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第六章 사문(師門) (5)
몽설은 혈검경을 차분하게 탐구했다.
아걸은 그녀에게 시간을 넉넉하게 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활검문도가 추격해 오고 있을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추격대가 가까이 다가왔을 것이다. 몸이 나았으면 가자는 말도 하지 않는다.
재촉을 일절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쫓기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렸다.
급히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활검문에서 강조를 죽인 일도 깨끗이 잊어버렸다.
그녀는 오직 혈검경 속에 파묻혀 있다.
읽고 수련하고, 생각하고 수련하고…….
오직 수련만 반복한다.
아걸은 개울가에 터를 잡았다. 풀을 베어 깔았다. 푹신하게. 그녀의 침상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그녀를 위해서 밥을 지어 준다. 국을 끓이고, 나물 무침을 해준다. 부실한 식사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객잔 같은 곳에서 먹는 것보다 더욱 맛난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어디로 갔을까? 잠은 어디에서 자나? 모르겠다. 날이 밝을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시중을 들어왔던 사람처럼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아걸은 낯선 사람이다. 내력을 알 수 없는 고수다. 그런 사람이 시중을 들어 주는데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아니,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 시중을 들어 주는 것처럼 편안하다.
정말로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
아걸이 왜 자신을 도와주는지 모르겠다.
혈검경 같은 절정 비급을 아무 조건 없이 불쑥 건네준 것도 께름칙하다.
혈검경은 천고에 남을 무학이다.
당금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람은 허공부 허도기인데, 그가 수련한 조명십해만큼이나 뛰어나고 강력한 무쌍 절학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혈검경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무학이 아니다.
혈검경을 찾겠다고 작심해도 찾을 수 없다. 천하를 이 잡듯이 뒤져도 찾지 못한다.
그런 무학을 불쑥 건네준 저의가 의심스럽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나? 혈검경을 수련시켜서 누구를 죽여 달라고 살인 청부라도 하려나?
아니다. 아걸은 그녀보다 더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아걸이 직접 칼을 드는 게 훨씬 빠르고 은밀하다.
청부하기 위해서 그녀를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꼭 물어봐야겠어. 왜 날 도와주는 건지.’
* * *
“날 왜 도와주는 거야?”
“그거 몇 번째 물어본 건지 알아? 하하! 아마 스무 번도 넘을 거야. 인제 그만 물어.”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는데 도와주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문제면 들어줄 테니까 속 시원하게 말해 줘.”
“없다.”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원하는 게 있어야 하잖아.”
“이제 곧 헤어지게 될 거야.”
“…….”
몽설은 아걸을 쳐다봤다.
당연히 아걸과는 헤어진다. 동행은 길지 않다. 원래 동승만 빠져나오면 몸 상태가 어떻든 바로 헤어질 생각이었다.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한데 막상 아걸이 헤어진다고 말하니 조금 섭섭하다.
아걸이 말했다.
“나중에,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혹, 만나게 되면 차라도 같이 한잔하고…… 그거면 됐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까.”
몽설은 아걸을 쳐다봤다.
취화원 살수들은 상대방의 심리를 읽는 데 능통하다.
행동에서, 몸짓에서, 말투에서 마음 상태를 읽을 수 있다. 눈빛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입술이 어떤 식으로 비틀리는지, 침을 삼키는 모습에서까지 심리를 읽는다.
청부 대상자의 심리를 읽지 못하면 살수를 펼치지 못한다.
살수에게 상대방의 심리를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취화원에서는 아예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수련 과정을 별도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일상생활 모든 부분에서 배운 것을 활용하도록 가르침 받는다.
아걸에게 살수 비기를 쓰려고 해서 쓴 것은 아니다.
취화원에서부터 길든 버릇이 자신도 모르게 아걸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아걸을 쳐다본다.
눈동자, 눈썹, 콧등의 찡그림, 볼의 움직임, 침 삼키는 모습, 팔에 돋아난 소름…… 모든 것을 세밀하게 살폈다.
아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진심은 무엇이며, 지금 그가 하는 말에 거짓은 없는가.
거짓은 없다.
아걸은 너무 편하다. 가려진 것이 전혀 없다. 순진무구? 모든 것을 다 개방해 놓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점이 오히려 불편하다.
아걸은 편한데, 편한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걱정이 없고, 순진한 모습…… 이런 점들이 함정처럼 느껴진다.
맞다! 함정이다!
아걸은 전혀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살도를 펼친다.
기운을 숨기는 데는 달인이다.
지금 그가 하는 말에 거짓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판단해 낼 수는 없다.
‘휴우!’
몽설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감당하기 벅찬 남자를 만났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나한테 시간을 며칠이나 더 줄 수 있어?”
“며칠이나 필요해?”
“이걸 다 수련할 수는 없고……. 일단 외우기만 하려고. 최대한 며칠이나 더 머물 수 있는지 말해 줘.”
몽설은 혈검경을 완전히 몸에 붙일 생각이다.
지금도 하권 심경의 모든 구결, 도해가 머릿속에 잠겨 있다. 하지만 혹여 모르니까……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완전히 몸에 붙여 놓을 생각이다.
그래야 비급을 소각해도 안심이 된다.
그렇다. 혈검경 비급은 소각되어야 한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혈검경 비급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면 안 된다. 혈검경은 수련이 금지된 마학이다.
혈검경이 왜 마학인지는 그녀도 모른다. 취화원주가 마학이니 꼭꼭 숨겨야 한다고 해서 숨겼다. 그런 연유로 혈검경 검공을 쓸 때는 특히 조심했다.
아무도 모르게 혈검경을 머릿속에 담고 차분히 수련해야 한다.
아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앞으로 닷새 정도는 더 여유가 있을 것 같아.”
“닷새? 왜 닷새야?”
“그렇게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한데. 하하. 단지 느낌이니까.”
“그래도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닷새로 추정한 데는.”
“이유 같은 건 없어. 저들이 내게 검을 들이댈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대략 닷새 정도 아닐까? 그뿐이야.”
이번 말도 진심이다. 아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진심만 말하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믿지 못한다. 아걸은 거짓도 태연히 진실처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런 말을 하는데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지만.
“알았어. 그럼 난 나흘 안에 끝낼게.”
끄덕! 끄덕!
아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흘은 금방 지나갔다.
어떨 때는 참 긴 시간인데, 이곳에서만큼은 잠시 눈 감았다가 뜬 것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눈을 뜨면 바로 밤이 다가왔다. 밤이 아까워서 불을 밝히면 곧 새벽닭이 울었다.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것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든 적도 있다.
그때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오전을 잠자면서 보냈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박기도 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나흘을 보냈다.
‘다시 한번…….’
몽설은 비급을 외웠다.
구결, 도해를 다 살폈다.
각 장마다 어떤 글자에서 시작되고, 어떤 글자로 끝나는지 그림처럼 그렸다.
다 외웠다. 실수는 없다.
그녀는 비급에 불을 붙였다.
화라락!
양피지 비급이 순식간에 불길을 잡아당겼다. 가죽으로 만든 비급이 활활 불타오른다.
몽설은 비급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심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되뇌었다. 이미 비급이 불타고 있는데…… 그래도 혹여 놓친 것이 없나 또다시 살펴본다.
혈검경이 마공이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비급을 소장할 수 있다면, 소장 자체가 금지된 무공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겠나.
하기는…… 혈검경 같은 무학은 소장 자체만으로도 살겁을 면치 못한다. 마공이 아니더라도 욕심에 눈이 먼 무인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당할 것이다.
비급을 불태우기 전에 수십 번도 더 외워 보고 확인해 봤지만 불안한 마음에 다시 또 외워 본다.
완전히 외워진다. 이상 없다.
‘됐어! 혈검경이 사라졌어!’
아직 상권 신경이 남아 있기는 하다. 세상에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신경에 어떤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검경과 심경만 가지고도 능히 천하를 오시할 수 있다.
그녀는 갑자기 고수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 됐어. 기다려줘서 고마워.”
몽설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부탁이 있다.”
몽설은 입술을 살짝 비틀어 올렸다.
이럴 줄 알았다. 당연히 부탁이 있을 줄 알았다.
어떤 부탁인지 모르겠지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냥 도와주겠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뭔데? 말해 봐.”
“이건 꼭 들어 줬으면 좋겠어.”
“말해봐. 빚을 졌으니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줄게.”
몽설이 아걸을 빤히 쳐다봤다.
“앞으로 십 년. 십 년 이내에는 절대로 혈검경 무학을 쓰지 마라.”
“그게 부탁이야?”
“꼭 지켜줬으면 해.”
아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부탁 안 해도 내가 그렇게 할 생각이야.”
“됐다, 그럼.”
“살행할 때, 청부 대상자를 반드시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할 때만 사용할 거야.”
“그래. 똑똑하니까 잘 알아서 하겠지.”
“내가 똑똑하다는 건 어떻게 알아?”
“그 정도야 알지. 취화원 살수치고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있나.”
몽설은 문득 아걸이란 사내가 자신을 잘 알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다. 분명히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도 뚜렷하게 다가온다.
몽설이 물었다.
“우리 언제 만났었나?”
“아니.”
“정말 만난 적 없어? 낯이 매우 익어서.”
“만난 적 없어.”
“취화원으로 찾아와. 도와줬으니 술 한 잔 대접할게.”
“아니, 이게 마지막이야. 아무도 못 찾는 곳에 숨어서 한 십 년 지내려고. 우리 다시는 만날 일 없어. 잘 살아.”
“고마웠어. 그런데 정말 나한테 부탁 같은 것, 없어? 정말 아무 대가 없이 도와준 거야?”
“그래.”
“그럼 왜 도와줬는지 이유는 말해줘도 될 것 같은데. 이제 헤어지는 마당이잖아.”
“이놈 타고 가. 활검문 포위망을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아걸이 흑마를 내줬다.
“아니, 이러지 않아도…….”
“나는 이제 이놈을 먹여 살릴 재간이 없어. 이놈도 새 주인을 만나야지. 원래 내 말도 아니었고.”
아걸이 씩 웃었다.
햇살이 아걸의 얼굴을 비춰서일까? 그의 웃음이 무척 밝게 느껴진다.
몽설은 지저분하고 추레한, 절름발이 마동에게서 색다른 모습을 찾았다.
지금…… 감당하기 벅찬 강자의 모습이 보였다.
* * *
사부의 딸, 몽설.
아삼은 십 년 넘게 몽설을 찾아다녔다. 몽설을 찾느라 살수 문파를 죄다 뒤졌다. 일홀문주의 부인이 전직 살수였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어느 살수문파 출신인지는 알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모든 살수문파를 뒤졌다.
-몽설은 잘 숨겨 두었다.
아삼은 일홀문주의 말을…… 살수 문파에 숨겨 두었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하기는 일홀문주 비선이니 모르는 것이 이상한가?
“오비아(吳飛娥)만 찾으면 시작하자.”
“왜 그때 시작하는 건데?”
“유자(遺子)가 살아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봐야 안심하고 죽을 수 있으니까.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네 여자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지 않고 죽을 수 있겠어?”
“내 여자는 무슨…….”
“찾기만 하면 시작하자.”
아삼이 말한 대로…… 찾는 즉시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몽설은 이 싸움을 몰라도 된다. 지금처럼 살수로 살아가면 된다.
혈검경을 전했으니 앞으로 일이 년 정도만 버텨낸다면, 그녀를 다치게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부는 혈검경이 정혼 선물이라고 했다.
저 여자…… 몽설이라고 불리는 살수, 오비아가 정혼녀다.
몽설은 혈검경이 정혼 선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혈검경을 대하고도 그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수련에만 열중한다.
섭섭하지 않다. 오히려 다행이다.
몽설은 아무것도 모른 체 한 세상 살아가면 된다.
아걸…… 서리흔(徐離昕)은 멀리 떠나가는 몽설…… 정혼녀 오비아를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