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第八章 일비일(一比一) (3)
절그럭! 절그럭!
동박은 자갈밭을 밟았다.
아걸의 흔적을 쫓아서 걷다 보니 자갈이 수북이 깔린 협곡으로 들어섰다.
쿠르르릉!
폭포 소리도 들려온다.
협곡 안쪽에 아주 큰 폭포가 있는지, 물거품이 협곡 입구까지 흩어져 나온다.
좌우로는 백 장 절벽이다.
자갈길은 구불구불하고, 자갈길 옆으로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작은 개천이 되어 흐른다.
“꽉 막힌 곳이네?”
동박은 남의 일처럼 무심히 말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아주 깊은 협곡이 시작된다.
지형으로 판단하건대, 협곡은 앞이 막혔다. 꽉 막힌 공간…… 외통길이다.
일홀문도는 이런 장소를 선택하지 않는다.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어지간히 급하지 않은 이상은 절대로 피하는 지형이다. 특히 추격을 당하는 처지라면 더더욱 말할 것이 없다.
그런데 아걸은 막다른 협곡을 택했다.
결전 장소다!
절그럭! 절그럭!
동박은 협곡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갈밭에 먼저 밟은 발자국들이 있다.
사람이 자갈, 돌을 밟았는데 무슨 흔적이 남아 있겠나.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는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곰이 밟아도 흔적 같은 것은 남지 않는다.
그런데도 동박은 흔적을 찾아냈다.
자갈들이 옆으로 밀려나 있다. 자갈 밑에 있는 모래에 신발 자국이 새겨져 있다. 아걸이 일부러 만들어 놓은 흔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걸은 분명히 협곡으로 들어갔다.
쿠르르르릉!
거대한 폭포가 나타났다.
백 장 높이에서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가 가히 장관이다. 수량도 많아서 물거품이 매우 거세게 튄다.
폭포는 전면에 있다.
협곡은 생각했던 대로 꽉 막힌 곳이다. 동박이 들어선 입구를 제외하고는 뚫고 나갈 길이 없다. 좌우로는 절벽이고, 앞은 폭포가 가로막았다.
아걸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있는지……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좋은 곳을 골랐군.”
동박이 말했다.
그의 음성이 회성음(回聲音)이 되어서 협곡을 웅웅 울렸다.
폭포! 폭포는 아주 기가 막힌 작용을 한다.
첫째, 기척을 완벽하게 숨겨 준다.
폭포는 웬만한 소리쯤은 완벽하게 감춰 버린다.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도 묻어 버린다. 사람이 흘릴 수 있는 대부분의 소리를 굉음으로 덮어 버린다.
특히 고도로 수련한 무인의 경우에는 더 쉽게 숨을 수 있다.
폭포가 아니더라도 기척을 숨길 수 있는데, 폭포까지 있으면 찾을 길이 없다.
둘째, 폭포는 기운(氣運)을 숨겨 준다.
살기라거나 투기(鬪氣) 같은 난폭한 기운들이 부서지는 포말에 묻혀서 가라앉는다.
폭포는 폭포 자체로 난폭한 기운을 가진다.
사나운 폭포 옆에 다가서면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사릴 때가 있다.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에 두려움을 느끼고 한 발 멀리 떨어질 때도 있다.
난폭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때로는 음습한 기운을 느낄 때도 있다. 괜히 후덥지근하고, 답답하고…… 그래서 생각보다 좋지 않구나 하면서 빨리 자리를 뜨는 경우가 있다.
폭포는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진다.
이런 성질들이 인간이 드러내는 살기나 투기를 감쪽같이 소멸시켜 준다.
일반인이 아주 간단하게 폭포가 어떤 요술을 부리는지 시험해 보는 방법이 있다.
친구와 함께 폭포로 간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친구를 느껴 보라. 친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해 보라. 온몸으로 알아채라.
친구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면 폭포의 기운을 이겨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친구를 느끼지 못한다.
폭포에게 진 것이다.
하물며 숨은 사람이 고도의 수련을 쌓은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더더욱 감지하지 못한다.
폭포의 기운은 그만큼 난폭하다.
상대방의 기척을 죽여주고 기감도 죽인다.
동박은 그런 의미에서 이곳이 좋은 장소라고 말한 것이다.
아걸이 그를 이기는 길은 기습밖에 없다. 그는 아걸의 칼이 활검문도의 가슴을 가른 것밖에 보지 못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봐서 그는 자신보다 한참 아래다.
정면승부로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기습을 취해야만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다.
“이번 기회는 네게 넘겨주지. 그러니 실망하게 하지 마. 적어도 내 몸에 칼집 하나는 새겨 놓으라고. 기대하지.”
동박은 칼을 뽑았다.
자갈밭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칼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스으읏!
운기를 한다. 공격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일홀문에서는 이런 싸움을 평정대치(平靜對峙), 고요한 대치라고 말한다.
고요한 대치는 일방적으로 한쪽이 유리할 때 진행된다.
나는 상대방을 읽을 수 없는데, 상대방은 자신을 읽고 있다.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선제공격을 가할 수 없다. 오직 상대방이 먼저 도발을 해야만 응대할 수 있다.
상대에게 먼저 공격 빌미를 마련해 주어야만 한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 그대로 고요한 대치가 이어진다.
동박은 평정대치에 대비해서 여러 수련을 했다.
대부분 짐승을 상대로 수련했지만, 장담하건대 인간을 상대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들었다.
아걸은 아직 평정대치 수련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정대치 수련은 일홀도를 얻은 다음에나 가능하다. 기습에 대해서 즉시 반격을 해야 해서, 찰나라도 손속이 늦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일홀도를 얻기 전에 평정대치 수련을 한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고요한 대치는 그만큼 힘든 싸움이다.
동박은 기다렸다.
* * *
고요한 대치!
생각했던 대로 동박은 고요한 대치 속에서 싸울 줄 안다. 아니, 아는 것이 당연하다.
동박은 고요한 대치를 수없이 경험했을 것이다.
아걸은 이런 상태에서 싸운 경험이 많지 않다. 아니,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다. 몇 번 경험해 보았지만, 모두 심상(心象)으로 경험한 거짓 싸움이다.
몸으로 체득하지 못한, 머릿속 상상으로 일궈낸 경험이다.
실전을 경험해 본 자와 초식만 수련한 자의 싸움이다.
아걸은 반철도를 품에 꼭 껴안은 채 침묵했다.
그는 동박이 협곡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반쯤은 숨이 끊긴 가사 상태였다.
동박을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앉아 있는 것을 안다.
그와 동박 사이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을 뿐이다.
동박은 그가 가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동박이 위치한 곳을 안다.
주도권은 아걸이 쥐었다.
아걸은 먼저 움직일 수 있다. 동박은 그가 움직인 다음에야 움직일 수가 있다. 아걸이 소리를 내거나 하는 어떤 움직임을 보인 후에야 그가 움직인다.
파아앗!
아걸은 전신 감각을 최대한으로 살렸다.
‘시작하자.’
동박을 유인해 냈다.
자신감은 최고조로 올랐다. 동박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전신에 넘친다.
동박의 칼도 지워졌다.
사실, 그의 칼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폭포 소리에 의존해서 간신히 마음 한쪽으로 밀어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두려움 따위가 일어나지 않는다.
몸 상태는 말할 것도 없이 최상이다.
길을 오는 동안 고기를 잘 먹었다. 잠을 충분히 잤고, 푹 쉬었다. 운기도 최고 상태로 잘 운행되었다.
모든 것이 최상이다.
이런 상태에서도 동박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를 이길 가능성은 전무하다. 차라리 깨끗이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이 낫다. 동박의 눈에 띈 이상, 이제는 빠져나가지도 못하지만.
“후웁! 후우웁!”
아걸은 호흡부터 시작했다.
간착아(看着我), 나를 본다.
모든 싸움의 시작은 내 중심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 중심이 있고, 주변이 있다.
진기가 보인다. 경혈이 보인다. 내가 보인다.
여기에서 아걸은 잠시 망설였다.
나를 봤으면 이제는 간인(看人), 상대를 봐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싸움이 시작된다.
간인을 시도하면 물러서지 못한다.
‘간다!’
“후웁! 후우웁!”
아걸은 호흡을 확장했다.
나를 본 후, 상대를 본다. 나를 중심에 놓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만들어 놓고, 상대를 지켜본다.
호흡이 이 정도에 이르면 상대도 자신을 보게 된다.
폭포가 기운을 막아 주지만, 감각을 직접 건드리는 진기가 있는데 모를 수 없다.
아걸이 다가간다. 호흡으로 상대방을 건드린다.
호흡으로 감각만 건드릴 뿐,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 아걸이 숨어있는 곳은 여전히 안전하다. 계속 아걸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다만, 동박이 호흡을 쫓아올 우려까지 배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동박이 호흡을 추격하는지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후우웁! 후우웁!”
아걸은 느리게 호흡했다.
동박의 호흡을 읽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호흡을 얹었다.
후! 후! 후! 후우!
동박이 짧게, 짧게, 짧게, 그리고 길게 호흡한다.
호흡의 장단이 다르다. 아걸은 균형 있게 늘어지고, 동박은 짧고 길게를 반복한다.
원래 동박의 호흡은 아걸처럼 느렸다.
그런데 갑자기 호흡을 변화시킨 것이다. 자신의 호흡에 타인의 호흡이 얹어진 것을 눈치챘다. 당연한 일…… 그래서 일시에 호흡을 변화시켰다.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호흡으로 싸운다.
아걸이 동박의 호흡을 쫓아가게 되면 아걸이 진 것이다. 반대로 동박의 호흡이 아걸에게 맞춰지면 동박이 진다. 자신의 호흡을 놓치는 쪽이 진다.
호흡을 놓치면 어떤 일이 일어나나?
진기가 변화한다. 진기 순환에 변화가 생긴다.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주화입마(走火入魔)와 비슷한 일이 경맥 속에서 확! 피어났다가 사라진다.
일홀무인은 그 순간을 잡아챈다.
나는 쾌속하게 움직이는데, 상대는 잠시 마비된다.
그 상태는 촌각보다도 짧지만…… 찰나에 불과한 시간일망정 멈칫거린다.
어떤 자도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이다.
동박은 이런 수법을 안다. 그래서 아걸이 호흡으로 건드려왔을 때, 호흡을 변화시켰다. 네 호흡과 내 호흡, 어느 쪽이 어느 쪽에 맞춰지는지 보자는 거다.
“후우웁! 후우웁!”
후! 후! 후! 후우!
두 호흡이 부딪친다.
긴 싸움은 아니다. 서로 진기를 강렬하게 부딪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서 승부가 의외로 빨리 난다.
“후우웁! 후우웁!”
후우! 후우! 후우!
동박의 호흡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걸의 호흡만큼 느리지는 않지만, 그가 내뿜던 호흡보다는 상당히 느려졌다.
호흡에 탄성이 사라졌다. 자발적으로 호흡하지 못하고, 아걸을 쫓아온다.
일홀문도는 이런 호흡을 일컬어 ‘호흡이 죽었다’라고 말한다.
동박의 호흡이 죽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 완전한 주도권을 쥐었다.
파앗!
아걸은 촌각의 여유도 남기지 않고 신형을 쏘아냈다.
기혈이 뒤엉키는 현상은 곧 제거된다. 동박은 느려진 호흡을 자신의 호흡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 전에 공격한다. 동박도 즉시 반격하겠지만, 일홀…… 일홀 정도, 십만 분의 일 정도 손속이 늦는다. 그 일홀을 얻기 위해서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다.
쫘악!
반철도가 절벽을 가로 그었다.
순간, 절벽이 둘로 쪼개졌다. 백 장 높이의 절벽이, 동박 등 뒤에 있는 절벽이 둘로 갈라졌다.
갈라진 윗부분이 사선을 따라서 흘러내린다.
동박도 갈라진다. 몸이 둘로 갈라진다.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상반신이 갈라진…… 상반신이?
이상하다!
사물은 둘로 갈라졌는데, 동박의 몸은 갈라지다가 멈춘다.
칼이 막혔다.
더 깊이 칼을 써도 양단은 불가능하다. 이미 투박한 칼이 되어서 고운 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갈라내는 것이 아니라 부욱 찢어낸다.
‘잘못됐다!’
아걸은 퍼뜩 경각심을 느꼈다.