이 생사를 결정하지 않아도 될 때는 취화원 살수 비기를 사용한다. 절대로 혈검경 무학을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럴 때는, 혈검경의 무학을 사용해야 한다.
스읏!
그녀의 손이 은밀하게 검을 잡아갔다.
아걸은 몽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지 못하는 듯 무심히 말을 이었다.
“상권은 신경(身經), 중권은 검경(劍經), 하권은 심경(心經)이지. 그중 검경을 얻었군.”
“혈검경을 잘 아나 봐?”
스읏!
검을 잡았다.
마음을 가라앉힌다.
살기가 높을수록, 죽이겠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호흡은 더욱 낮게 가라앉혀야 한다.
여차하면 바로 검을 뽑을 것이다. 혈검경 검초를 터트려 아걸을 쓰러뜨릴 생각이다.
슷!
아걸이 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몽설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손을 품에 찔러 넣은 이유는 알 바 아니다. 아걸이 어떻게 해서 혈검경을 알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순간,
슛!
느닷없이…… 눈앞으로 찬바람이 홱 지나갔다.
“웃!”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걸이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뿌렸다.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가루…… 하얀 분말…… 독인가? 아직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왜? 무엇을 뿌린 거지?
중독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서 얼굴에 뿌려진 가루를 훑어냈다.
하얀 가루…… 맞다. 가루다. 흰색이고, 무척 곱다.
“뭘 뿌린 거야!”
그녀의 말투가 사나워졌다.
“쌀가루.”
“뭐……?”
그녀는 혹여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나 싶어서 되물었다.
방금 쌀가루라고 한 것 같은데……? 쌀가루를 왜 뿌려? 이게 뭐 하는 수작이지?
오만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아걸이 또 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이번에는 그녀도 방심하지 못했다. 움찔 놀라면서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걸이 품에서 헝겊에 둘둘 감긴 뭉치를 꺼냈다.
그가 모닥불 옆에 헝겊 뭉치를 내려놨다.
“살기가 보이잖아. 혈검경을 드러내기 싫으면 망설이지 말고 손을 쓰든가. 나 같은 사람에게 발각될 정도라면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
아걸이 비웃듯이 말했다.
- 살기를 드러내지 말라!
남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힘이 약하면 분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한다. 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분수를 알고, 험한 일을 당해도 꼭 눌러 참아라. 그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원망이 사무쳐도 살기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살기가 없기 때문이다.
취화원에서 누누이 들은 말이다.
아걸이 말했다.
“쌀가루는 경고야. 살기를 드러낸 데 대한 경고. 그게 쌀가루가 아니라 독분(毒粉)이었다면 넌 벌써 죽었어. 굳이 독분을 쓸 필요도 없겠지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몽설은 더욱 마음을 차게 굳혔다.
아걸이 먼저 도발해 왔다. 마음에 품었던 살기가 노출되었다. 하지만 당황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침착하게, 냉정하게 주시해야 한다.
아걸 말이 맞다. 자신이 먼저 살기를 피워냈으니, 아걸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뭐라고 할 수 없다.
“고마워할 건 없고. 그런데…… 취화원 살수치고는 너무 약해. 실력을 보면 아직 암살을 수행할 정도가 아닌데, 이번 일은 어떻게 맡은 거야?”
“지목당했어.”
“지목?”
“원주님이 직접 지목했어. 그리고…… 나 그렇게 약한 살수 아냐. 굳이 알 필요는 없지만.”
‘이런 말을 왜 하지?’
그녀는 말을 하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하하!”
아걸이 웃었다.
몽설은 절대 약하지 않다. 활검문에 잠입해서 강조를 암살할 정도로 강한 살수다.
그녀는 강조까지 모두 칠살(七殺)이다. 일곱 명을 죽였다.
아걸이 약하다고 말한 것은 살수가 약하다는 게 아니다. 무공이 약하다는 뜻이다.
살인 능력이 뛰어난데, 무공이 약하다?
여기에는 모종의 비밀이 있다.
취화원주는 그녀에게 취화원 살수 비기를 집중적으로 수련시키지 않았다. 수련은 혹독하게 시켰지만, 육체적인 수련에 국한될 뿐이었다. 취화원 절기는 전수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가 펼치는 취화원 절기라는 것은 취화원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평범한 무공들뿐이다.
몽설에게 혈검경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혈검경 무학은 순수한 상태에서 수련해야 한다. 타 문파의 무공과 섞이면, 진기가 탁해진다.
그래서 취화원 비기 수련을 절대로 금지시켰다.
물론 몽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걸도 짐작하고 노복도 아는 사실이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살행을 하는 데 취화원 절기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녀에게는 혈검경 검초가 있다. 살행을 행할 때 혈검경 검초를 사용했다. 그리고 상대는 반드시 죽었다. 어떤 자도 혈검경 검초를 받아내지 못했다.
- 누구에게도 이 검초를 드러내지 마라. 이 검초를 사용할 때는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 한다. 절대로…… 살려두지 마라. 이 검초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면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이다.
그녀에게 혈검경 검초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오직 원주만 안다. 다른 사부들도 알지 못한다.
특히 다른 동문은 알지 못한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살수는 동문끼리도 비기를 비밀로 한다. 간혹, 동문을 죽여야 할 때가 생기기 때문이다.
아걸이 모닥불 옆에 놓은 헝겊 뭉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한테 쓸모가 없어서 버릴까 했던 거야. 그래도 임자는 있는 것 같네. 살펴봐. 필요하면 갖고, 필요가 없으면 태워 버려.”
아걸이 일어섰다.
몽설은 모닥불 옆에 놓인 헝겊 뭉치를 집었다. 그리고 두루마리를 풀었다. 순간!
“앗!”
그녀는 깜짝 놀랐다.
헝겊을 둘둘 풀어내자 익숙한 촉감이 만져진다.
중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주 귀한 양피지(羊皮紙)다. 서역(西域)에서 귀하기 이를 데 없어서 왕족이 아니면 사용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것.
그녀가 놀란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녀가 알고 있는 혈검경 검초가 이런 양피지에 적혀 있었다.
‘맞아! 그거야!’
양피지를 펼치지 않았는데도 안에 어떤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지 짐작된다.
양피지 재질이 똑같다.
손에 만져지는 까끌까끌한 감촉…… 위에서 아래로 가로 그어지는 감촉.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펼쳤다.
제일 먼저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은 사람 모습이 보인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경맥도(經脈圖)다. 사람을 그리고 경맥이 흐르는 무수한 선을 그려 놓았다.
임독맥(任督脈)이 그려져 있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글도 쓰여 있다.
- 천음료(天陰了). 하우(下雨). 하착대우적천공음침침적(下着大雨的天空陰沉沉的). 청낭적천공절불하폭우(晴朗的天空絕不下暴雨). 검초야응여차(劍招也應如此). 재전개검초지전(在展開劍草之前), 요창조검초전개적환경(要創造劍招展開的環境)…….
‘하늘이 흐리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하늘은 어둡다. 맑은 하늘에서는 절대로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다. 검초도 이와 같아야 한다. 검초를 펼치기 전, 검초가 전개될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녀는 양피지에 적힌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제목이 적혀 있지 않지만…… 혈검경 하권 심경이다.
중권 검경과 하권 심경이 딱 맞아떨어진다.
심경을 읽자마자 검경을 수련하며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일시에 깨달아진다.
암흑 속에서 해를 본 것 같다.
‘이, 이거…… 이거!’
그녀는 놀란 눈으로 아걸을 쳐다봤다.
혈검경 하권 심경!
혈검경 무학을 수련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무학을 수련하는 무인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비급이다. 양피지 다섯 장 중 한 장만 무림에 흘러나가도 당장 피바람이 몰아칠 상승 공부다.
아걸은 이런 비급을 쓰레기처럼 버리고 갔다.
필요 없으면 태워 버리라고? 천만에! 아걸도 이 비급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안다.
‘이걸…… 나를 준 거야?’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아걸이 자신을 살려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한데 난데없이 그녀만 알고 있는 혈검경 검경을 말하는가 하더니, 심경까지 전해 준다.
아걸은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늘이 내려보낸 신선인가?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녀는 아걸이 걸어가는 모습을 뚫어지게 쏘아봤다.
아걸은 멀리 걸어가고 있다. 그녀에게 비급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다.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아걸이 누구든, 어떤 속셈이든…… 당장은 혈검경 심경을 수련한다. 무엇을 하든 필요한 공부이니.
그녀는 양피지 글귀 속으로 몰입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