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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37화 (37/600)

#37화. 第八章 일비일(一比一) (2)

“보고합니다.”

낯선 자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동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서 그에게 보고 같은 것을 할 사람은 없다. 자신이 단서를 찾아 나서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그에게 와서 정중히 인사까지 하며 보고할 일은 없다.

그런데 보고를 한단다. 정중히 포권을 취하면서.

‘하……. 귀찮게 됐군.’

인상이 깊게 찡그려졌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짐작된다.

허공부가 손을 썼다. 풍도곡 살인귀를 허공부 밀행자로 둔갑시켜서 보고하게 했다.

정보를 가진 사람이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겠다는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 방책을 잘 살펴보면 살인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감시하겠다는 뜻도 포함된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으니, 다른 때 같으면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허공부에서 감시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을 의식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다르다. 허공부의 일도, 활검문의 일도 아니다. 일홀문…… 사문 일이다. 난데없이 불쑥 나타난 사제를 죽이는 일이다.

사제의 존재는 비밀로 해야 한다.

풍도곡에 있는 세 사람 이외에 또 다른 곳에도 일홀문 제자가 있다는 사실은 아주 큰 풍랑을 몰고 올 수 있다. 이게 화가 될지 득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문제가 될 것만은 틀림없다.

사제의 존재는 사형들과 상의한 후에 공개해야 한다.

‘보고 같은 것은 할 필요 없는데……. 아! 그렇군. 이놈들은 아걸을 놓쳤을 것이고…… 그런데도 보고하겠다고 온 것은 반대로 나보고 보고를 하라는 소린가?’

동박은 피식 웃었다.

활검문도에게 뒤를 밟힐 놈이라면 자신이 나설 이유도 없다. 일홀문 사람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

만약 그런 놈이라면 자신에게 죽은 놈…… 아삼이 목숨을 내놓기는 더더욱 억울하다. 겨우 그런 놈에게 복수해 달라고 목숨까지 던진다는 게 말이 되나.

활검문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말을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아걸을 놓쳤다.

동박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십 리 정도 가면 평산(平山)이라는 마을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곳까지는 추적했습니다만…… 놓쳤습니다.”

“훗!”

동박은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평산이라는 곳까지 쫓아간 것도 아걸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모습을 감출 생각이었다면 이들은 그곳까지도 쫓아가지 못했다.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온 거야?”

“죄송합니다.”

“알았어.”

동박이 거침없이 말했다.

낯선 자, 낯선 무인, 일면식도 없던 무인,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거침없이 하대했다.

활검문도는 급히 포권을 취한 후, 총총히 사라져갔다.

아마도 아삼을 벨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자인 것 같다. 그의 칼을 봤으니 잔뜩 겁을 먹고 사라지는 거지.

‘평산. 십 리. 가깝군.’

동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평산은 작은 마을이다. 아주 작은 마을이다.

아걸은 왜 이곳에서 모습을 감췄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다. 추격을 피하고자 한다.

활검문도가 따라붙는 것을 피하고 있다.

동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삼은 그를 유인했는데…… 아걸은 오히려 피해? 무엇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동박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마을을 쳐다봤다.

아걸이 사라졌다지만, 사람이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은신술과 경공이 뛰어나더라도 움직일 수 있는 부분과 움직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길에 나와 있었다고 했지. 그럼…….”

사람들이 서 있던 곳, 불빛이 켜져 있는 곳…… 모두 다 움직일 수 없는 곳이다.

“여기, 여기, 여기는 아니고…….”

동박은 손을 들어서 불이 켜져 있을 법한 곳을 가려 나갔다.

아걸이 움직일 만한 곳이 단박에 찾아졌다.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곳이 너무 많다. 그중에서 가장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나 같으면 이곳으로 가겠어.”

동박은 마을 옆에 있는 개울로 훌쩍 뛰어내렸다.

흔히 개울로 움직이면 철퍽철퍽 소리가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기(雨期)가 아닌 한, 도랑은 거의 대부분 말라 있다.

개울이 파여 있는 곳은 몸을 숨기기 좋다. 편안하게, 안심하고 걸어갈 수 있다. 누가 지켜볼까 봐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개울 둔덕이 몸을 가려 준다.

아걸은 이곳으로 아주 편안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보자…….”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개울을 살폈다.

물이 졸졸졸 흐른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다. 지렁이도 보이고, 우렁이도 보인다.

“그래. 그래. 그래야지. 킥킥!”

동박이 웃었다.

그는 아걸의 발자국을 찾아냈다.

추격에 능하다는 제오당 무인들까지 놓친 흔적인데, 그는 쉽게 찾아냈다.

일홀문 무인들은 숨은 그림을 아주 잘 찾는다.

바늘 백 개를 늘어놓고, 그중에서 바늘귀가 막힌 바늘 한 개를 찾곤 했다.

천천히 찾으면 누구나 찾을 수 있겠지만, 일홀문 무인은 사부가 손가락 한 번 딱 튕기는 순간에 찾아내야 한다. 눈썰미가 독사처럼 빠르지 않다면 불가능하다. 어린애 얼굴에 나 있는 솜털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무림에서는 이런 눈을 천안통(天眼通)이라고 부른다. 혹은 광목신안(廣目神眼)이라고도 말한다. 귀를 여는 것과 함께 천시지청술(天視地聽術)이라고 말하는 문파도 있다.

이름이야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

일홀문도는 가장 기본적인 체력 구조로 올빼미보다 밝은 눈을 가져야 한다.

풀이 쓰러져 있다.

꽃대가 뚝 꺾여 있다.

아주 살짝 밟은 흔적이다. 아니, 밟지도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활검문도는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일홀문도는 다르다. 인간이 밟은 흔적인데, 어찌 놓치겠나.

“킥킥!”

그는 웃으면서 발자국을 쫓아갔다.

아걸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한다. 일홀문도가 움직이는 방법을 알고 있지 않나. 그러니 쫓아가기가 더 쉽다. 다른 문파 사람들은 절대 쫓지 못하겠지만.

“이것 봐라?”

동박은 피식 웃었다.

아걸이 흔적을 남긴 이유를 알겠다. 그가 부주의해서 발자국을 남긴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마지막 한 푼의 흔적까지는 지우지 못한 것이다.

한데…… 발자국이 계속 이어진다.

개울을 따라서 멀리 쫓아왔는데, 발자국이 끊이지 않고 선명하게 찍혀 있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갈수록 더욱 선명하다.

아걸이 방심했나?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한 것인가?

천만에! 아걸은 절대로 방심하지 않는다.

어떤 곳, 어떤 자리에 있어도 신경은 살아있다. 술에 취했어도,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 뒷간에서 볼일을 볼 때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자가 발자국을 이런 식으로 남겨 놓는다? 방심한다? 말이 안 된다.

“요거 재미있군.”

동박은 비웃음을 흘렸다.

아걸이 그에게 정면 도전하고 있다.

아걸은 실수로 발자국을 흘린 것이 아니다. 공들여서 일부러 찍어 놓았다.

일홀문도만이 찾을 수 있는 흔적을 남겼다.

쫓아오라는 것이다! 유인이다!

동박은 죽은 아삼을 떠올렸다.

“하하! 이제야 이해가 되네.”

그는 왜 아삼이 죽을 자리로 부득부득 기어들어 왔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아걸에게 자신의 칼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다.

자신의 목숨을 던지고 칼을 남겼다.

도흔을 그렇게 뚜렷이 남겼으니…… 아걸이 진정 일홀문도이고, 일홀문도의 눈으로 아삼의 시신을 봤다면 몸에 새겨진 칼이 어떤 칼인지 즉시 파악했을 것이다.

이로써 놈이 이길 승산은 오 푼 가량 높아졌다.

한 사람이 목숨을 던져서 겨우 승산 오 푼을 높였다. 일 할도 아니고, 오 푼이다.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왜 그런 죽음을? 그런 짓이라도 해야 할 만큼 절박하다.

아삼과 아걸은 자신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이래서 아삼을 베고도 마음이 그토록 찜찜했던 거였구나.

“어디…… 마음대로 해 봐라. 큭큭!”

그는 발자국을 쫓아갔다.

서둘지는 않는다. 천천히 쫓아간다. 놈이 유인하는 이상…… 어디에선가 발자국 대신 칼이 기다릴 것이다.

“싸우기 좋은 장소를 고르겠다는 건데…… 그런 곳은 없지. 필승지세(必勝之勢)라는 건 병법(兵法)에나 있는 거야. 무인은 믿을 게 아무것도 없어. 나 자신 외에는.”

동박은 걸었다.

아걸이 자신을 유인하고 있으니…… 발걸음이 계속 이어진다.

* * *

아걸은 걸었다. 계속 걸었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나? 그런 곳은 없다.

병법에는 분명히 천기를 파악하고, 지리를 취하라는 말이 있다.

상대가 지리적 이점을 취하고 있으면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지리는 그만큼 중요하다.

무인들의 싸움에서도 지리는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내가 잘 아는 장소에서 싸우는 것만큼 승률을 높이는 방법도 없다.

하지만 일홀문도에게는 모든 장소가 다 똑같다.

벼랑에서 싸우든, 늪지에서 싸우든, 밀림 속에서 싸우든…… 어떤 장소든 다 똑같다.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싸우면 어떨까? 그런 장소에서 싸우기 위해 특별히 박투술(搏鬪術)을 연마하고. 그러면 한결 낫지 않을까?

몇 번 말해도 무방하다. 다 똑같다. 내가 싸움 귀신이라면 사형 역시 싸움 귀신이다.

일홀문도는 항시 싸움을 준비한다. 언제 어떤 장소에서 싸우더라도 항시 최선을 다할 준비가 갖춰져 있다.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다.

싸우기 좋은 장소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싸울 장소를 찾아서 이동하지는 않는다.

꾸욱!

땅에 발자국을 찍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시원하다.

사형은 분명히 자신이 찍어 놓은 발자국을 찾아냈을 것이고, 쫓아오는 중일 것이다.

급하게 서둘지는 않는다. 천천히 쫓아온다.

사형은 이미 자신이 유인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짐작했을 것이다. 어디 네 마음대로 해보라 하는 심정에서 자신이 돌아설 때까지 쫓아오기만 한다.

사형의 느긋한 행동에서 일홀문도의 자신감이 읽힌다.

할배 같으면 지금 당장 ‘어디서 싸울래? 인제 그만 움직이고 싸울 준비를 하지?’하고 말했을 것이다.

어디로 가고 있지?

답해 줄 수 있다. 쫓아오라고 발자국을 남기면서 움직이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목적지는 없다.

싸우기 좋은 장소가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 그런 장소를 찾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걸 자신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무작정 앞만 보면서 걷는다. 지금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목적 없이 걷고 있다.

하지만 걸으면서 준비는 하고 있다.

몸 상태가 최고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걷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장감이 팽팽하게 곤두섰다고 느낄 때까지, 사형이라는 존재가 확연히 느껴질 때까지 걷는다.

사형을 만난 순간, 몸은 최고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자신감이 붙을 때까지 걷는다.

사형의 일홀도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걷는다. 그때까지 충돌하지 않는다.

자신감은 언제 생기는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생기나?

무엇을 얻어야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낌없이 잃어버려야 생긴다.

머릿속에 사형의 칼이 담겨 있다.

눈만 감으면 할배가 떠오른다. 할배를 그어 내린 칼이 선명하게 되새김 된다.

그 생각을 잊어버려야 한다.

사형의 칼이 생각난다는 것은 마음속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두려움이 없다고 입으로 백 번, 천 번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몸은 두려워한다.

정작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칼 같은 것은 깨끗이 잊힌다.

갓난아기가 칼을 들고 있다고 하자. 두려워서 잔뜩 긴장하나? 아니다. 오히려 아기가 다칠까 봐 겁낸다. 아이 손에서 칼을 뺏으면서도 자신은 걱정하지 않는다. 오직 아이만 걱정한다.

사형의 칼…… 생각나지 말아야 한다.

갓난아기를 보는 것처럼, 사형이 그 칼을 쓰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떠올려야 한다.

그때까지 걷는다.

계속 걸을 생각이다. 흔적은 남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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