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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31화 (31/600)

#31화. 第七章 사자유언(死者遺言) (1)

활검문 십검…… 귀찰검이 죽었다. 노인의 일수를 받아내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졌다.

한낱 무지렁이…… 언제나 놀려대고, 무시하고, 눈 아래로 깔아보던 노인네였는데.

노인이 펼친 괴초는 정말 기이하다.

귀찰검이 방심해서 당한 것이라면 할 말이라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귀찰검은 십이연환검을 제대로 펼쳐냈다. 온 힘을 다해서 펼쳤다.

귀찰검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그보다 더 잘 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제오당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제오당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 쓰러졌는데 무엇을 할 것인가. 남은 것이 있다면 합격(合擊)뿐인데, 그마저도 시원치 않을 것 같다. 연수합격을 취해도 노인을 잡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뒤만 쫓는다.

노인은 여전히 초향을 풍긴다.

비둘기가 노인의 머리 위를 맴돈다. 사나운 투견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짖어댄다.

제오당은 편안하게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람만 모아놓았어도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다. 하물며 제오당은 무능하지도 않다.

이상한 것은 노인이다.

노인은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미 추격대를 봤다. 초향 냄새도 맡았고, 비둘기도 봤다. 개들이 짖는 소리도 들었다. 귀찰검과 검을 맞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도주하지 않는다.

활검문을 아예 안중에 두지 않는 것 같다.

배알이 뒤틀린다. 놈이 저토록 오만방자한데, 활검문을 무시하고 있는데, 저런 짓거리를 빤히 보면서도 공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한다.

그들은 문주를 믿는다.

문주만 오면 노인은 죽는다. 문주는 노인을 벨 수 있다.

문주는 왜 아직 안 오나. 언제까지 저놈이 나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나.

제오당 무인들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노인을 지켜봤다.

* * *

“놈은?”

“술 마시고 있습니다.”

“…술?”

“저희 활검문은 안중에도 없나 봅니다. 온종일 술만 퍼마시고 있습니다.”

“지금 취해 있다는 말이냐?”

“네.”

“……음!”

청수검 왕유는 침음을 흘렸다.

노인이 귀찰검을 벴다. 청수검에 비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십 검 중 한 명을 죽였다.

노호조파검, 살수검이다.

노호조파검은 암중에서 펼쳐야 효과를 발휘한다. 은밀히, 기습적으로 펼쳐야 한다.

노인은 눈앞에서, 정면에서 펼쳤다.

노호조파검이 검호(劍豪) 경지에 올랐다고 봐야 한다.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대단한 검호다.

그렇다고 노호조파검이 두렵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투지가 샘솟는다. 귀찰검을 죽인 검과 당장이라도 부딪쳐보고 싶다는 욕망이 굴뚝처럼 치솟는다.

싸우고 싶다!

노인이 취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활검문이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낫다.

청수검은 문주의 명령을 상기했다.

-절대 공격하지 마라.

문주가 내린 명령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귀찰검은 문주의 명령을 어기고 공격했다. 그 결과가 죽음이다.

지금도 문주의 명령은 여전하다. 귀찰검이 죽었다고 해서 복수한답시고 공격해서는 안 된다.

-절대 공격하지 마라.

문주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지만, 공격하지 말라니 공격해서는 안 된다.

죽은 귀찰검 대신에 제오당을 맡은 청수검 왕유는 밀지를 꺼내 현 상황을 적었다.

마방 노인이 술을 마시고 있다. 도주하지 않는다. 지금 상당히 취해 있다. 싸우지도 못할 정도로. 아직도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은 유효한가?

활검문 문주에게 사실 그대로 보고했다.

* * *

푸드드득!

전서구가 날아왔다.

“문주님은?”

“후원에 계셔.”

“아직도?”

“…….”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전서구를 받아든 유운검(流雲劍) 길상(吉湘)이 후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허공부는 휘하에 삼십육문(三十六門)을 거느리고 있다.

서른여섯 개의 문파를 수족처럼 부리고 있다. 중원 전 지역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중에 한 곳이 활검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활검문도 대부분이 알지 못한다.

활검문이 허공부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사실은 활검문주를 비롯해서 극소수 몇 명만 아는 비밀이다.

활검문 십검은 활검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까지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마도 십 검 중 몇 명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 명 중 아홉 명은 알지 못하는 특급 비밀이다.

다른 문파도 사정이 똑같다. 대부분 허공부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완전하게 복속되어 있다. 주종관계나 다름없다.

활검문 십 검은 영원히 허공부에 도전하지 못한다.

십 검이 허공부에 비무 홍첩을 들이밀려면 먼저 문주에게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문주가 허락하지 않는다. 문주에게는 허공부에 도전하는 것이 하극상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도 허공부의 실체를 너무 뚜렷하게 알고 있어서 만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공부는 결코 도전할 수 없는 거대한 거목이지 않나.

활검문주가 아삼을 공격하지 말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문도의 몸에 새겨진 사흔을 보고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건드리면 안 되는 흉물(凶物)을 본 듯했다.

중원에 강한 칼은 많다.

문도의 몸에 새겨진 도흔이 단순히 강한 칼이었다면, 지금 문주 자신이 검을 들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강하다고 물러선다면 무인이 아니다.

그런데 심장을 가른 칼……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정확하게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상처를 보는 순간, 이것은 활검문이 상대할 수 있는 칼이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허공부가 직접 상대해야 하는 칼이다.

그래서 문도에게 상대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 때문에 문도들이 불만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귀찰검까지 죽었는데, 문주는 여전히 문밖을 나가지 않는다. 노인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싸우지 말라고만 한다. 불만이 폭주하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문주는 여전히 기다린다.

‘어디선가 본 칼인데…….’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정도의 칼이라면 즉시 기억나야 하는데, 결코 잊히지 않을 텐데,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이 칼과 부딪치면 활검문은 썩은 짚단처럼 무너진다는 사실만은 확신한다. 그래서 불만이 팽배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켜보기만 한다.

마방 노인이 술 취해 있다는 보고다.

언제까지 지켜보기만 할 거냐는 원망도 들어있다. 밀지에 적힌 내용은 공손하지만, 내용은 차디차다.

문주가 말했다.

“절대 부딪치지 마라.”

* * *

허공부 무인들이 아는 것은 풍도곡도 안다.

풍도곡은 허공부의 그림자다. 허공부가 나서기 힘든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준다. 문서를 훔쳐다 주고, 사람을 죽여 주고…… 허도기가 등 뒤에 감춰 놓은 칼이다.

그러니 허공부와 풍도곡은 한 몸이다.

풍도곡 사람이 허공부 소축십검을 무시할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서로 같은 입장이라면, 다음은 무엇으로 상하를 구분하는가? 누구 검이 강한가가 우선할 것이다. 무가에서 연배로 따지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검으로 말해야 한다.

풍도곡 일홀문 사람들은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강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한 사람, 직접 싸워 본 허도기만 제외한다.

그들은 소축십검을 눈 아래로 깔아본다.

소축십검도 이런 점을 알기 때문에 일홀문 사람들과는 가타부타 말을 섞지 않는다.

그저 ‘건방진 놈들!’ 정도로 생각한다.

사실, 평생을 가도 풍도곡과 허공부 무인이 만날 일은 없다.

허공부 무인이 풍도곡을 찾아가지 않는 한은 우연히라도 만나지 못한다. 풍도곡은 일거리를 주지 않는 한, 절대로 풍도곡을 벗어나지 않는다.

일을 주면 풍도곡은 그림자가 된다.

풍도곡은 세상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비밀, 허공부가 삼십육 개 문파를 관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안다.

삼십육 개 문파에서 사용하는 무공, 문주에게 연락을 취하는 방법, 그들이 사용하는 밀마…… 모든 것을 공부 허도기만큼 자세하게 알고 있다.

푸드드득!

하늘 높이 비둘기가 날아간다.

활검문이 사용하는 전서구다.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활검문 전서구인 것만은 확실하다.

쒝!

동박은 비수를 던져서 비둘기를 떨궜다.

활검문 영역에 들어왔으니 이제 슬슬 놈들을 추격할 셈이었다.

“……노호조파검?”

동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호조파검……. 일홀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노호조파검 따위는 무공 축에 끼지도 못한다.

노호조파검이 약한 무공이라는 뜻은 아니다.

노호조파검은 멸절된 살수문파 적랑대 무공이다. 붉은 이리들이 사용하던 살수검이다. 아주 날카롭다. 하지만 일홀문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일홀문도는 오직 일홀도를 갈고닦는 데만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일홀도에 도움이 되는 무공이라면 천리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무공이라면 옆에 비급이 떨어져 있어도 들춰보지 않는다.

일홀문도는 도움이 되지 않는 무공은 철저하게 버리는데, 노호조파검이 그런 검이다.

일홀도를 쓰는 놈과 노호조파검을 사용하는 노인.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래서 헷갈린다.

‘이놈들 뭐지?’

동박은 사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낱낱이 떠올렸다.

노호조파검을 사용할 만한 사람을 생각해 봤다. 적랑대와 연관이 있을 법한 자도 생각했다.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다.

사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자들이다. 살수가 필요치 않은 사람들이다. 적랑대와 연관이 있을 리 없다. 살수 무공을 사용했을 리 없다.

그러면 노인은 누군가? 어떻게 일홀도와 만났나?

‘에잇! 모르겠다.’

동박은 곧 생각을 접었다.

그는 어떤 일이든 깊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순한 것이 좋다.

누가 되었든 베면 그만이다.

동박은 손에 든 밀지를 던져 버렸다.

* * *

활검문, 수북이 모여 있는 비둘기, 컹컹 짖어대는 개.

이 세 가지를 한데 엮으면 답이 나온다.

‘저기 있군.’

동박은 웃었다.

조추한에게는 오고 가고 한 달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한 달까지 걸릴 일은 아니다. 한 보름 정도? 그 정도면 이번 일은 깨끗하게 해결될 것이다.

머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눈에 띄는 놈부터 죽인다.

어서 쫓아오라고 놀리기라도 하듯이 초향을 달고 사는 놈, 노복부터 죽인다.

마동은 저절로 찾게 된다. 자신이 찾지 않아도 놈이 찾아온다. 노복을 죽이면 저절로 만나게 된다.

사제인지, 가짜 짝퉁 사제인지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모두 죽일 것이다. 아! 기왕 무림에 나온 김에 악가보(岳家保) 장창도 구경할 생각이다. 얼마나 강한지.

“오늘은 날씨가 흐리군. 저 늙은이, 이런 날 죽게 될 줄은 몰랐을 거야. 하기야 죽는 날이 따로 있는 게 아니지. 이놈에게 걸리는 날이 죽는 날이지.”

동박이 허리에 찬 반도를 툭 치며 중얼거렸다.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죽는 날은 수많은 날 중에 하나만 선택된다. 그러니 어떤 날에 죽는 게 좋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날이 아쉽다.

노인이 죽는 날은 흐린 날이다.

“후후후!”

동박은 웃으면서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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